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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24화 (124/206)

124. 복마전

멀리서 느껴지는 충돌의 간격이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서 우리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었다.

“비켜! 비켜라!”

앞에서 연신 소리를 지르며 길을 여는 가브리엘 스피노자의 목소리에서도 다급함이 묻어나왔다. 적어도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렇게 달려가고 있을 때 격돌이 갑자기 멈췄다. 싸움이 끝났다는 얘기다.

만약 스승님이 당하기라도 했다면 이 자리에서 살아나가는 것도 문제겠지만, 살아남는다 해도 평생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마음이 급해졌다.

“먼저 간다! 뒤를 부탁해”

마음이 급해진 나는 전속력을 내어 제멜아크의 군대 사이를 달리기 시작했다.

“기다리시오!”

폭발적인 속도로 치고 나가는 나를 뒤에서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부르며 자신도 속도를 내어 따라붙었지만 내 속도는 보통 기사가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 뒤를 슬라이트를 비롯한 나머지가 죽어라 따라서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어서 그런지 다행스럽게도 딱히 내 앞을 가로막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무슨 일인가 하고 구경나와서 멍하니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빠르게 그리고 민첩하게 지글러 후작처럼 움직이며 장애물 달리기를 하듯이 사람들 사이를 달려 나갔다.

최고 상태로 펼치고 있는 초감각의 끝자락에 스승님과 흑기사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주위를 수십명이 둘러싸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 둘이 마주 서 있었다.

다행이었다. 스승님은 살아있었고 쓰러져있지도 않았다.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앞으로 가고 싶어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겨있었기 때문이었다.

“멈추십시오.”

내 앞을 가로막는 기사들의 제지에 나는 마침내 멈춰섰다. 어쩌면 힘으로 앞을 막아선 기사들을 넘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이럴 때도 냉정함을 유지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보통 사람들처럼 여기서 격정에 찬 목소리로 스승님을 불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힘으로 상대하기에는 지금 내 앞을 막아선 상대가 좋지 않다. 내 앞을 막은 기사는 보통 기사가 아닌 제멜아크 왕세자의 친위대였다.

친위대 수십명이다. 맞붙어 싸워도 이길 확률이 거의 없을뿐더러 전투가 벌어지는 순간 주위를 둘러싼 수천 명이 적으로 변할 것이다.

“라이브러쉬 왕국의 빅터 하네스입니다. 저 안에 노엘 브라스 백작님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만.”

나는 기사에게 정중하게 부탁했다.

“명령받은 바 없습니다.”

오직 왕세자의 명령만 받는 친위대의 기사이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럼 전하께 말씀을 전해주십시오.”

하지만 왕세자의 허락을 받는다면 가능한 일이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다.

“잠까아안!”

저 멀리서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달려오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생각보다 꽤 빨리 쫓아왔다. 다만 나처럼 상태가 좋진 않았다.

“허억! 허억! 기다리시...오!”

겨우 그걸 뛰고 헐떡이다니 이 친구 생각보다 체력이 약하다. 5성 기사라고 들었는데 경지는 높지만, 육체의 수련이 모자란 것 같다. 천재성이 너무 높다 보니 육체 수련 없이도 경지를 올리게 된 경우일까? 어쨌든 그것은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내, 내가 전하의 허가를 받아오겠소.”

“부탁합니다.”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개처럼 숨을 헐떡이며 왕세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내가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여전히 스승님과 흑기사 사이에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니 빨리 뛰어온 보람이 없다. 이어서 슬라이트를 비롯한 라이브러쉬의 기사들도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만 저쪽은 가운데에 짐 덩어리 하나가 끼어있고 진을 유지하고 있다보니 늦을 수밖에 없었다.

왕세자의 허락이 떨어졌는지 멀리서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크게 오라는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 슬라이트와 일행들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 나는 왕세자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내 주위에는 친위대 기사 넷이 가까이 따라붙었다. 이러니 내가 타국에 와있다는 것이 실감이 되었다.

걸어가면서 계속 스승님의 상태를 살피는데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대치 중인 상태 같지도 않았다. 대체 두 사람은 뭘 하고 있는 걸까?

왕세자의 근처로 다가가자 나를 감시하던 기사들이 작은 움직임을 보였다. 더 이상 가까이 가지 못한다는 뜻일 거다. 그 정도 눈치는 있어서 걸음을 멈추고 왕세자에게 인사를 올렸다.

“왕세자 전하의 아량에 감사합니다.”

타국의 왕족을 대하는 예절 같은 것은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나 최대한 흉내는 냈다.

“스승을 걱정하는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온 게로군?”

제멜아크의 왕세자가 나를 보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뭔가 수작을 부린 얼굴은 아니다. 그것으로 조금은 안심했다. 다만 순수한 대련이라고 할지라도 7성의 기사들이 격돌에서는 누군가가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일이다.

“나도 후작이 걱정되는 마음에 바로 달려왔네. 하지만 보시게.”

왕세자의 손짓에 인의 장막을 치고 충격파를 막아내고 있던 기사들이 비켜서자 스승님과 고든 바이런 후작의 모습이 보였다.

둘은 넓은 공터에 서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갑자기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대련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끓어오른 무인의 피를 너무 우습게 본 모양이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왕세자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우리 망나니 왕자와 수작을 꾸미고 있는 건 괘씸하지만, 일단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다.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뒤늦게 도착한 망나니 왕자께서 도착하셨다.

“뭐야? 벌써 끝난 건가?”

둘째 왕자 놈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에 주위의 모든 사람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지금 자신의 목숨이 요단강을 건넜다 온 건지도 모르는 멍청한 놈이었던가? 아니 생각해보면 망나니 왕자의 입장에서는 여기서 우리가 다 죽고 자신만 살아남는 것이 최고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왕자께서 조금 일찍 왔다면 조금 더 제대로 대련을 할 수 있었을 것도 같은데 말이오.”

“남의 대련을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조금 지겨워져서 말입니다.”

왕세자와 망나니가 한마디씩을 주고받았다. 그냥 인사치레 같지만 뼈가 들어있는 말들이었다.

둘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잠시 정적이 일어나자 멀리서 기막을 치고 대화를 나누고 있던 스승님과 고든 바이런 후작이 이쪽을 보았다.

그리고 이제야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란 표정이 되어 달려왔다. 정말 뼛속까지 무인인 사람들이었다. 그런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다. 달려오는 도중 잠깐 변했던 스승님의 눈빛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먼저 고든 바이런 후작이 왕세자에게 머리를 숙여 용서를 구했다.

“저 역시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스승님도 이어서 왕세자에게 사과했다. 왕세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손을 저었다.

“그렇게 높은 경지에 오르고도 정진하려는 기사들의 마음을 몰라줘서야 어찌 이 나라를 이끌어갈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후작은 고개를 드십시오. 노엘 브라스 백작도 후작의 상대를 해줘서 고맙습니다. 제멜아크 내부에서는 아무래도 후작의 상대를 해줄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왕세자는 좋은 군주의 연기를 아주 훌륭하게 해냈다. 속마음이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평생 저렇게 연기를 할 수 있다면 좋은 왕이 되는 것이다.

“그대 때문에 헛걸음했군. 자중하시오. 백작.”

망나니 놈은 무례한 말을 내뱉고는 왕세자를 향해 목례한 뒤 자신의 호위 기사들만을 데리고 돌아가 버렸다.

“그대들의 왕자는 화가 많이 났나 보군.”

“저희가 잘 달래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만난 김에 이야기를 해줘야겠군. 일정이 많이 앞당겨졌소. 우리는 바로 내일 던전에 들어가려고 하오.”

왕세자가 한 말의 내용을 나는 알고 있었으나 스승님을 모르시지 않았을까 했는데 스승님도 크게 동요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니 후작에게 들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저희가 딱히 나설 일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도 되겠습니까?”

“자리를 빛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생각하오.”

한마디로 들러리만 잘 서주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과연 그것으로 끝일까? 제멜아크와 망나니가 작당을 하고 뭔가 하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방심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공략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하오.”

스승님과 왕세자의 대화가 끝나고 고든 바이런 후작과 왕세자가 먼저 자리를 떴다. 이번에도 남은 것은 가브리엘 스피노자였다. 왕세자의 참모로 참가했다고 하는데 생각보다 왕세자의 신임을 크게 얻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좀 전의 나서주신 일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 은혜는 언젠가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잠시 겪어보니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이다. 라이브러쉬 소속이었다면 슬라이트나 자칼과 같이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속에 품고 있던 적개심도 왜인지 모르게 많이 사라져 있었다.

그때 가브리엘 스피노자의 뒤편의 먼 곳에 음침한 얼굴이 슬쩍 보였다. 윌리암 와일러스였다.

윌리암 와일러스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바로 등을 돌려 사라졌다.

“윌리암 와일러스라는 분도 던전에 같이 들어가시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그가 어떻게 공략대에 소속이 되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글쎄요. 명단은 제가 뽑은 것이 아니라서요.”

윌리암 와일러스가 끼어든 것에 왕세자의 참모보다도 훨씬 윗줄에 있는 곳에서 관여했다는 말이다.

“그를 조심하십시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그것뿐입니다.”

가브리엘 스피노자의 눈빛에 잠시 당황한 기운이 서렸다가 이내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천재는 이래서 좋다. 그냥 운만 살짝 띄워줘도 이해가 빠르다.

좀 전에 도와준 것에 대한 답례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내가 아는 윌리암 와일러스라면 분명히 던전 안에서 뭔가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놈이 제국의 유산을 차지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제멜아크가 차지하는 것이 훨씬 낫다.

지금 이곳은 그야말로 복마전이다. 던전을 노리는 제멜아크, 제멜아크가 실패했을 때 기회를 노리고 있는 우리들, 자국을 배반하려는 망나니 왕자 놈과 그것을 돕고 있는 제멜아크 그리고 던전을 노리는 또 다른 세력인 윌리암 와일러스까지 얽히고설켜 있었다.

큰 소동을 뒤로 하고 스승님과 함께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스승님이 떠나셨을 때 일어났던 일을 말씀드렸다.

“그런가. 그가 직접 왔었다는 말이냐?”

“예”

“아쉽구나. 나도 그를 한번 직접 봤었으면 했는데 말이다.”

대외첩보국장은 스승님도 한번 보기를 원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진짜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정교한 가면을 썼더군요.”

“그거야 그렇겠지. 국왕 폐하도 그의 진짜 얼굴을 모른다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정말 큰 일이로구나.”

“왕자가 다른 뜻을 품은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나. 제멜아크가 왕자를 돕고 있는 것은 확실히 큰일이겠지요.”

“아니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제멜아크는 왕자를 돕지 않는다.”

“네?”

이것은 또 무슨 말이지?

“바이런 후작과 대련을 빙자해 긴 시간을 가지며 대화를 나눴다. 그가 많은 이야기를 해줬지.”

“그럼 왕자를 돕는다는 제멜아크의 세력은 누굽니까?”

“귀족파의 일부라고 하더구나.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왕자를 도울만한 힘을 낼 수가 없지.”

“그럼 그 첩보부장이 한 말은 무엇입니까?”

“거짓은 아니지 않느냐?”

생각해보니 그렇다. 비록 타국의 약한 세력에 붙었다고 해도 반역이라는 꼬리표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 이 왕자는 뭘 믿고 그쪽에 붙은거랍니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승산이 있다고 보지 않았겠느냐?”

충분히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둘째 왕자가 지금부터 자국 내에서 무엇을 한다 하더라도 왕세자가 여태까지 쌓아올린 기반을 뒤집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라이브러쉬 왕국만 하더라도 왕권이 강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귀족파의 힘이 약하지 않다.

지금처럼 나라에 큰 혼란이 일어나 왕권이 약해진 제멜아크라면 귀족파의 힘이 평소보다 강해졌을 것이다. 한번 큰 도박을 걸어볼만 하긴 한 것이다.

하지만 제멜아크도 강력한 왕권을 오래 유지해왔다. 후계자인 왕세자의 기반도 튼튼하다. 결국 망나니 왕자 놈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귀족파가 지금보다 훨씬 큰 힘을 얻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왕세자가 이끄는 이번 공략대가 실패한다면 이 왕자에게 길이 열릴 수도 있겠군요.”

“그렇겠지. 아마도 왕자님은 이번 원정이 실패하기를 바라고 계실 게다.”

그렇게 생각하니 여태까지 망나니 왕자 놈의 행동이 모두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스트로퍼에게 이런 정보를 얻었습니다.”

나는 아스트로퍼와 나눈 이야기도 스승님에게 전해드렸다.

“허어, 큰일이구나. 제멜아크가 실패한다면 우리 차례가 올 텐데 그렇다면 우리도 마땅한 대책이 없는 것이 아니냐?”

“그건 지금부터 생각을 해봐야겠죠.”

-내가 있는데 왜 그런 걱정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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