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26화 (126/206)

126. 검제를 만나다.

양쪽이 거의 동시에 도착하는 바람에 스테이시와도 할 말이 많았지만, 타국의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서 나와 스승님이 제멜아크 왕국에서 찾아온 사람을 만났다.

“처음 뵙는것은 아니지요? 그래도 다시 소개드리겠습니다. 현재 이곳의 책임을 맡고 있는 우놀드 페르소 백작입니다.”

“노엘 브라스 백작입니다.”

“빅터 하네스입니다.”

이미 공략대가 던전 안으로 들어간 이후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다. 이 세계의 관료라기보다는 전생의 지구에서 많이 봤던 대한민국 공무원과 비슷한 느낌의 사람이랄까?

이것은 욕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일단 이 세계의 관료들은 기본적으로 권위적이고 사무적인 데 반해 우놀드 페르소는 낮은 작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치 대한민국의 공무원처럼 친절했다. 그리고 말하는 방식도 비슷했다. 최대한 자신이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구멍을 파놓는 식의 화법을 구사했다.

“오늘은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특별한 용건이 없으면 올 일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지난 몇번의 방문도 주둔 문제를 비롯해 용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세자 전하께서 던전에 들어가신 지 3주가 지났습니다.”

우놀드 페르소 백작이 그렇게 운을 띄웠다. 충분히 예상한 이야기였다.

“그렇군요. 벌써 그렇게 시간이 지났군요.”

스승님은 그 뜻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여유롭게 대답하셨다.

“브라스 백작께서는 던전 공략에 뜻이 없으십니까?”

“글쎄요. 그것은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니라 공략대의 책임자이신 왕자님의 결정이 중요한 일이라서요. 아니면 제멜아크 왕국의 공식적인 요청이 있어야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왕세자가 그 안에서 죽기를 바라는 망나니 왕자 놈이 먼저 움직일 리 없었고 제멜아크에서도 공식적인 요청을 하긴 조금 이르다. 그런데도 우놀드 백작이 찾아온 이유는 윗선에서 무언가 압력이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원정대의 실세가 브라스 백작님인 것이야.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큰일 날 말씀하지 마십시오. 엄연히 원정대의 총대장은 이 왕자 전하십니다.”

우놀드 백작이 스승님을 슬그머니 띄우며 건넨 말에도 스승님은 펄쩍 뛰셨다.

“그럼 이 왕자 전하의 결정만 있다면 공략을 시작하실 수 있다는 말이겠군요?”

“물론입니다.”

최대한 숨기려고 했지만 우놀드 백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우놀드 백작은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망나니 왕자 놈에게 들렀다 온 것이다. 좋은 소리를 들었을 리 없다.

“아직 왕세자께서 들어가신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습니까? 제가 알기로 제국이 만든 던전은 기묘하여 보통의 던전보다 공략하는 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고 알고 있습니다. 조금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보시지요.”

이번엔 내가 슬쩍 끼어들었다.

“그것이···.”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뻔히 아는 내용이지만 모른 척 물었다.

“식량과 식수가 문제입니다.”

“충분히 준비한 것이 아닙니까?”

“충분히 준비했습니다만 워낙 대인원이다보니 소모되는 양을 생각하면 슬슬 준비를 해야되지 않나 하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저희가 뒤따라 들어간다해도 곧바로 앞에 출발한 공략대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5천명이 하루에 먹고 마시는 식량과 식수를 생각하면 엄청난 양이다. 하지만 겨우 한 달 치를 들고 들어갔을 리는 없다. 내가 맞장구를 조금 쳐주자 우놀드 백작이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다. 아무래도 이런 공무원 스타일의 상대는 스승님보다 내가 더 잘하는 것 같다.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위에서 걱정스러운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정말 문제가 있다면 밖으로 몇 명이라도 내보내지 않으셨겠습니까?”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 없을 확률이 높았지만, 이번에도 모른 척 말했다.

“그것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들은 얘기로는 제국의 던전이라는 것이 공략하기가 매우 어렵게 설계가 된 모양입니다.”

아스트로퍼의 예상이 맞다면 저 던전의 내부는 이공간일 확률이 높다. 들어오는 것은 마음대로지만 나가는 것은 아니란다. 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곳이다.

“어쨌든 저희도 백작님처럼 위에서 지시가 내려와야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라서요. 이 왕자 전하나 본국의 명이 있기 전에는 저희 뜻대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정말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놀드 백작은 한참을 더 징징거리다가 돌아갔다.

“슬슬 우리도 움직일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준비랄 것도 없습니다. 그냥 들어가면 되는 것이니까요. 아스트로퍼에게 들은 정보나 제가 경험했던 던전을 생각하면 내부가 그리 넓지 않을 겁니다. 마신교 때문에 조금 신경쓰이긴 하지만 정말 문제가 생겼다면 마신교쪽에서 이미 던전을 공략하고 밖으로 나왔겠지요. 안이 어떤 상태인지는 몰라도 아직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럼 어쩔 것이냐?”

“일단 스테이시를 만나봐야 하지 않을까요? 무슨 소식을 들고 왔을 겁니다.”

우리는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스테이시와 아이들에게 돌아갔다.

“고생했어. 왕국에서는 별일 없었지?”

[저는 별일 없었어요. 다만 왕실에서 답신이 너무 늦게 나와 속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그러면서 스테이시는 왕실의 직인으로 봉인된 봉투를 스승님에게 전했다.

“왕자님께 따로 전하라는 것은 없었고?”

[없었어요.]

어지간히 찬밥 취급을 받는 망나니 왕자다. 아니 반역을 시도했으니 당연한 결과인가? 당장 소환해서 목을 자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수도 있다.

“혹시 우리 집에도 들러봤어?”

[네, 물론이죠. 계속 거기서 머물렀는걸요.]

“거기도 별일 없지?”

[정원사 한명이 그만뒀어요. 그리고 정원이 엄청나게 변했어요. 정령의 힘은 정말 대단해요.]

과연 스스로 그만둔 것일까? 아무래도 내가 돌아가기 전에 먼저 왕실에서 작업을 한 모양이다. 제멜아크와 연이 닿아있던 로인일까? 아니면 망나니와 연이 닿아있던 에드몬드일까? 어쩌다 보니 둘 다 반역자가 되었다. 그래도 한명을 남겨둔 것을 보니 우리 집 정원 사정을 생각해준 모양이다.

“뮤어 아이번이 힘을 제대로 쓰기 시작한 거야?”

[네, 정말 굉장해요. 하급 정령이 그 정도면 중급이나 상급은 얼마나 대단한 건지 짐작도 되지 않아요.]

뮤어 아이번은 내 예상보다 훨씬 성장을 빠른 모양이다. 어쨌든 잘된 일이다.

스테이시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눈 뒤 스승님과 함께 방으로 들어가 왕실에서 보낸 편지를 열었다.

그곳에는 단 한 문장이 적혀있었을 뿐이었다.

-와인은 숙성될수록 좋은 맛을 낸다. 곧 새로운 일꾼이 고용될 것.

만약을 대비해 돌려 말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대기하라는 소리다. 나도 왕실의 의견에 동의한다. 던전 공략이 늦어질수록 우리의 몸값은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일꾼이라는 것은 우리 집 정원사 이야기가 아니라 누군가가 추가로 파견된다는 뜻일 것이다. 어쩌면 이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정원사 한 명을 미리 치웠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굳이 병사나 기사를 늘릴 이유는 없고 실력자 중에 한명이 올 것 같은데 북부에 있는 올라프 후작은 움직이기 힘들 테니 가능성이 높은 것은 지글러 후작이 아니면 에인프라흐 공작일 것이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의미로 볼 수 있었다. 만약의 경우에 우리 차례가 와서 던전 공략에 들어갔을 때 제멜아크가 공략하지 못한 던전을 확실히 공략하겠다는 뜻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왕세자를 구하기 위해 제멜아크 쪽에서 또 다른 실력자를 파견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함이다.

국왕의 제외하고 양쪽 국가의 7성 이상의 실력자는 원래 같았는데 스승님이 벽을 넘으시면서 이쪽이 더 많아진 상황이다.

물론 숫자가 많다고 무조건 이기는 것은 아니지만 전략급 무기 한 개가 더 있다는 것은 확실히 더 유리할 수밖에 없다.

잡을 수 없는 바람처럼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일주일이 또 지나갔을 때 우놀드 백작이 다시 찾아왔고 여전히 아무 성과도 없이 돌아갔다.

내가 봤을 땐 슬슬 제멜아크에서도 뭔가 공식적인 움직임이 있을 때가 되었다. 그러는 와중 아스트로퍼의 도움을 받아 나는 새로운 성과를 얻기 직전이었다.

꽤 오래 머물렀던 3 서클의 경지를 벗어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승급하는 것은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이었다.

나는 스승님의 도움을 받아 스승님이 기막을 친 방 안에서 통로를 열고 지구로 넘어갔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지구에 들어오지 못했던 것은 통로를 얻고 나서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지구에 들어서자 이질적인 마나의 느낌이 확실히 느껴졌다. 나는 곧바로 마나 연공에 들어가며 승급할 준비를 했다.

보통 이렇게 준비된 상황에서 시간과 장소를 골라 승급하는 것은 꽤나 드문 일이다.

-내 덕인 줄 알아.

“그래, 고맙다.”

모두 아스트로퍼의 지식 덕분이었다.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는 이런 경우를 대비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후대에 전하지 않았거나 혹은 전했지만 실전된 모양인데 아스트로퍼는 그 지식을 저장하고 있었다.

이런 기술을 만들어낸 배경을 들어보니 그럴 만도 했다.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는 9 서클을 넘어선 초월자였다. 비록 마법사가 기사보다 반동이 적다고 해도 스승님이 7성에 오를 때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8 서클이나 9 서클으로 승급할 때 도시 한가운데라도 있으면 도시가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기술이었다. 마법사는 이 기술을 쓴다치고 다른 용사들은 모두 기사였는지라 승급을 할때 어떻게 대처했을지 잠시 생각해보다가 한 가지를 떠올렸다.

광검제도 나처럼 통로를 열 수 있었다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을 것이다. 과거의 지구에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 이제와서는 검색할 방법도 없으니 확인도 되지 않는다.

자리를 잡은 뒤 작은 마나만 통과되도록 막아뒀던 마나의 통로를 열자 물밀듯이 마나가 쏟아지며 승급으로 길을 열었다.

반쯤 무아의 상태에 있다가 눈을 떴을 때는 심장에 또 하나의 고리가 생겨있었다.

“아스트로퍼, 내가 승급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지?”

-연공을 시작하고 4시간 32분 17초 지났어.

역시 근본은 스마트워치라서 시간을 재는 것은 아주 정확했다. 역시 보통 사람보다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아무것도 없는 공터에 자리를 잡았지만 그럼에도 주변에 마나의 폭풍이 지나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오랜만에 들어온 지구라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4시간이 넘게 나를 기다리고 계신 스승님을 생각하면 빨리 돌아가야만 했다.

통로를 열고 서둘러 돌아가자 스승님이 기뻐하며 나를 반기셨다.

“장하다 또 성장했구나. 축하한다.”

“모두 스승님 덕분입니다.”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말하기 미안하다만 밑에 사람이 와있단다.”

“어느 쪽입니까?”

“제멜아크다.”

나 때문에 손님이 왔는데도 내려가보지 못하고 여기 계셨던 모양이다. 오히려 제멜아크의 사람이 와있기에 기막을 해제하지 못하셨을 수도 있다.

“우놀드 백작인가요?”

말하고 나서 초감각을 돌려보니 손님방의 안이 감지되지 않는다. 기막을 쳐서 내부를 느끼지 못하게 막고 있다는 것이다. 최소한 7성 이상의 기사다.

“아니군요.”

“쿼런틴 피어스 공작이다. 알고 있겠지?”

“거물이 왔군요.”

검제라 불리는 제멜아크 왕국의 유일한 8성 기사가 직접 찾아왔을 줄은 몰랐다.

“괜찮겠습니까?”

나 때문에 거물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네가 그러지 않았더냐? 급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고. 어차피 이 왕자님을 뵙고 오느라 그리 오래기다리진 않았다.”

“다행이군요.”

스승님과 함께 내려가 쿼런틴 피어스 공작이 기다리고 있는 방 앞에 다가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막이 사라졌다.

노크를 하자. 노인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맑은 미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시오.”

문을 열었는데도 방 안에는 아무도 없는 느낌이었다. 느낌이 아니라 정확히는 초감각에 사람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눈앞에 제멜아크 왕국의 최고수인 쿼런틴 피어스 공작이 있었다.

스승님도 상당히 긴장한 모습이었지만 이미 상당한 무례를 범했으므로 우리는 빠르게 공작의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올리며 사과했다.

딱히 상대가 공작이라서나 강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연장자에 대한 예의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예의였다.

“안녕하십니까. 노엘 브라스 백작입니다. 작은 일이 생겨 본의 아니게 실례를 범했습니다.”

“제자인 빅터 하네스입니다. 저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죄송합니다.”

“허허, 괜찮소이다. 사정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구려.”

공작이 양해를 얻고 난 후 고개를 들어 제멜아크 최강자 검제 쿼런티 피어스 공작을 마주했다. 몇 발자국만 걸으면 닿는 곳에 있었지만, 여전히 공작이 그곳에 있는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법이나 아티팩트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높은 경지에 있는 것이다. 에인프라흐 공작을 마주했을 때도 이렇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쿼런틴 피어스 공작이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그런데 저 밖에 있는 아이는 왜 들어오지 않고 있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