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23화 (123/206)

123. 비상 상황

“나도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 중이다. 두 달 전쯤 갑자기 나타나 합류한 사람이다.”

“두 달 동안 찾아낸 정보가 전혀 없습니까?”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적다. 마치 과거가 없는 사람 같더군. 찾아낸 정보가 있긴 하지만 너에게는 공개할 수 없다.”

“문제가 있습니까?”

“극비사항이다.”

첩보부장은 아주 기계적이고 사무적인 태도로 내게 대답했다. 사실 이 정도로 대답을 해주는 것도 상당히 사정을 봐주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말로 도움이 되었다. 첩보부장의 대답으로 떠오른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얼굴이 아닌 가면이지만 미세하게 표정이 바뀌는 것을 보았다.

“정말 도움이 되었나?”

“네, 동쪽과 관련된 사람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누구나 볼 수 있을 만큼 첩보부장의 입꼬리 한쪽이 슬쩍 올라갔다. 내 말이 정답이라는 뜻일 거다.

“훌륭하군.”

첩보부장이 짧게 소감을 말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녀석들은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정말로 윌리엄 와일러스를 어디서 봤었는지 기억해냈다. 내가 봤던 그 기억과 외모가 너무 달라져 쉽게 기억해내지 못했을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쫓아가서 목을 따버리고 싶은 인간이다. 그런데 또 이런 입장에서 만나다 보니 당장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여전히 윌리암 와일러스가 왜 어떻게 이번 원정에 제멜아크 쪽으로 붙어 참여할 수 있게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첩보부장이 그것을 알려줬으면 좋겠지만 국왕의 허락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은밀하게 이동하셨다고 해도 이렇게 저희를 만나셔도 괜찮으십니까?”

슬라이트가 질문을 했다.

“괜찮다. 저들도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니까.”

말하자면 제멜아크에서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지만 알면서도 봐준다는 뜻이었다. 지구에서 보던 첩보영화가 생각나는 부분이었다.

스파이의 목록은 모두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모두 잡아들이진 않는다. 새로 파견되는 스파이들을 색출해내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이만 갈 때가 되었군. 건투를 빌지.”

첩보부장은 나타났을 때처럼 바람처럼 사라졌다. 들어올 때는 직접 보지 못해서 확실히 알지 못했지만 나가는 것을 보니 마법 물품의 도움이 아닌 자신만의 특별한 심법과 기술이었다.

저런 사람이 누군가를 암살하려고 마음먹는다면 어지간한 실력자가 아니라면 막아내기가 무척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실력자가 많지 않겠지만 첩보부장 하나도 아닐 것이다. 이렇게 보니 내가 보아온 세상이 그리 넓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세상은 넓고 실력자들도 많다.

“우와, 전설을 봤어.”

첩보부장이 사라지자 슬라이트가 감탄을 토했다.

“그렇게 유명하신 분인가?”

왕실에서 전해진 문서로 보긴 했으나 그전에는 저런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던 나이기에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

[왕국의 전설과 같은 분이에요. 수많은 비밀임무에 성공했다고 해요. 아는 사람은 극소수지만 말이에요. 실제로 어느 가문 출신인지 본명이 무엇인지도 아무도 모르지요.]

그야말로 어둠에서 활동하는 첩보영화 주인공 같은 사람이다. 어린아이들의 눈에는 그것이 멋있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임무 중에 죽는다 해도 아무도 모를 것이고 슬퍼해 주는 사람도 하나 없을 것이다.

내가 죽었을 때 누군가는 슬퍼해 줄까 하는 생각을 깊게 해본 적이 있었다. 지금이야 그래도 가족을 비롯해 몇 명은 울어줄 것 같지만, 전생에서는 정말 사치스러운 생각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죽었을 때 울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전생의 내 마지막이 생각나 쓴웃음을 짓고 있는데 또 다른 방문자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시오?”

슬라이트가 움직여 문을 열자 제멜아크 병사 차림의 사내가 나타났다. 이 사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는 나는 다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 병사는 조금 전까지 바로 옆에 있던 왕자의 숙소에 있었다. 교란 작전을 펼치고 왕자의 숙소에 들어갔던 바로 그 병사인 것이다.

“일단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병사는 조금 급해 보였다.

“들어오시라고 해.”

내가 말하자 슬라이트가 들어올 수 있도록 비켜섰고 병사는 들어오자마자 두리번거리더니 곧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빅터 하네스님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크레이브 왕자님의 전언을 가져왔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 쪽 수행원이 아닌 제멜아크 왕국의 병사인 당신이 가져온 겁니까?”

나는 뻔히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지적했다.

“전 제멜아크 왕국인이 아닙니다. 대외첩보부 소속 아일란트 브랑쉬라고 합니다.”

조금 전에 너희 부장이 왔다 갔다. 이놈아.

“전할 말이 뭡니까?”

“제멜아크의 공략대가 내일 바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공략대의 총인원은 5천명입니다.”

이 첩보원이 갑자기 우리에게 와서 거짓말을 할 가능성은 작았다. 갑자기 너무 일정이 당겨진 것이 아닌가 싶지만, 대군을 유지하는 것은 분명 큰돈이 들어가는 일이고 제멜아크 내부의 여론이 좋지 않다고 했으니 서두르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그건 그렇고 공략대로 들어갈 인원이 3천명인 줄 알았는데 5천명으로 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가 모르는 정보를 제멜아크 쪽에서 입수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것은 제 목숨을 걸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갑자기 첩보원이 뜸을 들였다.

“비밀은 지켜드릴 테니 말해보세요.”

내 말에도 첩보원이 굉장히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시선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손을 꼼지락대는 것이 누가 봐도 불안한 사람이었다.

“안심하십시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비밀을 지킬뿐더러 안전을 보장하겠습니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요.”

내가 기사의 명예까지 걸며 맹세하자 그제야 첩보원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맹세를 했지만 사실 나는 아직 기사가 아니다. 어리다는 것은 이럴때 아주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

“왕자님이 다른 마음을 품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라서 조금 놀랐는데 내 표정을 보고 첩보원의 눈빛이 조금 바뀌었다. 만족했다는 느낌?

분명 이 첩보원은 제멜아크의 보호를 받고 둘째 왕자의 숙소에 들어가 무언가를 전달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둘째 왕자의 계획을 우리에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알겠습니다. 만약 큰 일이 일어난다면 당신의 큰 도움이 있었다고 국왕 폐하께 알려드리겠습니다. 아일란트 브랑쉬님”

나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답했다. 옆의 슬라이트와 아이들의 표정도 굳어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내 약속에 아일란트 브랑쉬의 얼굴이 밝아지며 곧바로 돌아갔다. 멀리 사라지는 첩보원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참 재미있는 세상이야.”

가짜 정보와 첩자들이 난무하던 대격변 이후의 세상에서도 저런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진심으로 내뱉은 감상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따졌다.

“뭐가 재밌다는 거냐? 반역이란 말이다!”

“그, 그래요.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에요.”

[실망이에요. 빅터님]

심지어 소심한 자칼까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 기세였다. 뒷사정을 모르는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잠깐 진정하고 내 말을 잘 들어봐.”

나는 스승님이 일부러 숙소를 비우고 흑기사를 만나러 간 이유부터 시작해 여태까지의 사정을 아이들에게 알려주었다. 시시각각 아이들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그럼 저 사람은?”

슬라이트가 이미 사라지고 없는 아일란트 블랑쉬라는 첩보원이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쉽게 말하면 삼중 첩자지.”

“하!”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슬라이트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죠?]

스테이시가 아직 이해하지 못했는지 내게 물었다.

“아일란트 블랑쉬의 시점에서 잘 생각해봐. 이미 제멜아크쪽에 포섭되어 상당한 대가를 약속받았겠지. 그리고 이 왕자를 도왔겠지만, 정보를 다루는 사람이 그 성공 가능성을 몰랐을까? 그렇다면 살 구멍을 미리 파놓아야 하지 않겠어?”

“허, 헛똑똑이로군요.”

자칼이 정확하게 답을 내놨다. 자칼이 소심하다는 것이지 바보가 아니다.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슬라이트나 나에게 가려져서 그렇지 왕국에서 손에 꼽는 천재다.

“맞아. 그 말이 정확하네”

나름 영악하게 움직였다고 생각하겠지만, 고래 싸움에 끼인 새우일 뿐이다. 결국 어느 쪽이 승리하더라도 중간에 끼어 죽을 뿐이다.

“어쨌든 정보는 진짜일 거야. 왕자는 잘못된 선택을 했고 제멜아크와 연합해서 위협을 가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이것에 대해 대책을 세워야지.”

[일단 본국에 연락을 취해야 해요.]

“그건 스테이시에게 맡길게. 마법사님들에게 방법이 있겠지?”

[물론이에요.]

사람을 보내거나 서신을 전하는 것은 늦다. 그리고 기밀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마탑에서 파견되어 따라온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가능하다.

“좋아. 그건 스테이시에게 맡길게. 하지만 일단 스승님이 돌아오시고 나서 결정하도록 하자.”

모두가 내 의견에 동의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원정대의 실질적인 지휘관은 스승님이니 결정을 내리는 것은 스승님이어야 한다.

그때 저 멀리서 강한 오러의 충돌이 느껴졌다. 스승님과 흑기사다. 이곳에 그 둘 말고 이런 충돌을 만들어낼 사람은 없었다. 설마 혼자 있는 스승님을 먼저 노린 건가? 처음부터 그것을 노렸던 건가? 어쩌면 내가 적의 함정에 빠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급해졌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밖으로 튀어 나가 그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제멜아크와 라이브러쉬 양쪽이 모두 난리가 났다.

밖으로 튀어나온 라이브러쉬의 기사단과 제멜아크의 기사들이 튀어나오면 순식간에 긴박한 대치 상태가 되었다. 마탑의 마법사들도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그들은 국가 간의 싸움이 개입하지 않는다.

“일단 모두 모이세요!”

나는 소리를 질러 라이브러쉬의 기사들을 한곳에 모이도록 했고 슬라이트와 자칼도 자신의 가문에서 파견된 기사들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도 저 멀리에선 스승님과 흑기사 고든 바이런 후작의 격돌로 보이는 거대한 충격파가 연달아 터지고 있었다.

뒤늦게 둘째 왕자도 밖으로 나와 흉흉한 기세를 흘리며 서늘한 눈빛으로 호통을 쳤다.

“이 무슨 추태인가! 라이브러쉬의 기사들은 대오를 정렬하라!”

이미 우리가 다 수습한 후에 나와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 좀 꼴사납긴 했지만, 이 순간만은 기세가 대단해서 망나니 왕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둘째 왕자가 나섬에 따라 기사들이 조금 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왕자를 중심으로 일종의 방어진을 구축했다.

가까스로 라이브러쉬의 원정대를 수습한 우리 앞에 허겁지겁 뛰어나오느라 옷매무새도 제대로 다듬지 못한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나타났다.

“무슨 일인지 상황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내가 먼저 나서서 질문을 했지만,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답을 알 수 있었다.

“저, 그것이···.”

얘도 모른다. 천재라고 해도 신이 아닌 이상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멜아크는 지금 우리를 적으로 간주하고 노엘 브라스 백작님을 공격하고 있습니까?”

질문을 바꿔서 묻자 이번엔 곧바로 답이 나왔다.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 아닐 겁니다.”

일부러 계획한 것은 아닌것 같지만 그렇다고 확신도 아니다. 나도 그냥 단순히 두 무인이 흥이 돋아 대련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 진짜 결투라면 결과에 따라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럼 우리 라이브러쉬 왕국의 인원들이 이대로 노엘 브라스 백작님이 계신 곳으로 이동해도 되겠습니까?”

이어지는 내 물음에 가브리엘 스피노자의 눈동자가 격렬히 흔들리더니 이내 자리를 잡았다.

“그러시지요.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앞장서서 제멜아크 왕국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정리하며 길을 터주자 우리는 그사이를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중간에 선 이 왕자가 뭐라고 계속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나 잔뜩 긴장한 채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곳을 걷는 우리와 기사들에게는 잘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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