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32화 (132/206)

132. 정치인

“열쇠라고?”

“그렇습니다.”

대통령은 뺨에서 손을 떼고 말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뺨이 터지고 피를 흘릴 만큼 세게 때렸었다. 대통령도 아픈 것처럼 부여잡고 있었지만, 맞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세게 때릴 것을 그랬다.

“그 열쇠가 던전을 공략하는데 필요한 건가?”

“그렇지요. 모두 다섯 개의 열쇠가 있습니다. 그 열쇠를 모두 모아야 하지요.”

“그렇다면 그 위치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또 말장난을 하는 것 같아서 한 대 더 때려볼까 하는데 대통령이 도끼눈을 뜨고 나를 노려봤다.

“저를 적대한다면 영원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정말일까? 간만에 또 의심병이 스멀스멀 올라오려고 한다. 늘 그렇지만 사람도 잘 믿지 못하는 내가 이런 놈의 말을 믿을 리가 없다. 특히나 입만 벌리면 거짓말을 하던 대통령이다. 당연히 가상의 존재이고 내가 알고 있던 그 대통령이 아니고 평행세계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곳을 대통령이지만, 모르긴 몰라도 평행세계에서도 이 사람은 정치를 잘하고 청렴했던 대통령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내가 알고 있던 대통령과 저렇게 행동거지가 똑같을 리가 없다.

“김태룡, 내가 널 어떻게 믿지?”

김태룡은 대통령의 이름이었다. 대통령은 고개를 잠시 갸웃했다.

“내 이름은 김태룡이 아니라. 강태룡입니다.”

역시 이름도 미묘하게 다르다.

“김태룡이나 강태룡이나 중요한 것은 아니잖아. 어쨌든 그럼 열쇠를 내놔. 다섯개의 열쇠 중 하나가 여기 있는 것 아니야?”

“허허! 그것을 그냥 드릴 수는 없지요. 시험에 통과한 자만이 열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역시 그냥 죽일까? 대통령의 유들유들한 태도에 살심이 절로 솟구쳤다.

“시험은 무엇인가?”

여태까지 지켜보고 계시던 스승님이 입을 여셨다.

“어렵지 않습니다. 당신 같은 강자에게는 말이죠. 오늘 밤 저를 지켜주시면 됩니다.”

나와 대화할 때와는 다르게 마치 손이라도 비빌 것처럼 대통령이 스승님에게는 공손하게 대한다. 이거 나를 일부러 도발하는 것인가? 아니면 원래 살아있을 때의 성격대로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뻗대는 것일까?

그리고 시험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왜 저런 놈을 지켜야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평소보다 더 준비하고 훨씬 긴장한 채 밤을 맞이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나오지 않는 것 인지하지 못하는 것인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단점이라면 그 대통령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방어선을 내가 맡기로 한 것이었다. 나는 웬만하면 슬라이트나 자칼에게 일을 떠넘기려고 했지만, 스승님이 고심 끝에 짠 인선이라는 것을 알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곳 시험은 어려운가?”

“글쎄요?”

나는 하나라도 더 정보를 얻기 위해 혐오스러움을 참고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하지만 제대로 대답하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가끔 다른 질문도 했다.

“너는 좋은 정치인이었나?”

“물론입니다.”

강태룡은 아주 당당하게 대답했다. 거짓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넌 국민을 위해 무엇을 했지?”

대통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것까지는 입력이 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국민을 위해 한 일이 전혀 없을지도 몰랐다.

“네가 살던 세상에는 대격변이 오지 않았나?”

나는 한국어로 물어봤다. 둘만 있기에 한번 시도해본 것이다.

“대격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괴물들이 나타난 날을 말하는 거야.”

“아하! 그날 말이군요. 그것을 말하자면 있었습니다.”

역시 평행세계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던 건가.

“그래서 어떻게 됐지?”

“아주 오래 싸웠지요. 그러나 이겨냈습니다.”

“이겼다고?”

나는 조금 흥분하고 말았다.

“예, 힘든 싸움이었지만, 인간들은 결국 포탈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괴물들을 모두 제거했지요.”

“포탈? 그것은 또 뭐지?”

“포탈을 모르시는 겁니까? 아니 영어를 모르시나?”

“안다.”

내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수준은 아니었다고 해도 그 정도는 기억에 남아있다.

“포탈을 통해 괴물들이 쏟아져 나왔지요. 마침 괴물이 쏟아져 나온 날에 각성자들이 나타났고요. 처음에는 인류멸망의 위기까지 몰렸지만 결국은 이겨냈습니다.”

저쪽 세상은 막아낸 건가? 그렇다면 이 대통령은 자기 말대로 꽤 유능한 대통령이었는지도 모른다.

“너는 어떻게 죽었지?”

“전 이렇게 살아있습니다만.”

“아니 진짜 너를 말하는 거야.”

“흠흠, 벙커에 숨어있다가 죽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역시 이놈도 마찬가지였나?

“그럼 인류가 이긴 것은 어떻게 알고 있는거지?”

“그냥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위대하신 제 창조주께서 주신 기억이겠지요.”

그것은 아마도 광검제의 기억일 것이다. 어쨌든 광검제의 지구는 망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때 밖에서 큰 폭발음이 터졌다. 드디어 시험이 시작한 모양이다.

대통령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이, 어딜 가는 거야? 움직이지 마라.”

내가 그 앞을 막아섰지만, 대통령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서둘러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절대로 소총 소리가 아닌 거대한 폭발음이 밖에서 연이어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오러의 힘이 느껴진다. 스승님이 움직이기 시작하신 모양이다.

나는 대통령의 뒷덜미를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지만 발버둥 치는 힘이 만만치 않았다.

“놓으십시오. 나는 그곳에 가야 합니다.”

“어디?”

“방공호 말입니다.”

이 비겁한 놈은 무슨 일만 터지면 방공호로 도망치는 것이 기본 설정인가?

“닥치고 앉아있어.”

나는 거칠게 대통령을 앉아있던 의자를 향해 밀쳤다.

“가지 않으면 전 죽습니다. 그리고 제가 죽는다면 이 던전은 영원히 끝나지 않지요.”

“밖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나?”

“당신들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지요.”

대통령이 여태까지와 다르게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 개새끼가···.”

역시 지구의 정치인답다고 해야 할까. 정치인들이 썩은 것이야 이쪽 세상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두 세계 모두에서 살아본 소감으로는 지구 쪽이 훨씬 더 썩은 느낌이다.

“기다려라. 스승님은 이긴다. 너도 스승님이 강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강하지요. 여태까지 절 마주한 존재 중에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시험을 이겨낼 리 없습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격돌 음과 함께 오러와 무언가의 격돌이 쉼 없이 느껴지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역시 내가 밖에서 스승님을 돕는 것이 더 나은 결정이었다.

“당신의 스승이라는 저 사람이 오늘 죽는다고 해도 시험은 끝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죽으면 이 시험은 완전히 끝나지요. 스승이 오늘 실패해도 내일 당신이 도전할 기회가 사라지는 겁니다. 이래도 제가 방공호로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닥쳐라.”

대통령의 감언이설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나는 스승님을 믿는다. 어차피 스승님이 이기지 못한 상대를 내일의 내가 이겨낼 수 있을 리 없다.

콰앙!

멀리서 들리던 폭발음이 아주 가까이에서 터지며 건물이 크게 흔들렸다. 청와대 건물의 어딘가가 터져나간 모양이었다.

이윽고 초감각에 무언가가 잡히기 시작했다. 인간? 아니다. 결코 인간의 움직임은 아니지만, 인간과 비슷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고 스승님이 그것과 싸우고 계셨다.

엄청난 고속으로 이동하며 벌어지는 전투였다. 저러니 다른 기사들이나 마법사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내가 저곳에 있었다면 도움이 될 수 있었을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움직임을 어떻게 따라잡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코 장시간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아스트로퍼 혹시 모르니 저놈을 지켜”

-싫은데! 저런 열등한 마법 생명체를 내가 왜 지켜줘야 해?

뜻하지 않게 아스트로퍼의 반항이 시작되었다.

“저놈이 살아야 던전이 유지된다잖아.”

-아닐걸?

“뭐?”

-열쇠가 필요하다며?

“그래 이놈이 그것을 알려준다잖아.”

-쟤가 열쇠야.

대통령이 흉악한 얼굴로 아스트로퍼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아스트로퍼가 아니다.

“그거 진짜야? 그걸 왜 지금 말해?”

-이상 현상만 알려달라며!

아스트로퍼가 억울한 듯 소리를 빼액 질렀다. 그래 내가 죄인이다. 내가 대통령에게 시선을 돌리자 녀석의 모습이 이미 변하고 있었다.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괴물이었다. 마수도 변이체도 저런 외형의 괴물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곧 내 손에 죽을 거니까.

“아스트로퍼 검으로!”

이번 생에서는 제법 예절을 배우고 실천하는 몸이지만 괴물에게도 지켜줄 매너 같은 것은 배우지 못했기에 변신 매너 같은 것을 지켜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순간적으로 마나를 쑥 빨아먹으며 멋진 검으로 변신한 아스트로퍼를 붙잡고 괴물로 변하고 있는 대통령에게 찔러넣었다.

키에에에엑!

변이체처럼 껍데기가 질긴 것은 아닌지 아스트로퍼가 깊게 박히자 이제는 대통령도 뭣도 아닌 괴물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뭉개진 덩어리 같은 모습이 되어 입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데 비명을 지르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죽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괴물로 변할수록 위험신호가 더욱 강하게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놈이 완전히 괴물로 변하기 전에 큰 상처를 입히거나 가능하면 죽이는 것이 편할 것이다.

마치 거대한 뇌에 여러 개의 가시가 돋친 모습으로 변해가는 녀석을 나는 계속 공격했다. 아스트로퍼가 녀석을 베고 찌를 때마다 움찔거리긴 했지만, 입이 완전히 사라진 것인지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진 않았다.

그러는 도중에 반격이 시작되었다. 겉면에 붙어있던 가시들이 마치 채찍처럼 휘둘러져 왔다. 속도가 제법 빨랐지만 막아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불규칙한 움직임이었지만 어떻게 공격이 들어올지 보인다고 할까. 새롭게 얻은 능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몇번의 공격을 쳐내고 반격을 가하고 있을 때 스승님과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전투가 이곳까지 영향을 끼쳤다.

콰앙!

집무실 벽이 터져나가며 대통령이었던 괴물과 내가 그것에 휩쓸렸다. 나는 그것에 대비하고 있었기에 전혀 피해가 없었지만 거대한 뇌수처럼 변한 괴물은 폭발에 휘말려 슬라임처럼 땅바닥을 뒹굴었다.

“괜찮으냐!”

스승님이 무너진 벽 안으로 뛰어 들어오시며 내 안부를 물으셨다. 그런데 오히려 나보다 스승님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전 괜찮습니다!”

스승님을 만난 이후로 지금의 모습이 가장 흐트러진 모습인 것 같았다. 머리는 산발이 되어 휘날리고 있었고 옷도 여러 군데가 찢어진 곳이 많았다.

대통령이 강한 적이라고 하더니 스승님을 몰아세울 정도였나?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오늘의 초대 손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순간이동처럼 고속 이동으로 나타난 녀석과 스승님이 다시 격돌했다. 대통령의 집무실이 좁은 곳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7성 기사와 그에 버금가는 존재의 격돌을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콰앙!

충격파가 작은 공간을 가득 메우며 방금 격돌이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렸다. 마치 실내에서 수류탄이 터진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데 실제 위력은 그것보다 훨씬 위였다.

나로서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충격파에 내장이 조금 울릴 정도였다. 나는 스승님과 대치하고 있는 적을 이제야 제대로 보았다.

“로봇?”

반쯤은 로봇처럼 금속성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라고 해야 할까? 그런 인간형의 적이었다. 대형 LED를 박아놓은 것 같은 녀석이 눈이 방안을 훑어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바닥을 기어서 어딘가로 도망가고 있는 대통령이었던 것에 고정되었다.

녀석은 왜 대통령을 죽이려고 하는 것일까? 아니 진짜로 죽이려고 하는 것이 맞긴 할까? 어쨌든 간에 나는 놈이 대통령 쪽으로 가지 못하도록 길목을 막았다.

“조심해라!”

스승님의 경고와 함께 로봇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승님이 녀석을 막기 위해 공격했지만, 녀석은 놀랍게도 스승님의 방어를 도외시하고 그대로 달렸다. 스승님의 검이 녀석의 옆구리를 베고지나가며 피인지 기름인지 모를 액체와 기계 부품 같은 것들이 튀어 올랐지만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7성 기사와의 수십차례 격돌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은 강철 주먹이 나를 향해 뻗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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