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28화 (128/206)

128. 던전 안의 도시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에인프라흐 공작이 의문을 나타냈다.

“내가 그곳에 가서 확인한 것은 분명히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네 그리고 교주가 스스로 일으킨 것도 아니겠지. 내가 본 교주는 분명 인간을 벗어난 괴물이었지만 그 정도 힘을 가졌다곤 생각하지 않네.”

“제삼자의 개입을 확신하시는 겁니까?”

“확신하네. 다만 그것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 세상은 넓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숨은 은거기인들이 존재할 수도 있으니까.”

이미 우리도 이야기를 했던 부분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범위라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오히려 교주는 죽었다고 봐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내 물음에 쿼런틴 피어스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그 괴물이 죽었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네.”

이것은 단순히 쿼런틴 피어스 공작의 느낌일 뿐이다. 하지만 저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그 느낌을 무시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다. 변이체를 지구로 몰고 온 것이 교주라면 혹은 그 일부라도 물려받았다면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죽었을 겁니다. 라이브러쉬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에인프라흐 공작이 끼어들었다. 그런데 단순히 그냥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가 있는 느낌이었다.

“우리가 마신교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지요. 교주와 부교주의 무력, 이해할 수 없는 기동력과 은밀성, 그리고 반마를 만들어내는 사제의 능력과 기묘한 능력들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에인프라흐 공작의 말에 쿼런틴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하나를 해결했습니다.”

“무엇을 해결했다는 말인가?”

쿼런틴 공작의 물음에 이번에는 에인프라흐 공작이 뜸을 들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검제께서 큰 비밀을 풀어놓으셨으니 저도 중요한 정보를 공개하도록 하지요. 부교주를 처치했습니다.”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부교주를 죽였다고?

“그게 정말인가?”

“예, 제가 이 나이 먹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며칠 전 부교주가 국왕을 찾아왔었지요. 늘 그렇듯이 어디서 무슨 방법을 쓴 것인지 국왕의 침실에 바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교주는 건재하다고 하면서 상호불가침 조약 같은 것을 원하더군요.”

입장이 바뀌어 이번엔 쿼런틴 공작이 몸이 달았다.

부교주가 일부러 나타나 교주가 건재하다는 것을 알렸다? 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정말로 건재하다면 직접 모습을 드러내거나 힘을 보여줬으면 되는 일이다.

교주는 죽지 않았어도 최소한 큰 부상을 입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그것은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예, 그렇지요. 그런데 이번엔 신기하게도 기간을 제시하더군요. 20년입니다. 그것을 듣는 순간 감이 왔습니다. 이놈들이 최소한 20년 동안은 힘을 모으려고 한다는 것을요.”

“그런데 자네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마치 직접 들은 사람 같군.”

“직접 들은 것이 맞습니다. 다른 일이 조금 있어서 왕궁에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국왕의 바로 옆방에서요. 운이 좋았지요.”

갑자기 의문이 생긴다. 과연 운이 좋았던 것일까? 교주는 그곳에 국왕과 에인프라흐 공작 둘이 함께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

“사실 부교주와 싸울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국왕이 먼저 손을 쓰는 바람에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가 기회다 싶기도 했고요.”

“부교주는 내가 직접 본 적이 없네. 하지만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지. 어떻던가?”

“강하더군요. 생각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국왕과 제가 동시에 나섰는데도 쉽게 쓰러뜨리지 못했습니다. 반마처럼 여러 가지 기묘한 기술을 쓰더군요. 덕분에 왕궁의 4분의 1 정도가 사라졌지요.”

에인프라흐 공작은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고 있었지만, 그거 완전 나라가 발칵 뒤집힐 일 아닌가?

“그래도 결국 목을 날렸습니다.”

“허어!”

에인프라흐 공작이 의기양양하게 말했고 쿼런틴 공작은 탄성을 터트렸다. 그러나 난 그것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부교주가 통로를 쓰지 않고 그냥 죽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8성 기사 둘이 달라붙어서 공격한다고 생각하면 통로를 사용할 틈이 없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눈먼 검기에 통로가 맞아서 부서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완전히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셨습니까?”

“목이 잘리고도 살아남는 생물이 있던가?”

있지요. 변이체, 당신들이 악마라고 부르는 놈들은 목이 잘리고도 살아남습니다.

“시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잘린 목과 팔 한 짝은 찾았는데 나머지 부위를 찾을 수가 없더군. 아무래도 무너진 잔해 어딘가에 깔린 것 같은데 곧 찾을 수 있을 테니.”

공작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확신했다. 부교주는 죽지 않았다. 목과 팔을 잃었으니 재생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변이체라는 놈들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

결국 교주도 부교주도 큰 부상은 입었지만 살아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굳이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설득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 안에 있는 사제라는 놈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군”

쿼런틴 공작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이번 기회에 소탕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에인프라흐 공작이 대답하고 동시에 두 사람의 시선이 우리 사제를 향했다. 던전에 들어가 사제를 죽이라는 얘기다. 이렇게 됐어도 둘은 던전에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다.

교주와 부교주가 큰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죽지 않은 상황에서 사제를 죽이는 것이 좋은 선택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기회도 자주 오는 것은 아니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기회가 온다면 반드시 처리하도록 하지요. 안된다면 그대로 밖으로 데리고 나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두 분이 알아서 처리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후자가 좋겠군.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주게.”

사제에게 손녀를 잃은 적이 있는 쿼런틴 공작이 자기 손으로 처리할 기회가 올 수 있다는 것을 기대했다.

“그럼 저희는 언제 들어가면 좋겠습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네.”

보물이야 남은 사람들이 계속 협상하면 될 것이고 우리는 우리 일을 하면 된다.

제멜아크의 왕세자와 흑기사를 비롯한 그 많은 병력이 던전을 공략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비도 해두었다.

“왕자님의 의중이 중요하겠군요.”

반역을 꿈꾼 왕자라곤 하나 정식으로 발표된 것이 아니고 아직은 이곳의 총책임자다.

“그것은 내가 처리하도록 하겠네. 그래 준비한다면 얼마나 빨리 들어갈 수 있겠나?”

에인프라흐 공작이 망나니를 맡아준다면 일은 쉽게 풀릴 것이다.

“저희야 내일이라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만 안의 인원들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니 식량과 식수 그리고 의약품 같은 것을 조금 대량으로 가지고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그것은 제멜아크 왕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5천명의 사람이 아직 얼마나 살아남았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인원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먹고 마실 것을 준비해야 한다. 나는 사람을 제물로 쓸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것은 내가 당장 해결해주겠네.”

양쪽 나라의 최고 권력자 둘이 문제를 알아서 해결해주니 이렇게 일이 편하다.

두 공작이 일하기 위해 숙소에서 빠져나간 후 대륙 최강의 무인을 만난 경험담을 원하는 아이들을 스승님에게 맡겨두고 나는 아스트로퍼와 마지막 점검을 했다.

“내가 이 던전을 공략할 수 있을 확률은?”

-외부 변수가 많긴 하지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종합하면 빅터 하네스가 던전 공략에 성공할 확률은 87.4%야.

대격변이 일어나기 전에 잠깐 사용했었던 Ai chat처럼 아스트로퍼를 사용해봤다. 어쩌면 지구의 그 프로그램을 발전시킨 형태가 아스트로퍼가 아닐까?

87.4% 애매한 숫자다. 실패할 확률이 12.6%나 된다는 것이 아닌가?

“그럼 내가 던전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빅터 하네스가 이번 던전 공략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99.8%야. 그런데 자꾸 이딴 계산 시킬 거야?

일단 죽지 않을 확률은 무척이나 높아서 좋았다. 재미가 들려 몇번 더 그런 질문을 하자. 아스트로퍼가 화를 내며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반쯤은 재미로 물어보던 것이었으니 큰 의미는 없었다.

“네가 이공간의 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확실하지?”

-확실해. 예전의 나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완성형 마법 생명체니까.

백룡이와 합체해서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비슷한 보물 몇 개를 더 합체시키면 나중에 정말 말도 안 되는 성능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금이 보통 데스크탑이라면 그때는 슈퍼컴퓨터급이 되지 않을까?

다음 날 정말로 쿼런틴 피어스 공작은 무지막지한 양의 보급이 담긴 아공간 가방을 가져왔다. 그리고 에인프라흐 공작도 둘째 왕자를 간단히 제압하고 정말로 하기 싫어하는 얼굴의 망나니 놈을 끌고 나왔다.

“일이 갑자기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는 바이네.”

쿼런틴 피어스 공작이 100명을 조금 넘는 우리 공략대의 앞에 나와 허리를 깊게 숙였다.

기사들에겐 엄청난 충격인 모양이었다. 자그마치 대륙 최고의 기사에게 인사를 받았으니까. 옆에 있는 슬라이트나 자칼도 감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치면 에인프라흐 공작이 대륙에서 두 번째로 강한 기사 아닌가? 뭘 그렇게 새삼스레 감격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 제멜아크의 공략대를 도와 함께 던전을 공략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

정확히는 우리가 그 사람들 살리러 들어가는 것이지만 입장의 차이 때문인지 공작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왕세자가 던전에 들어갈 때처럼 엄청난 환영인파나 행사는 없었다. 오히려 근처에 제멜아크의 병사들까지 모두 물러서 우리 공략대를 제외하곤 열 명도 되지 않는 사람만이 우리를 배웅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좀 억울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될 줄 알고 받아들인 일이었고 이곳에 있는 제국의 유산도 모두 내 것이 될 테니까.

먹을 수도 없는 명예는 저쪽이 가지라고 주고 나는 실리만 챙기면 된다. 그리고 잘하면 명예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들어갈 때는 이렇지만 나올 때는 지금과 다를 테니까.

배웅을 나온 쿼런틴 피어스 공작과, 에인프라흐 공작을 비롯해 우놀드 페르소 백작과 잠시 환담을 나눈 뒤 라이브러쉬 왕국의 던전공략대가 출발했다.

“전원 입장!”

선두에 선 스승님의 큰 소리로 외치고 우리는 천천히 한껏 입을 벌린 괴물의 아가리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향해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명색이 총대장이지만 완전히 발언권을 빼앗긴 망나니 놈이 중간에서 발광하고 있었지만, 여태까지 망나니의 수발을 들던 수행원들이 지금은 오히려 망나니를 구속에 가깝게 붙잡아 놓고 있었다.

에인프라흐 공작이 손을 쓴다고 하더니 망나니가 아닌 수행원들에게 손을 쓴 모양이었다. 저렇게 아무것도 못 하게 붙잡아 놓는 것이 내 입장에선 훨씬 편하다. 다만 저렇게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어 놓으면 사고를 치지 못할 것이고 사고를 치면 던전 안에서 죽여버리려고 했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잠시 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걸었다. 망나니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숙련된 기사와 마법사들이었기에 당황한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마법사들은 이 상황을 신기해하며 조명 마법을 만들어본다던가 하고 있었는데 누구도 마법에 성공하지 못했다.

“신기하네요. 마법이 구동은 되는데 현상이 일어나지 않아요.”

마법 문자를 쓸 수 없는 스테이시가 옆에서 말을 했다. 보통 이럴 때 아스트로퍼가 튀어나와 무언가를 말해야 하는데 조용했다. 마법 생명체라더니 이곳에는 아스트로퍼도 움직일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걸었고 마침내 어둠이 끝나는 순간 눈을 찌르는 빛에 눈을 찡그려야만 했다.

“우와!”

누군가 가장 먼저 시력을 회복한 사람이 크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리고 뒤이어 모두가 소리를 지른 것까진 아니어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암흑의 통로를 지나 눈앞에 드러난 풍경은 나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지구잖아?’

그랬다.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만들어낸 이공간이라는 것은 바로 지구의 문명을 그대로 구현한 도시, 그것도 서울로 추정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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