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29화 (129/206)

129. 중요한 것

비록 폐허에 불과했지만, 지구의 흔적을 본 적이 있는 스승님이 시선을 나에게 돌렸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눈에 보이는 풍경은 분명 서울이다. 도시라는 게 어딜가나 다 비슷하게 보일 수 있고 나도 서울에서 살았던 사람이 아니지만, 그것은 알 수 있었다.

저 멀리 남산타워가 보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한글이 써진 간판이 보였다. 아스트로퍼가 완전하지 못한 이공간이라고 해서 그렇게 넓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만약 지금 들어온 이곳이 서울을 완전히 구현한 것이라면 엄청나게 크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5천명 정도 들어가서는 이공간의 한계를 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진짜 서울의 전성시대처럼 3천만명 정도 들어왔으면 이공간의 한계가 나타났을까?

“대체 이게 뭐야?”

“여긴 신의 세계인가?”

던전 안으로 들어와 지구의 문명을 본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소감을 말했다.

왕도에서도 몇 개 없는 하늘을 찌를듯한 고층 빌딩이 가득한 도시를 보면 신의 세계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새롭고 압도적인 풍경에 일행들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냉정하고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완전히 서울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보이던 모습이 시간이 지나자 단지 흉내를 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어떻게 이런 풍경을 만들어냈는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아마도 지구에서 넘어왔을 확률이 높은 광검제가 항상 붙어있었으니까. 어쩌면 광검제의 고향을 만들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활동했던 시기라면 몇백년 전인데 그 시기에 서울이 이런 모습일 리는 없었으니 시간의 괴리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생각했던 문제이고 나 홀로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였다.

내가 그쪽 방면에서 교수급으로 지식을 쌓았던 사람이라면 최소한 추정이라도 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전생의 학창 시절에 공부를 잘했던 사람은 아니었고 대학에서 그런 것을 전공했던 사람도 아니다.

일단 완벽히 서울을 구현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남산타워를 보고 그런 줄 알았지만, 정확히는 흉내를 냈다고 봐야 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는 지구인이 아니니까. 아무리 옆에서 광검제가 조언을 해줬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이곳은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지구와 미묘하게 다른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표지판의 그림이라든지 빌딩들의 건축구조가 내가 기억하는 지구와 다르다.

지구 출신이 아닌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구현을 못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것을 다 넘어가더라도 자동차 한 대 없이 뻥 뚫려있는 길옆에 세워져 있는 우체통이 파란색이다.

대격변 직전에 우체통은 구경하기가 매우 힘든 물건이었다. 그리고 만약 광검제가 이곳을 봤다면 파란색 우체통을 지적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상점들의 간판들도 뭔가 이상하다. 프렌차이즈나 편의점의 상호도 조금씩 다르다. 광검제나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저작권 때문에 일부러 상호를 틀리게 적었을 리는 없다.

어쩌면 광검제는 지구 출신이 아닌 것이 아닐까? 아니 지구인건 맞지만 내가 살았던 그 지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한 사람은 아니어도 대격변 이전과 이후에도 판타지 소설 같은 것은 꽤 많이 읽었다.

거기서 보았던 평행우주 이론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이 모습도 그리고 시간의 괴리도 설명이 된다. 다만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광검제가 내가 통로를 통해 갈 수 있는 지구에 있는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하나를 풀었다고 생각하면 다른 문제가 생기는 상황이다.

“야,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아, 미안 생각 좀 하느라”

옆에 있던 슬라이트가 한참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나를 깨웠다.

“제멜아크 왕국 공략대의 흔적을 찾는 것이 우선이겠소.”

스승님의 말씀에 공략대의 수뇌부가 모두 동의했다. 여기서 수뇌부란 나를 비롯해 슬라이트와 자칼, 스테이시 그리고 파견된 각 기사단과 마법사들의 대표들이었다.

자그마치 5천명이다. 그런 대인원이 들어와서 움직이고 있으니 흔적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다만 이 가짜 서울의 크기가 진짜 서울과 같다면 찾기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닐 것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없지만 던전 안이니 위험한 것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정찰대를 보내볼까요?”

보이는 것은 그저 건물들과 넓은 도로뿐이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제국이 만들어낸 던전이다. 외부인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니 뭔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동의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일에 익숙한 기사들이 먼저 동의하자 스승님이 각 기사단에서 3명씩을 뽑아 정찰대를 운영하는 것을 지시하셨다. 각 방향으로 정찰대가 출발하고 우리도 천천히 이동을 시작했다.

지금 가장 신난 것은 마법사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탐구심이 강한 마법사들인데 그중에서 던전에 가장 관심이 많은 자원자가 온 것이다. 그런 마법사들이 처음 보는 문명의 가운데 떨어졌으니 오죽하겠는가.

[저 녹색 바탕에 문자는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유리가 너무 투명해요. 저런 것은 어떻게 만드는 걸까요?]

응, 편의점이야. 그리고 유리는 아노더스에도 맑은 것이 있다. 다만 말도 못 하게 비쌀 뿐이다.

흥분한 스테이시가 쉴 새 없이 마법 문자를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알고 있어도 답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니 주변 탐색을 적당히 하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마법사들은 광분해서 날뛰고 있었다. 보도블록을 뒤집어보고 근처의 빈 상가 안에 들어가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을 쓸어 담기도 했다.

“괜찮겠느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승님이 내게 물어봤지만 나라고 답이 있을 리는 없었다.

“글쎄요. 어디에 무슨 함정이 있을지는 저도 모르지요.”

하지만 어쩌면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존재가 내 팔목에 살고 있다.

“아스트로퍼, 혹시 느껴져?”

던전의 핵을 말하는 것이다. 아스트로퍼는 분명 근처에 가면 그것을 느낄 수 있다고 했었다.

-이 근처에는 없는 것 같아.

“혹시 함정 같은 것이 있으면 미리 탐지할 수 있어?”

-잘 모르겠는데 함정의 종류에 따라 달라.

“그럼 혹시라도 감지가 된다면 바로 알려줘.”

-알았어.

일반적인 함정이라면 내가 선두에서 찾아내면 그만이겠지만 그런 동물덫 같은 함정이 이곳에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이곳에서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침입자를 제거하는 방법을 만들었을까.

꽤 멀리 나갔었는지 세방향으로 나눠서 출발했던 정찰대가 돌아온 것은 3시간 정도가 지나서였다. 정찰대가 얻어낸 정보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국어나 영어를 모르는 정찰대가 무언가를 보고 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들이 알아온 정보라고는 자신들이 이동했던 길의 동선과 그 주변에 있던 큰 건물들의 외형이었다.

그리고 본대도 그 시간 동안 꽤 긴 거리를 이동했는데 특별히 찾아낸 것은 없었다. 나도 잠시 혼자 떨어져 나와 도로 옆의 가로수에 사이코메트리를 사용했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나는 최소한 이곳을 만들어낸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나 광검제의 기억 정도는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읽히지 않았다. 나무에 저장된 기억이 아예 백지였던 것이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나도 당황스러웠다.

“일단 시간이 되었으니 식사를 하지요.”

“그렇게 하자꾸나.”

던전 안에서 식사와 수면시간을 챙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보통 던전에서도 그렇지만 제멜아크의 공략대가 이곳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넘었으니 장기전으로 갈 생각을 해야 했다.

말 그대로 빌딩의 숲 중간에 있는 도로 한가운데서 우리는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불을 피우거나 하진 않았다. 대부분 가져온 식량들이 보존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식량과 식수가 문제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더구나.”

도시의 한복판이다. 가로수 같은 것이 있긴 하지만 그것을 뜯어먹을 수는 없으니 식량을 조달할 방법이 없었다.

상점 안에는 빈 진열장뿐이었고 직접 확인해봤지만, 수도에서는 물이 나오지 않았다. 느낌상이지만 남산으로 추정되는 산에 도착하더라도 딱히 생명체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제멜아크의 공략대가 어느 쪽을 향했을지가 문제로군요.”

절대 좁지 않은 공간이다. 나처럼 표지판을 읽을 능력이 없는 제멜아크의 공략대가 어느 방향으로 이동했을지 예측할 수가 없다.

일단 우리는 서울 시청과 청와대를 목표로 이동하고 있었다. 던전의 핵을 배치했다면 아마도 그런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너희들 같으면 어디로 먼저 이동했을 것 같아?”

여기서는 왕세자와 비슷한 생각을 할 만한 사람들의 의견이 중요했다.

“나라면 저기에 가보겠어.”

슬라이트가 가리킨 곳은 역시 남산타워였다. 여기선 가장 눈에 띄는 곳이니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나, 나는 정찰대의 보고를 듣고 생각하겠어.”

자칼의 의견은 타당했다. 5천명이나 들어갔고 여차하면 제물로 바칠 인원도 많았으니 제멜아크 공략대는 많은 인원을 정찰대로 보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찰대를 통해서 얻는 정보로 제멜아크의 왕세자가 관심을 보일만한 곳이 어떤 것이 있을까?

그러나 그 생각은 조금 뒷순위로 보내기로 했다. 비슷한 장소에서 던전 공략을 한 것 같지 않다. 5천명에 이르는 대인원이 이동했다면 분명 흔적이 남는다. 우린 아직 그 흔적을 찾지 못했다.

어쩌면 암테일 영지의 던전처럼 일정 시간이 지나면 흔적을 지워버리는지도 모른다.

[저라면 마나가 강하게 느껴지는 곳을 따라가겠어요.]

“그런 곳이 느껴져?”

마법사다운 발상이었다. 그로나 이제 나도 4 서클 마법사인데 이곳에 들어온 이후 특별하게 느낀 것은 없었다. 스테이시는 뭔가를 느낀 것일까?

[아니요. 하지만 자연 상태라도 분명히 마나의 농도가 모두 같진 않거든요.]

“그런데 여긴 자연이 아니지.”

확실하게 이곳은 인공적인 장소다.

“그래도 뭔가 느껴진다면 바로 얘기해줘. 다른 마법사들에게도 알려주고”

[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수행 인원들의 감시를 받으며 다른 사람과 다르게 나름대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있던 망나니 녀석이 툭 내뱉었다.

“나라면 가장 높은 곳을 가겠다.”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미 수행 인원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 인식을 했을 것이다. 바보가 아니라면 분명히 그럴 것이다. 망나니 왕자는 결코 바보는 아니다. 그런데도 아직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높은 곳이라 하면 슬라이트와 같이 남산타워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서울에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울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라면 떠오르는 건물이 몇 가지가 있으나 가장 높은 곳이라면 떠오르는 것은 단 하나다.

우스갯소리로는 그 건물이 천안에서도 보인다고 했었던가? 물론 실제로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꽤 먼 곳에서도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만큼 높은 빌딩이니까.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알기로 그곳은 대격변 이후 변이체의 공격으로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주변의 빌딩 중 가장 높은 곳에 들어가 계단을 통해 옥상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보였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그 빌딩이 이곳엔 있었다. 우습게도 나는 그 빌딩을 전생에 실제로 본 적도 없었는데 이렇게 보게 되었다. 이곳에서 저 빌딩이 원래 보이는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망나니 왕자의 의견은 분명 괜찮은 생각이었다. 제멜아크의 왕세자가 만약 저곳 근처에서 던전 공략을 시작했다면 분명히 저곳을 향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원래 가려고 했던 청와대나 서울시청과는 반대 방향이다. 합류가 우선이냐 아니면 공략이 우선이냐의 문제다.

나는 빌딩을 다시 내려가며 아스트로퍼를 다시 불러냈다.

“아스트로퍼 내가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다.”

-뭔데 뭔데?

“여기 유산 그러니까 보물은 어디에 있는 거지?”

아스트로퍼가 침묵했다. 이럴 줄 알고 있었다. 아스트로퍼라도 모르는 것을 알려줄 수는 없는 거니까.

우리가 던전에 들어온 목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바로 제국이 남긴 유산을 차지하는 것이다.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핵을 찾는 것도 좋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제멜아크의 왕세자를 찾는 것도 좋다. 그런데 이 넓은 서울 어디에 보물이 있을까?

그런 나의 의문이 해결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