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33화 (133/206)

133. 진정한 용도

손에 들려있던 아스트로퍼가 순식간에 방패로 변해 강철 주먹을 막아냈다.

콰앙!

방패의 가운데 부분이 움푹 파였다. 아스트로퍼의 방패가 우그러질 정도의 공격이라니 상상도 못 할 힘이었다. 저것은 오러나 마나를 쓰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 엄청난 힘은 그 뒤에 숨었던 나에게까지 강력한 충격파를 선사했다.

버티려고 노력했지만, 너무 강한 힘에 뒤로 몇걸음이나 물러섰는데 그사이를 놓치지 않고 굴러다니던 대통령의 촉수가 등 뒤를 노렸다.

가까스로 그것을 피하고 나니 스승님이 다시 나서서 로봇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몇번의 격돌이었지만 이미 대통령 집무실은 벽이고 뭐고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

저 인조인간 같은 것으로부터 지켜주려고 했더니 감히 뒤를 공격한 대통령을 보니 바닥을 기어 꿈틀거리면서 도망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속도가 빠르지 않아 경계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스트로퍼 괜찮아?”

어느새 다시 검으로 돌아온 아스트로퍼였지만, 형체가 변할 정도의 공격을 받았던 것이 처음이라 걱정이 되었다.

-괜찮아!

그런데 내가 괜찮지 않다. 복구하는 데 쓰는 것인지 마나를 엄청나게 빨아먹고 있었으니까. 아스트로퍼가 상할 정도의 공격을 되도록 맞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스승님과 인조인간은 어느 순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폭풍 같은 공방을 벌이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폭풍이었다. 공방의 여파로 진짜 충격파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으니까.

스승님이 벌써 지쳐 보이는 것은 내 착각이 아닐 것이다. 상대는 반쯤은 기계다. 아무래도 체력은 저쪽이 위일 것이다. 그러나 인조인간도 완전히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옆구리의 상처가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저 인조인간은 우리를 노리는 것일까? 아니면 대통령을 노리는 것일까? 깊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둘이 다시 고속으로 이동하며 싸우기 전에 나는 인조인간의 뒤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내 움직임을 포착한 스승님이 녀석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순간적으로 더 강한 공격을 가하기 시작하셨다.

내가 뒤로 달려들어 막 녀석의 등에 검을 꽂으려는 순간 녀석의 머리만 180도 회전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강렬한 위험신호가 감지되었다.

위험신호가 아니라도 무슨 공포영화에나 나올 장면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속였다.

콰아아아!

녀석의 크게 벌린 입에서 레이저 같은 것이 발사되어 건물을 뚫고 밤하늘을 갈랐다. 그래 이런 것이 나올 줄 알았다. 살짝 스쳤는지 등허리가 뜨끈했지만 그렇다고 공격을 멈추지는 않았다.

오러를 잔뜩 머금은 아스트로퍼가 녀석의 허리를 깊게 베었다. 피인지 기름인지 모를 것이 줄줄 흐르고 있던 옆구리 근처에 다시 한번 큰 상처를 입자 녀석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투력이 급감한 인조인간은 스승님과 나의 양면 공격에 속절없이 계속 치명타를 얻어맞기 시작했다.

거기에 원군까지 나타났다. 격돌로 인한 충격파가 덜해지자 슬라이트와 자칼이 돕기 위해 달려온 것이다.

“여긴 괜찮으니까. 거기 도망가는 놈 잡아놔!”

나는 둘에게 기어서 도망가고 있는 대통령을 맡겼다.

“맡겨둬!”

슬라이트가 호기롭게 외쳤지만, 대통령도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슬라이트와 자칼이 대통령의 촉수 공격에 생각 외로 고전하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어차피 이기는 것을 원한 것이 아니라 발을 묶어두는 것이 목적이었다.

스승님과 내 협공에 인조인간은 실시간으로 걸레짝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계라서 그런가 쓰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스승님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스승님이 쓰러지고 나면 나 혼자 이놈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 모든 힘을 끌어올려 강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만 좀 쓰러져라!”

그러나 이것도 인조인간의 의식을 내게 돌리기 위한 일이다. 내가 아무리 강한 공격을 한다 해도 스승님의 힘에 미치지 못한다. 내가 녀석의 공격을 몇번만 막아낸다면 길이 열릴 것이다.

내 의도가 통했는지 여태까지 스승님을 향해있던 녀석의 몸이 내 쪽으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해도 기계라서 그런지 기괴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관절 덕분에 나도 녀석의 등을 쉽게 공략하지 못하고 있었다.

녀석이 화려한 주먹과 다리를 이용한 콤비네이션 공격이 나를 향했다. 아노더스의 권법가 같은 움직임은 아니다. 그보다는 내가 대격변 전에 TV에서 많이 보았던 이종격투기 선수의 움직임과 비슷하다.

짧게 끊어치는 주먹 연타와 이어지는 로우킥이다. 녀석의 공격을 예측하고 주먹을 검으로 막아내며 그 힘을 이용해 뒤로 물러나며 로우킥을 피해냈다. 그런데 녀석의 움직임이 변했다. 나를 따라붙거나 등 뒤의 스승님을 견제할 줄 알았으나 녀석은 사이드스탭을 밟으며 옆으로 벗어났다.

“후우우우!”

숨 막히는 격돌이 중간에 끊기며 시간이 생기자 스승님이 길게 숨을 내뱉으셨다.

“괜찮으십니까?”

“쉽지 않구나.”

그때 인조인간 녀석의 입이 달싹거렸다.

“비... 켜...라”

질 나쁜 스피커가 울리는듯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놈 말도 할 수 있었나? 하지만 한국어였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스승님 대신 내가 녀석에게 한국어를 사용해 물었다.

“넌 누구지? 왜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지?”

비록 내가 한국어를 사용하는 것을 저편에서 슬라임이 되어버린 대통령과 드잡이질을 하고 있는 슬라이트나 자칼이 듣겠지만, 어떻게든 둘러댈 각오를 했다.

내 입에서 나온 한국어에 녀석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양쪽 눈과 얼굴 반쪽은 금속성의 기계로 덮여있었으나 나머지 사람의 피부로 만들어진 부분이 움찔거렸다.

“강화...특수부...대위 김...창현...변...절자를 처리하...러 왔다.”

“변절자? 저거 말하는 건가?”

나는 수난을 겪고 있는 대통령을 가리켰다. 처음에야 생소한 적을 상대하느라 슬라이트와 자칼이 조금 밀렸지만, 당대에 내로라하는 천재들이다. 금방 대통령의 촉수에 적응해서 마치 괴롭히듯이 공격을 꽂아 넣고 있었다.

“그..렇다.”

부대의 이름과 몸의 절반이 기계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뻔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쏟아져나오는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강화군인 그리고 그 사람을 실컷 이용하다 헌신짝처럼 버린 대통령. 삼류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오히려 그래서 현실인 것이다.

내가 아는 김태룡이 아닌 강태룡이라는 평행세계의 대통령도 역시 좋은 정치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놈이 죽거나 말거나 그것은 상관없지만, 저 놈이 열쇠를 가지고 있다면서? 네가 저놈을 죽이면 열쇠가 나오지 않는 것 아닌가?”

“열...쇠?”

“그래 열쇠”

인조인간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기계음과 함께 기계로 이루어진 허벅지 부분이 튀어나왔다. 그곳에는 일종의 수납함 같은 것이 있었다. 인조인간은 그곳에서 무언가를 한움큼 쥐어서 바닥에 떨어뜨렸다.

얼핏 봐도 수십 개의 열쇠가 바닥에 흐트러졌다.

“나...의 임무는 변..절자를 처치하...는것 23...8342번의 임무...에서 1972...30번을 성공했다. 열쇠...를 가져라. 그리고 나의 임...무를 방...해하지 말아...라”

나는 이곳의 진짜 목적을 조금 알 것 같았다.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만들어낸 이공간의 목적. 정확히는 광검제가 어째서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를 통해 이런 공간을 만들어냈는지 그 목적을 알아낸 것이다.

“아스트로퍼 어때? 이것도 진짜 열쇠 맞아?”

-똑같은데? 저 흉측한 놈 안에 있는 것과 마나의 구성이 같아.

나는 바닥에 떨어진 열쇠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대통령을 괴롭히고 있는 친구들을 불렀다.

“어이! 얘들아, 그만하고 길 열어드려라!”

내 외침에 친구들이 황당한 표정이 되어 있다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아이들의 공격으로 구멍투성이가 된 대통령이 전력을 다해 땅을 기어가기 시작했지만, 그래봐야 슬라임이었다.

“알았다. 너의 임무를 수행해라. 스승님 이제 싸우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인조인간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인조인간은 군인식으로 나에게 경례를 하고 성큼성큼 대통령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스승님이 나에게 물으셨고 나는 인조인간과 대통령의 관계를 추측한 것을 말씀드렸다.

“과연, 그럼 우리는 저 대통령이라는 놈에게 속은 것이구나?”

“그런 셈이지요.”

“그런데 너 아까 이상한 말로 쏼라쏼라하던데 그건 뭐냐?”

인조인간에게 대통령을 인도하고 가까이 다가온 슬라이트 녀석이 또 눈을 가늘게 뜨고 물어왔다.

“너 고대어 공부 안했냐?”

“고, 고대어?”

실제로 고대어라는 것이 있긴 하다. 아주 오래전 상고시대의 언어로 따로 연구하는 학자들도 꽤 있지만 누구나 공부하는 그런 분야는 아니다.

고대의 유적이라도 대단한 것이 있다면 공부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상고시대 유적이 그리 자주 발견되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보물도 없어서 언어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외에는 거의 배우지 않는 학문이었다.

“그래, 고대어다.”

나는 뻔뻔하게 밀고 나가기로 했다. 아무리 슬라이트라고 해도 고대어를 어디서 들어봤겠는가? 들어봤다고 해도 그것을 분간할 재주는 없을 터였다.

“너는 고대어 공부를 언제 한 거냐?”

“내가 누군지 몰라? 나 빅터 하네스야.”

“괴물 같은 놈”

이제 슬라이트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을 일종의 칭찬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슬라이트가 분하다는 듯이 눈을 흘기는데 어쩌면 이놈이 돌아가서 진짜로 고대어 공부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건 그때의 일이고 지금은 쉽게 넘긴 모양이었다. 그러는 사이 우리의 인조인간 형님은 슬라임 대통령을 그야말로 잔인하게 조각을 내고 있었다. 대통령의 촉수는 7성 기사의 검도 튕겨내던 인조인간의 몸에 어떤 위협도 되지 않았다.

인조인간은 대통령을 그야말로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었다. 대통령의 비명이 불쌍할 정도로 울리다가 어느 순간 멈췄다. 죽은 모양이다.

인조인간은 대통령의 몸체 가장 깊숙한 곳에서 뜯어낸 열쇠를 우리 앞에 휙 던졌다.

땡그랑

열쇠가 바닥에서 튕기며 맑은소리가 울려 퍼졌다.

“임...무 완료”

표정이 잘 드러나진 않지만, 인조인간의 얼굴에 무언가 후련함이 보였다. 그리고 서서히 인조인간과 갈가리 찢긴 대통령의 몸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전투의 여파로 거의 반쯤 무너져있던 청와대가 시간을 거꾸로 돌리듯이 원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청와대 바깥은 전투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았었는데 이곳은 다른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러니 벌써 20만번이 넘는 전투가 벌어졌는데도 멀쩡하게 외형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인조인간과 대통령이 사라진 곳에서는 두 개의 물건이 나타났다. 내가 재빨리 그것을 챙겼다.

“우리도 해야 할 일이 많구나.”

말씀하시는 스승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슬라이트와 자칼의 표정도 갑자기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사람들이 많이 다쳤습니까?”

“어, 음... 사망자가 나왔다.”

스승님 대신 슬라이트가 대신 대답했다. 우리가 서둘러 밖으로 나가자 역시나 어두운 분위기가 공략대에서 흐르고 있었다.

흰 천에 둘러져 나란히 누워있는 7개의 시신이 내 눈에 들어왔다. 되도록 공략대에서 한명도 사망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랐지만, 결국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누구도 나를 탓하진 않지만, 가슴에 무거운 돌이 들어찬 기분이 들었다. 비록 며칠 동안 함께한 사이지만 잘 알던 사람도 아니다.

전생에서도 그랬다. 잘 알던 사이는 아니지만 쉘터의 식구들이 죽고 나면 이런 기분이 들었었다.

사망자들은 각 기사단에서 골고루 나왔다. 조촐하게 그들의 장례식을 치렀다.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투구에 감추어져 있는 동료 기사들의 소리없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누구도 크게 울지 않았지만 숨죽인 울음소리가 더욱 가슴에 와닿았다.

내가 대표로 시신을 챙겨 넣었다. 시신을 온전히 가족들에게 돌려주는 것, 이것이 나의 또 다른 임무가 될 것이다.

인조인간과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스테이시를 비롯한 수뇌부가 모였을 때 다시 한번 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추측한 내용도 말했다. 물론 이곳이 지구라느니 그런 것은 빼고 설명하느라 매우 힘들었지만, 내가 그 힘든 일을 해냈다.

[그러니까? 이곳은 일종의 감옥이로군요?]

“맞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런 것 같아.”

스트라이더 777번 아스트라호. 광검제가 구상하고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마법의 극의를 관통하여 만들어낸 이공간은 광검제가 살았던 세상에서 가장 악독했던 인간들을 영원히 고통받게 만드는 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제국의 마법사들은 그곳의 법칙을 뒤틀어 누구도 빠져나가기 힘든 던전으로 변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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