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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27화 (127/206)

127. 목격자

갑자기 검제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슬라이트나 다른 아이들 전부 근처에 이 근처에 있지도 않았다.

그때 창문 밖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거참 귀도 밝으시군.”

“허허!”

쿼런틴 피어스 공작은 그저 웃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밖에 있던 사람은 바로 에인프라흐 공작이었다. 그런데 말을 하기 전에는 전혀 그곳에 사람이 있는지 초감각으로도 느끼지 못했다.

아티팩트로 기세를 숨겨도 기척을 숨길 수는 없다. 그런데 당장 눈앞에 그것이 가능한 인간이 둘이나 나타난 것이다.

처음 보는 피어스 공작이야 그렇다고 해도 에인프라흐 공작도 저것이 가능한 줄은 몰랐다.

밖에서 말을 한 순간부터 존재가 느껴지기 시작한 에인프라흐 공작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스승님과 나는 자리에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흰머리에 흰색 수염을 깔끔하게 길렀고 고급 재질의 옷을 입고 있었으나 쿼런틴 피어스 공작은 보기엔 그냥 평범한 동네 노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에인프라흐 공작처럼 장대한 체구에 근육질이라거나 그런 외부로 보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세를 완전히 숨긴다고 해도 고수들이 풍기는 일종의 느낌 같은 것이 있다. 그런데 쿼런틴 피어스 공작에게서는 그런 느낌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주위를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오랜만이오. 검제님”

문을 열고 들어온 에인프라흐 공작이 특유의 호탕한 목소리로 검제에게 인사를 했다.

“그래 오랜만이군. 못 보던 사이에 많이 성장했구먼?”

“그래도 검제님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라니요. 내 나이가 몇살인데 아이라고 합니까?”

“내가 볼 때는 아직 아이 같으이”

“그래봐야 열 살 밖에 차이 안 나지 않습니까.”

이 두 사람이 현재 인간 중에서는 대륙에서 가장 강한 자들이다. 다만 국가도 다르고 서로 위치도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닐 것이다.

“허허허! 10년이면 강줄기가 바뀌는 법이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너무 그러지 맙시다.”

두 사람은 마치 오랜 친구처럼 대화를 나눴다. 나와 스승님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냥 조용히 있었다. 나와 스승님도 어디 가서 꿇릴 일이 없는 사람들인데 앞에 있는 두 사람이 너무 급이 높다.

“그래 검성께서는 여긴 어떻게 오셨소?”

“검제께서 온 이유와 같지 않겠습니까?”

둘이 본격적으로 이곳에 온 목적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이 두 괴물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였다.

“우리가 좀 빨리 들어갔으면 하는 것이지요?”

“그래 주면 고맙겠네.”

“그냥 검제께서 들어가는 게 빠르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지 않는가? 검성 자네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눈앞에 있는데 어찌 내가 혼자 그곳에 들어가겠는가.”

“늦으면 늦을수록 그쪽 왕세자 전하가 위험하실지도 모르는데도요?”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네.”

만약 검제가 왕세자를 구하러 들어가 왕세자처럼 나오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재앙일 것이다. 양 국가의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져버린다.

“그럼 저와 같이 들어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흘흘, 쓸데없는 소리나 하자고 모인 것은 아니지 않는가?”

쿼런틴 피어스 공작은 에인프라흐 공작의 말을 일축했다.

“그럼 무엇을 들고 오셨습니까? 저는 상관없는데 우리 국왕 폐하께서는 손이 무거운 손님을 좋아하십니다.”

“무엇을 원하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실 수 있습니까?”

“내가 내줄 수 있는 선에선 그렇다네.”

얘기가 겉도는 느낌이다. 물론 국가 간의 협상테이블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는 것은 이해한다. 그런데 굳이 나와 스승님이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쪽에서 먼저 제시를 해주셔야지요. 그래야 흥정이라는 것을 시작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원하는 것을 먼저 말을 해야 절충을 해볼 것이 아닌가?”

둘 다 무인이지만 닳고 닳은 늙은 너구리 같은 영감들이다 보니 먼저 패를 까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승자는 에인프라흐 공작일 것이다. 급한 것은 우리가 아니다. 시간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원군이 우리 편이다.

“허허!”

쿼런틴 피어스 공작도 그것을 모르지 않는지 답답하다는 느낌의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과한 요구는 하지 않을 겁니다. 라이브러쉬는 대륙의 평화를 원하니까요.”

에인프라흐 공작이 위로하듯이 희망을 주는 말을 했다.

“영토는 아니 되네”

“영토는 받을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럼 재물은 어떠한가?”

“돈은 라이브러쉬도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영토는 아니고 돈도 아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많지 않다.

“어디까지 원하나?”

“1급으로 스무개 어떠십니까?”

조금 어이가 없었다. 우리는 이곳에 오는 조건으로 1급 보고의 보물 한 개를 큰 인심 쓰듯이 줘놓고 여기에서 스무배로 벌어가려고 하고 있다. 칼만 안 들었지 도둑놈이 따로 없다.

“너무한 것 아닌가? 다섯개로 하세.”

“제가 스무개를 제시했으면 최소한 열 개부터 시작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검제님이야 말로 너무하시는군요.”

“그럼 중간인 열개로 합의를 보세.”

“열다섯개까지는 제가 깎아드리지요.”

세계 최강자들이 하는 흥정치고는 시장판의 상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열 개 그 이상은 안 되네.”

“이거 왜 이러십니까? 협상 결렬입니까? 저야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만”

“차라리 내가 직접 들어가겠네.”

“그래 주시면 저희야 더 좋습니다.”

동네 할아버지 같던 쿼런틴 피어스 공작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잘하면 오늘 여기서 대륙 최강자들의 결투를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제멜아크에서는 그거 아십니까?”

“뭐를 말인가?”

“지금 들어간 공략대에 마신교가 섞여 있습니다.”

내가 왕실에 전해준 정보다. 쿼런틴 피어스 공작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조금 전과는 느낌이 다르다.

“확실한 정보인가?”

“이런 상황에서 제가 허튼소리를 하겠습니까?”

“그래, 자네가 그런 사람은 아니지.”

쿼런틴 피어스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멜아크쪽에서는 정말 윌리암 와일러스의 존재를 몰랐던 모양이다.

“더 놀라운 사실을 알려드릴까요?”

“또 뭔가?”

“안에 들어간 마신교의 인물이 사제입니다.”

푸학!

순간 쿼런틴 피어스 공작에게서 엄청난 살기와 기세가 터져나왔다. 에인프라흐 공작과 스승님이 반사적으로 그것을 막아줬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잠깐 노출된 것만으로 온몸에 얼얼함이 느껴졌다.

나 정도 수준으로는 몇 초만 노출되어도 죽을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살기만으로도 6성 기사를 죽일 수 있는 경지 그것이 바로 8성의 끝에 도달한 무인의 힘이었다.

“아, 실례했네.”

아주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것으로 뿜어지는 살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쿼런틴 공작이 바로 사과했다.

“이해합니다.”

에인프라흐 공작이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쿼런틴 피어스 공작과 사제 사이에 뭔가 일이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것은 정말 확실한 이야기인가?”

“물론입니다. 여기 이 친구가 확인한 것이니까요.”

에인프라흐 공작이 나를 지목하자 쿼런틴 피어스 공작의 우묵한 눈이 나를 향했다.

“자네는 마신교 사제의 얼굴을 보았는가?”

“예, 운이 좋게 젊었을 때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만났고요. 제법 외모가 많이 바뀌어서 처음에는 몰랐으나 보다 보니 동일인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름이 뭐라던가?”

“윌리암 와일러스라고 했습니다. 물론 본명은 아니겠지요. 어떤 경로로 공략대에 참여한 것인지 개인적으로 알아봤지만, 아는 사람이 없더군요.”

“사제라면 그럴 수 있네.”

마신교의 세력이 그 정도였나? 아니면 사제의 능력이 그렇다는 것일까? 의문이 생겼지만 물어보기가 어려워서 망설이고 있을 때 쿼런틴 피어스 공작이 답을 알려주었다.

“녀석은 사람을 매혹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네. 그것으로 처음보는 사람도 조종할 수가 있지.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끼어드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네.”

“아!”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탄성이 내 입에서 나왔다. 그 외모로 누군가를 매혹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딱히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본 적도 없으니 달변으로 설득하는 것도 것이다.

그리고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변이체 중에 그런 능력을 가진 놈이 있었다. 아주 희귀한 종으로 딱 한 번 멀리서 본 적이 있었다. 나는 근처에도 가지 않고 보자마자 멀리 도망쳤지만, 일부 겁 없는 생존자들이 사람과 비슷한 체구를 가진 그 변이체를 우습게 보고 덤벼들었다.

그렇게 용감하게 달려든 사람들은 놈과 눈이 마주친 순간 최면에 걸리듯이 스스로 변이체에게 걸어가 먹이가 되었다. 그리고 뜯어먹히는 와중에도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놈의 영역 안에 자리를 잡고 살던 사람들은 놈을 푸른눈이라고 불렀었다.

쿼런틴 피어스 공작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 기억이 떠올랐다.

그 푸른눈의 능력이라면 국왕이나 왕세자를 조종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직접 만나본 왕세자는 그런 최면에 걸린 사람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사제의 능력은 아마도 그놈이 만들어내느 반마들처럼 반품이 능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놈은 그 능력으로 내 손녀 중 하나를 데려갔네 손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 일종의 경고였네”

쿼런틴 피어스 공작의 이어지는 이야기로 왜 그토록 공작이 분노했는지 알 수 있었다.

“골치 아프군.”

갑자기 10년은 더 늙어 보이는 공작이 머리를 짚었다.

나도 당장 사제 놈의 목을 치고 싶지만 만약 사제를 죽였을 때 부교주 놈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 모른다. 한번 봐주겠다고 했으니 다음엔 무조건 내 목숨을 노릴 것이다.

“자네들이 좋은 정보를 주었으니 나도 꼭꼭 숨겨놨던 정보를 하나 주도록 하지”

머리를 짚고 있던 공작이 다시 자세를 바로 하며 입을 열었다. 잠시 뜸을 들이는 동안 모두가 쿼런틴 피어스 공작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나는 마신교의 교주를 만난 적이 있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것은 엄청난 내용이었다.

“동쪽 사막에 들어가셨던 겁니까?”

“그렇다네, 8성의 끝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었을 때쯤에 내 실력에 자신이 좀 생겼었지. 그래서 홀로 사막에 들어갔던 적이 있네.”

“교주를 노리신 겁니까?”

“아니, 딱히 그랬던 것은 아닐세, 크락슈의 왕이든 교주든 아무나 하나 걸리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갔던 것이지.”

“어땠습니까?”

가장 집중하고 있는 것은 에인프라흐 공작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경지의 쿼런틴 공작의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크락슈의 왕을 만났지 내 평생을 통틀어 가장 힘든 싸움이었네. 그래도 내가 이겼지 목을 베기 직전까지 갔으니까.”

상급 마수의 왕을 단신으로 처리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교주가 나타났지. 자기 애완동물을 해치지 말라나?”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중간에 조금씩 쉬면서 말하는 쿼런틴 피어스 공작의 화법에 에인프라흐 공작의 몸이 달았다.

“처음에는 교주인 줄도 몰랐네. 그냥 미친 사람인 줄 알았지. 그런데 나도 그땐 워낙 격렬한 전투를 하던 중이라 정신이 좀 없었던 거야. 그곳에 나 외에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없는데 말이야. 그래서 꺼지라고 했지.”

그렇다는 것은 일단 외모는 평범한 사람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그랬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더군. 그리고 나와 싸웠지. 아니 싸웠다는 말은 좀 이상하군. 부끄럽지만 내가 일방적으로 당했네.”

“그렇게 강합니까?”

“문제는 나를 때릴 때는 진짜 힘을 보인 것이 아니었다는 거야.”

“그럼 아마도 초월급이로군요.”

에인프라흐 공작의 추측에 쿼런틴 공작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가지고 있는 힘으로 계산한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단순히 경지의 문제가 아닐세.”

“그럼 뭡니까?”

에인프라흐 공작의 물음에 쿼런틴 공작은 한참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그건 그냥 말 그대로 괴물이었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교주는 나에게 진짜 자기 모습을 보여주었네. 사람이 아닐세 그것은 그냥 괴물이었어. 인간으로서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그런 괴물일세”

당시의 일을 회상하며 8성의 끝에 도달한 무인이 잘게 몸을 떨었다. 세상의 누가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을까?

“그렇다면 동부 사막이 사라진 그 사건에서도 교주는···.”

에인프라흐 공작이 말끝을 흐렸다.

“살아있을 것이네. 그것은 내가 확신하네 그 괴물이 그 정도로 죽을 리가 없네.”

쿼런틴 피어스 공작은 확언했다. 나도 그렇게 예상했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교주는 내 예상대로 초월급의 강자였다. 그런데 교주가 이미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왜 세계정복에 나서지 않았던 것일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놈도 멀쩡하지는 못할걸세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동부 사막이 있던 곳에 직접 가보기도 했지.”

쿼런틴 공작이 사족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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