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31화 (131/206)

131. 기분 나쁜 안내자

마지막으로 지휘관으로 보였던 군인의 목을 스승님이 베어내며 전투가 끝났다. 생각보다 어려운 전투는 아니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슬라이트와 자칼은 뭔가 아쉽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천재들이지만 아직 젊다고 해야 할까. 철이 없다고 해야 할까. 목숨을 건 격렬한 전투를 선망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전투는 쉬울수록 그리고 아군이 적게 상할수록 좋은 것이다.

“피해 상황을 보고하라!”

전투가 완전히 끝난다고 판단한 스승님이 외쳤고 각 기사단과 마법사들이 점검 후 보고하기 시작했다.

“근위 기사단 피해 없습니다.”

“북부기사단 경상 1명입니다.”

“흑룡 기사단 경상 1명입니다.”

“마법사단 피해 없습니다.”

둘째 왕자의 수행원 쪽은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니까.

왕자의 수행원까지 해서 대략 140명의 공략대였으니 적의 숫자도 아마 같았을 것이니 현대 무기로 무장한 훈련된 군인을 상대로 이 정도면 상당히 좋은 전적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순수한 생명체가 아닌 마법 생명체다. 던전 안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무한하게 생성될 가능성이 높았다.

마법 생명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군인들의 시체가 땅에 스며들듯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지휘관을 벤 그 자리에 있던 스승님의 앞에 하나의 물건이 나타났다.

“이것은···.”

지휘관의 시체가 사라지고 나타난 것은 화려하게 세공된 반지였다. 굳이 감정해보지 않아도 보물급의 물건이었다.

‘이게 무슨 게임이냐?’

바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웨이브를 하나 막을 때마다 보물이 하나씩 생긴다. 이 던전의 방식을 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왕세자의 공략대가 장기간 머물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매일 하나의 보물을 챙기려고 일부러 공략하지 않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도 마법과 검기로 파괴된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 근처에 왕세자가 없거나 이곳을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스승님의 앞에 나타난 반지는 마법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감정해보겠다고 가져가고 아까보다 불침번의 숫자를 늘린 후 나머지는 다시 잠을 청했다.

던전 안에서 취식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특이 이런 던전처럼 얼마나 장기전이 될지 모르는 곳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내 예상으로는 오늘 밤에 더 이상은 공격은 없을 것이다. 단지 첫날일 뿐이지만, 이 던전의 방식에 대해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스트로퍼”

-웅?

아스트로퍼도 이번 전투에 딱히 활약할 기회가 없었다. 아스트로퍼를 변형시킨 검을 쓰지도 않았고 초반 화력이 스승님에게 집중되다 보니 눈먼 총알도 없었다.

“제국의 마법사들이 이공간의 기본적으로 들어있던 것 외에 다른 것을 추가할 수 있었을까?”

내가 궁금한 것은 이것이었다. 나타난 군인들을 보면 이것은 원래 777번 아스트라호에 기본적으로 들어있던 것이었을 것이다. 제국의 마법사들이 현대의 군인들을 상상해내서 만들어 넣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기본적으로 내장된 지식 외에 자신들이 이공간에 무엇인가를 추가할 수 있었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무엇이 나올지 예상하기가 어려워진다.

지구의 군인들이 아닌 마수나 변이체가 나타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 당시 제국 마법사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어려웠을 거야.

“그럼 저 보물이 나오는 것은 뭐야?”

-그건 세계를 변경하는 것이 아니잖아.

“창조된 세계를 변경하지 않는 선에서 바깥의 무언가를 추가할 수는 있었다는 거지?”

-아마도? 나도 당시의 마법 수준에 대한 지식이 적어서 확신할 수는 없어.

마지막 지휘관을 처치하고 보물이 나왔을 때부터 느낌이 왔다. 이건 디펜스 게임이다.

매일 조금씩 더 강한 웨이브가 올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30일이 넘은 제멜아크 원정대는 어떻게 되었을까?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답은 나와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눈을 잠깐 붙이고 일어난 후 내 차례가 되어 불침번을 서게 되었다. 편의를 봐준 것인지 같은 조에 아이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괜찮냐?”

나를 보자마자 슬라이트가 안부를 물었다.

“내가 괜찮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냐. 너희들이야말로 괜찮냐?”

전투에 들어가면 다른 사람이 되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것은 자칼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자칼은 평소보다 오히려 상태가 좋아 보였다.

“괜찮아.”

[저도요.]

쉬운 전투였다. 이것이 정말 디펜스 게임과 같다면 아마 며칠은 그렇게 강한 상대가 튀어나오진 않을 것이다.

“오늘은 다행히 쉬운 전투였지만, 방심하지 마라.”

“당연하지. 그런데 그 무기들은 대체 뭐냐? 소리가 크긴 하지만 일반 병사들은 상대하기 어렵겠어.”

총이라고 알려줄 수는 없다.

“그래서 제멜아크 공략대는 큰 피해를 입었을 것 같다. 많이 죽었겠지.”

그쪽은 일반 병사가 4천명이 훌쩍 넘었으니까. 과연 지금은 얼마나 살아남아 있을까?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닐 것이다. 사람이 죽는다는 말을 하자 아이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렇겠지?”

“우리는 그래도 소수정예라서 다행이야.”

[아, 맞다. 이거 받으세요.]

스테이시가 아까 전투에서 획득한 반지를 내게 돌려주었다.

“감정 결과가 벌써 나온 거야?”

[네, 제국 시절에 만들어낸 아공간 반지라고 하더라고요.]

쉬운 전투였던 만큼 역시 대단한 보물은 아니다. 그래도 판다고 하면 꽤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알았어. 내가 스승님에게 전해드릴게.”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뭔가 이야기꽃을 피울 동안 나는 반지에 집중했다. 이것은 허상이 아닌 진짜 물건이다. 무언가 쓸모있는 기억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 시도는 해보는 것이다.

예상대로 이공간에서 창조된 물건들처럼 아무 기억도 읽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쓸모있는 기억도 아니었다.

읽어낸 기억은 이름 모를 어떤 제국 시대의 마법사가 반지를 완성하고 매우 기뻐하는 모습일 뿐이었다.

우리의 불침번 시간이 끝나자 동이 트고 도시의 아침이 밝았다. 비교적 멀쩡한 모습의 도시에서 아침을 맞이하자 예전 회사원 시절의 출근길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매우 괴로운 기억이었다. PTSD가 오려는 것을 털어버린 뒤 아침 식사를 하고 우리는 다시 이동했다.

목표는 여전히 청와대였다. 만약 어제와 똑같은 패턴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낮에 잠을 자고 이동도 해야 하며 밤에는 전투를 치러야 한다.

그리고 아마도 매일 밤 조금씩 더 강한 적이 나타날 것이다. 처음에는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었지만, 나중엔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

최신형 전차나 전투기까지 나오는 것을 상상해보았다. 탱크는 어떻게든 상대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전투기는 장거리에서 미사일 공격을 한다고 하면 답이 없다.

우리는 저녁을 먹기 전까지 이동했고 식사를 한 뒤 바로 눈을 붙였다. 스승님에게 내가 그렇게 건의했고 스승님이 그것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예상대로 어제와 같은 시간에 어디서 생성됐는지 모를 적의 습격이 있었다. 어제와 다르게 우리는 이미 최적의 장소를 찾아 대기하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어제보다 더 쉽게 적을 처치했다.

적의 화력은 많이 늘어나지 않았으나 군인들의 움직임이 조금 더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그래봐야 초인의 영역에 있는 우리들에겐 크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의미가 없었다.

오늘도 경상자 두 명이 발생했다. 어제와 다르게 기사들은 총탄에 대해 대비를 했지만, 도탄까지는 막아내지 못한 결과였다.

경상이라고 해도 어제, 오늘 두 번의 전투에서 부상자가 네명이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중상자가 생길 것이고 이런 식으로 가랑비에 옷 젖는 것처럼 부상자가 늘어나면 결국은 파국을 맞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경험했던 암테일 영지의 던전보다 어떤 의미로는 더욱 악랄한 던전이었다. 역시 최대한 빨리 던전의 핵을 찾아내는 것을 우선순위로 두기로 했다.

두 번째 날에는 지휘관을 처치하자 목걸이 하나가 나왔다. 이것 역시 마법사들이 감정을 했고 일정 횟수의 보호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목걸이라고 했다.

이것 역시 기억을 읽었지만, 특별히 쓸모가 있는 기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이동 중에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곳들을 탐색하다 보니 이동속도는 매우 느렸다. 공략대가 감탄한 부분은 의외로 고층빌딩 같은 것이 아니라 경복궁과 같은 곳들이었다. 고대 유적 같은 느낌이 든다나? 경복궁의 모습을 열심히 스케치하는 마법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경복궁에서는 아무 소득도 올리지 못했다.

우리는 경복궁에서도 1박을 하며 방어전을 치렀다. 문화재를 부수는 것에 약간의 가책이 느껴졌지만, 어차피 이곳은 새로 만들어낸 세계다. 그리고 내가 살던 진짜 지구도 아니다.

셋째 날에는 드디어 기관총 한정이 등장했다. 등장하자마자 바로 마법사들의 집중 공격을 받고 퇴장해버렸다.

셋째 날에는 중상은 아니지만, 경상이라고도 할 수 없는 부상자가 나왔다. 총알이 갑옷을 뚫고 들어가 어깨에 박힌 것인데 육체가 보통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사라서 그런지 마법사들의 치료를 받고 바로 복귀했다.

근위 기사단의 기사였던 부상자는 오히려 총을 맞은 것보다 같은 기사단의 고참기사들에 방심해서 다친 것이라며 호되게 혼이 났다. 오히려 총을 맞는 것보다 그것이 더 아파 보였다.

넷째 날은 드디어 청와대에 도착했다. 거리를 생각하면 굉장히 늦게 도착한 셈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여러분”

그곳에서 처음으로 낮에도 움직이는 이곳의 존재를 발견했다.

청와대의 본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인사를 건네는 인간은 나도 얼굴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대격변 이전의 마지막 대통령이었으니까. 대격변이 일어나자마자 그 행방을 알 수 없던 사람이었다. 소문으로는 대통령 전용 벙커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그 이후의 행방은 들은 바가 없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목을 쳐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이 무능한 인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던가?

대격변 초기에 바로 도망치지 않고 지도력을 발휘했다면 수백만 명은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질적이게도 대통령은 한국어가 아닌 아노더스의 말을 하고 있었다.

“넌 누구지?”

모른 척 묻는 나에게 대통령은 그 특유의 뻔뻔해 보이는 얼굴로 대답했다.

“이곳의 주인입니다.”

“너를 죽이면 이 던전이 끝나는 건가?”

그렇다면 백번 아니 천번은 죽여줄 수 있다.

“아닙니다. 저는 그저 이곳의 안내자일 뿐이지요.”

대격변 이전에도 입만 열면 거짓말을 늘어놓던 대통령이다. 대격변 이전에도 무능했지만, 대격변 이전에도 역대 가장 무능한 대통령이라고 평가되던 사람이다. 그런 인간의 말을 내가 믿을 리가 없다.

“아스트로퍼 어때? 저놈이 핵이 맞아?”

-아니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손목에서 나타난 아스트로퍼를 보고 대통령이 반색했다.

“그분은 저와 같은 출신이신가 봅니다.”

-감히! 너 따위를 나랑 비교하지 마!

아스트로퍼가 정색하고 굉장히 화를 냈다.

“하하하! 성격이 좋지 않은 분이군요. 저는 평화와 화합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아니, 사람은 아니지. 그리고 저 멘트, 저 억양 내가 기억하는 대통령과 똑같다. 단지 내뱉는 언어가 다를 뿐이다. 점점 당장 죽이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래서 너는 여기서 뭘 안내한다는 거지?”

“하하! 성격이 급하신 분이군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 들어 검면으로 녀석의 뺨을 후려치고 목에 검을 겨눴다. 대통령 뺨 때리기. 전생에 정말 한번 해보고 싶었던 일이다.

“너랑 말장난하고 싶지 않다. 버러지 같은 놈아.”

그야말로 주위의 모든 것을 좀 먹는 국가의 버러지, 인류의 버러지 같은 놈이었다.

호되게 얻어맞은 녀석이 자신의 뺨을 감싸 쥐고 나를 노려봤다. 대통령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마법 생명체이기에 기세나 적대감 같은 감정을 느낄 수는 없지만, 위험신호가 발동하기 시작한다. 이 녀석 꽤 강한 녀석이라는 거다. 하지만 느껴지는 것으로 봤을 때 아주 위험한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중간 보스쯤 되는 건가? 게임에선 이럴 땐 무조건 죽이면 되지만 이곳에서는 어떨지 모른다. 진짜로 아픈 것처럼 뺨을 감싸 쥔 대통령이 대답했다.

“저는 이곳의 열쇠를 찾는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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