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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30화 (130/206)

130. 서울의 밤

고심 끝에 내가 선택한 방향은 청와대 쪽이었다. 왕세자가 높은 곳을 향했을 것이라는 것도 어디까지 나 추측과 확률의 영역이고 던전을 빨리 공략하는 편이 오히려 왕세자를 확실하게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공략대는 적당한 속력을 유지하며 이동했다. 비록 아무것도 없지만 이곳이 던전 안이라는 것을 공략대에게 계속 얘기했다.

몇 명을 제외하면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대부분인 공략대지만 가능하면 나는 이 사람들을 모두 살려서 돌아가고 싶었다.

“아스트로퍼”

-왜?

“이공간이라는 것은 실존하는 세계지?”

-그렇지. 완전히 다른 차원이니까.

말하자면 이곳은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777번 아스트라호 안에 창조한 다른 세계다. 그러나 그것은 아스트라호가 순정품이었을 때의 얘기다.

“아스트라호를 핵으로 이용해서 던전을 만든다면 그곳에 뭔가 변형했겠지? 제국의 마법사들이라면 그 정도 실력은 있었겠지?”

-그랬을 가능성이 높아.

내가 경험했던 암테일 영지의 던전 그리고 여태까지 발견되었던 다른 제국의 유산을 생각하면 이곳은 너무 평화로웠다. 아무 힌트도 없이 던져진 곳에서 헤매다가 식량과 식수가 떨어져서 죽는 것을 노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할 것 같지 않았다. 분명 침입자를 제거하기 위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걷다 보니 밤이 찾아왔다. 전기가 없는 도시의 밤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잠자리는 어떻게 할 거냐?”

슬라이트가 물어왔다. 보통이라면 그냥 대로변에 불을 피우고 텐트를 설치하겠으나 이곳은 사방에 빈 건물이 너무 많다.

비록 안에 제대로 된 가구는 없었지만 바람과 이슬을 피하는 것은 텐트나 침낭보다는 훨씬 낫다. 노숙할 때 천장과 벽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적당한 건물을 하나 정하자꾸나.”

스승님이 의견을 내셨고 굳이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고른 건물은 가까이 있던 평범한 상가건물이었다. 그래도 우리 공략대 백여명이 들어가서 자기엔 충분한 크기다.

방마다 적당한 인원을 나눠 배치하고 불침번을 정했다. 나는 마지막 시간이 배정되어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준비해온 침낭 안에 몸을 뉘었다.

“아스트로퍼 이따 시간이 되면 날 깨워줘. 이상 현상이 감지 돼도 깨우고”

아스트로퍼에게는 본연의 임무라고 할 수 있는 알람 시계의 역할을 맡겼다.

-나를 시계로 쓰지 말라고!

아스트로퍼가 가볍게 불평했지만 무시했다. 말은 저렇게 해도 결국 어지간한 명령은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다.

그런데 아스트로퍼야. 너의 근본은 스마트 워치란다. 만보기 기능도 시키지 않는 것을 감사하게 여겨라.

잠이 오지 않았지만, 억지로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들지 못하는 공략대와 불침번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들도 두려울 것이다.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간혹 죽고 싶어서 환장한 미친놈들이 있지만, 그것은 정상인의 범주가 아니므로 제외하도록 하자.

대격변 이후 매일이 지옥과 절망의 중심에 떨어진 상황에서도 정상인이라면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내가 그중 가장 살아남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기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는지도 모르겠다.

눈을 떠 누운 곳 바로 옆에 있는 창문을 통해 하늘을 보니 별이 많다. 서울의 하늘은 별이 많지 않았다.

서울인 것 같지만 아마도 내가 살던 지구가 아닌 이곳은 과연 어떤 세계였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팔목에서 아스트로퍼가 진동을 일으켰다.

-빅터 하네스 지금···!

“알고 있어.”

초감각으로 이미 느끼고 나는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같은 방에 누워계시던 스승님도 마찬가지였다.

“빅터야.”

“네, 나가시죠.”

건물 바깥에서 원래는 없었던 수많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생명체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움직인다는 것은 분명했다. 왕세자 쪽이 보낸 정찰병일지도 모르지만 일단 확인은 해야 했다.

스승님과 나는 눈을 마주치고 곧바로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 순간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탕!

과학 문명이 만들어낸 가장 효과적이고 범용적인 대인 무기였던 총의 소리가 들렸다.

“습격이다!”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고 공략대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상자는 없나?”

“없습니다!”

건물 밖에서 불침번을 서던 기사들이 안으로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다행히 총을 맞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적은?”

“어두워서 자세히 확인은 못 했습니다만 열 명 안팎으로 보입니다.”

내 초감각에 걸리는 숫자는 그것보다 많지만 상관없었다.

타타타타탕!

누군가 창문으로 밖을 확인하려 했는지 총소리와 함께 총알이 창문을 뚫고 들어오며 천장에 부딪혔다.

“모두 안쪽으로 모여! 창문 쪽으로 다가가지마!”

나는 소리치며 공략대를 추슬렀다. 밤에 무언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화약 병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스승님과 제가 앞에 나서야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적이 쓰는 무기의 위력이 얼마나 될지 모릅니다.”

“알겠다.”

그냥 권총이나 소총 정도라면 스승님에게 딱히 위협이 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물 저격용 총이나 기관총 혹은 대전차미사일 같은 것이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무리 7성 기사라고 해도 수십명이 쏘아대는 중화기에 노출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슬라이트! 자칼! 기사단을 준비시키고 돌아와.”

“맡겨줘!”

“응!”

슬라이트와 자칼이 자신의 가문에서 나온 기사단을 맡아 정렬시켰다. 여기에서 가장 실력이 높은 것은 스승님을 제외하고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와 친구들이다. 선봉을 우리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스테이시가 다가와 바깥을 가리켰다.

[바깥에서 마나 반응이 있어요. 아스트로퍼하고 비슷한 느낌이에요.]

바깥에서 마나가 좀 더 강하게 느껴진 것은 나도 알고 있었지만. 아스트로퍼와 비슷한 것까진 감지하지 못했었다. 그럼 일단 정상적인 생명체는 아니라고 봐야 할 것이다.

“고마워 참고할게 마법사들에게 공격 마법을 준비하라고 해줘.”

[알겠어요.]

과학문명에 화약 무기가 있다면 우리 쪽에는 마법이 있다. 마법사 30명이 일제히 발사하는 공격 마법이라면 어지간한 화약 무기로는 흉내도 내지 못할 위력이 나온다.

“아스트로퍼 바깥에 있는 것들은 네 형제야?”

-저런 조잡한 것들을 나와 비교하지 마. 아주 열등한 복제품이야.

“일단 저것들도 마법 생명체인 것은 맞지?”

-인정하긴 싫지만 맞아.

일단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출입구는 스승님이 지키고 계시니 문제가 없고 나는 창문 근처로 다가갔다.

“아스트로퍼 눈먼 총알을 막아줘.”

-눈먼 총알이 뭐야?

아, 총알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나?

“그냥 내가 막아내지 못하는 공격 막아줘”

-알았어.

나는 스승님처럼 온몸에 오러를 둘러서 총알을 막아낼 자신까지는 없다. 이제는 아스트로퍼가 된 백룡이의 도움이 필요하다.

슬쩍 밖을 내다보니 우리가 있는 건물을 향해 전술 이동을 하듯이 다가오고 있는 군인들이 보였다. 군인이라는 것을 알겠지만, 확실히 내가 알던 군인은 아니다. 군복의 무늬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사람이라면 눈에서 붉은빛을 내뿜지는 않으니까.

탕!

내가 살짝 내다본 것을 놓치지 않고 총알 한 발이 날아와 창문을 뚫고 들어왔지만 이미 슬쩍 내다본 뒤 벽 뒤로 몸을 숨긴 후였다.

마법 생명체 주제에 저격 실력이 좋다. 나도 대격변 초기에는 총기를 꽤 사용했지만 저런 명사수는 아니었다.

감각을 최대로 넓혀 느껴보건데 약 100명이 조금 넘는 숫자다. 우리와 숫자를 맞춰서 나타나는 것인 듯 싶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얼핏 보기에 중화기를 가지고 있는 군인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해도 제멜아크 공략대도 똑같은 상황을 맞이했다고 생각하면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쪽은 일반 병사의 숫자가 많았다.

같은 5천의 병력이 맞붙는다고 하면 기사들은 어떨지 몰라도 병사들은 화약 무기에 저항할 실력이나 수단이 없다.

“저희가 먼저 나가서 적을 헤집어놔야 할 것 같습니다. 적은 숙련된 군인이고 생소한 무기를 씁니다. 건물 안에서 피하기만 해서는 큰 손해를 볼 겁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총이 아니다. 이렇게 건물 안에 몰려있을 때 최루탄 한두 개만 안으로 떨어져도 큰 혼란이 올 것이다. 혹은 수류탄에도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스승님을 비롯한 가장 실력자들이 먼저 튀어 나가서 헤집어 놓고 기사단과 마법사들이 화력을 쏟아붓는 것이 가장 최선으로 보였다.

“꽤 위력이 있는 작은 암기 같은 것을 쏘더구나. 집중된다면 보통 기사들은 막기 어렵겠지.”

물론 여기에 있는 기사들은 그냥 보통 기사가 아니라 최정예 기사단의 일원들이지만 스승님의 기준으로는 보통 기사인 것이다.

“간부들을 불러라.”

“예”

스승님의 명대로 빠르게 기사단과 마법사들의 간부들을 불러 상황과 전술을 설명했다. 시간이 없었다. 이미 밖에서 상당수의 적들이 건물 가까이에 붙어있었다.

“슬라이트, 자칼 중요한 건 다치지 않는 거다. 힘들다 싶으면 바로 뒤로 피해.”

“알았다.”

“응”

나는 친구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의를 줬으나 건성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두려움에 떠는 것이 아니라 전투가 주는 흥분에 빠져있었다. 슬라이트는 그럴 줄 알았지만, 자칼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어린 친구들이 첫 전투에 나설 때 이런 상태에 빠질 때가 많았다. 슬라이트나 자칼에게 이것은 첫 전투는 아니지만, 아직 젊고 실력이 있다 보니 그런 것 같았다. 대격변 이후 전투에 나설 때 젊은 친구들이 이런 상태에 빠졌을 때는 늘 결과가 좋지 않았다.

짜악! 짜악!

비록 갑옷 위지만 둘의 등짝을 소리가 나도록 한 대씩 때려줬다.

“미쳤어?”

“왜 때려?”

둘의 눈을 보니 흥분이 조금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머리를 차갑게 해. 난 아무도 다치지 않고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흥! 너나 다치지 말아라.”

슬라이트가 콧방귀를 뀌었지만, 눈빛이 많이 가라앉았다. 슬라이트와 자칼은 이곳에서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재다. 그리고 오래 살면서 내가 잘 먹고 잘사는데 도움을 줘야 한다.

“스테이시는 바로 화력지원 부탁해.”

[걱정 마세요.]

준비가 모두 끝나자 지켜보시던 스승님이 하얀 이를 드러내시며 웃으셨다. 역시 이 사람도 전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은 하지 않는다. 누가 누구 걱정을 한다는 말인가?

“그럼 가보자.”

스승님이 출입구를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하고 우리는 조금 떨어져서 따라갔다.

투타타타탕!

스승님이 사격이 가능한 범위에 들어서자마자 콩을 볶는 소리와 함께 총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어떤 총알도 스승님의 몸에 상처를 입히진 못했다.

어떤 것은 몸에 둘러진 오러의 벽을 뚫지 못했고 어떤 것은 느릿하게 휘둘러지는 스승님의 검에 맞아 튕겨 나갔다.

어느 정도 짐작하긴 했지만, 역시 소총으로는 7성 기사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겨우 이 정도인가? 고든이 실망했겠군.”

고든 바이런 후작과 무슨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말을 마치자마자 스승님이 폭발적으로 가속하며 건물 밖으로 뛰어나가셨다.

“우리도 가자!”

그리고 우리도 스승님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우리가 건물 밖으로 나갔을 때는 이미 스승님은 마음껏 자신의 기량을 뽐내고 계셨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순간 가속하며 건물 근처에 있던 마법 생명체 군인들을 베어 넘기고 계셨다.

그것은 이미 전투가 아니었다. 그냥 학살에 가까웠다. 다만 상대가 진짜 생명체가 아니고 피가 튀지 않다 보니 잔인하게 보이진 않았다.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었다. 따로 상의하지도 않았지만 우리는 알아서 흩어지며 먹잇감을 찾아 뛰어들었다.

스승님 하나도 어쩌지 못하던 화력이 우리까지 밖으로 나오자 분산되었다.

거기에 순간 가속력이라면 나도 꽤 자신이 있었다. 다리에 오러의 힘을 모아 박차고 뛰기 시작하자 나에게 날아오는 총알이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화망이라도 구성을 한 것인지 정확히 날아오는 총탄이 있었고 나는 그것을 검으로 튕겨내었다. 반사적으로 한 것이지만 하고 나서 놀랐다.

검으로 총알을 벤다는 것은 소설이나 만화책에서나 보던 일이었다. 그것을 나는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움직이는 것을 쉬진 않았다. 눈에서 붉은빛을 내는 군인들은 오러가 둘러진 검을 막아낼 힘이 없었다.

스승님과 우리가 먼저 주위의 적들을 상당수 처치하고 총소리가 조금 줄어들기 시작할 때 건물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단 90명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창문을 통해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불을 밝히고 곳곳에 숨어있던 저격수들을 향해 마법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승부가 기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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