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다시 찾은 능력
하늘 높이 신호 마법을 쏴서 정찰 나갔던 대원들을 불러 모으고 흔적을 발견한 기사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에는 전투의 흔적과 더불어 다수의 사람이 머물렀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많이 줄어든 모양이구나.”
스승님이 흔적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셨다. 말 그대로였다. 5천명의 사람이 머물렀다기엔 모자란 흔적이었다.
“최소한 식량문제는 없겠군요.”
냉정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입이 줄어든 만큼 우려했던 식량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였다. 마법사들에게 얼마나 지난 흔적인지 알아보라고 했더니 3일 정도 지난 흔적이라는 답변이 나왔다.
“그럼 아주 멀리 있진 않았다는 얘기인데···.”
스승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고든 바이런 후작이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비록 만나서 한번 대련을 한 것에 불과한 타국의 기사이지만 같은 길을 걷는 무인으로서 뭔가 통한 것처럼 보였다.
그냥 보기에도 성향이 아주 비슷한 두 사람이었다. 충분히 이해한다. 신기하게도 친해지는 것에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나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그럼 흔적을 쫓아가기로 하지요. 그리 멀리 있진 않을 겁니다.”
“그러자꾸나.”
제멜아크의 왕세자를 살려서 나가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여태까지는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어서 던전 공략을 최우선으로 삼았지만, 흔적을 찾은 이상 굳이 외면할 필요는 없었다.
주변을 탐색할 시간을 줄이고 우리는 흔적을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전원이 기사와 마법사로 이루어진 소수의 인원이다. 마음먹고 속도를 내면 꽤 빠른 속도로 이동이 가능하다.
그러나 잠시 달린 것으로 3일의 차이를 따라잡는 것은 무리였는지 해가 지기 시작했다. 일단 오늘 방어전을 치를 준비를 해야 했다.
근처의 빌딩에 자리를 잡고 식사와 짧은 수면을 하며 방어전을 준비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의 밤손님들이 저편의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상대했지만, 이 군인들의 원래 임무는 뭐였을까? 죄인들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하는 감수? 아니면 이 텅텅 비어있는 평화로운 서울의 주민이었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지금은 상관없는 이야기고 오늘 밤의 웨이브를 막아내려고 움직이려는 순간 저 멀리서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희미하게 들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의 청력으로는 들리지 않은 것 같고 나만 들은 모양이다.
어떻게 들어도 사람의 소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제멜아크 공략 대쪽에서 난 소리인데 저런 소리를 낼 만한 존재를 생각해본다면 하나뿐이었다.
사제 놈이 데리고 들어온 반마가 본모습을 드러낸 모양이다. 반마가 밤손님들을 상대한다면 원래 제멜아크 공략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제멜아크 공략대와 사제가 이끄는 마신교쪽이 갈라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것이고 지금 당장은 저쪽에서 자리를 잡고 기관총을 쏘고 있는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밤의 전투는 생각보다 쉽게 끝났다. 기사들도 사망자가 나와서 그런 것인지 집중하고 있었고 화약 무기를 상대하는 것에 익숙해진 마법사부대의 지원을 등에 업고 순식간에 전투가 끝났다.
적들의 화력은 전보다 올라갔지만, 오늘은 다행히 경상자조차 나오지 않았다. 우리의 전투는 끝났지만 제멜아크 공략대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수의 중화기가 내는 소음이 들리고 있었다. 이것은 나뿐만 아니라 청각이 좋은 사람들에게도 들리고 있었다.
“그리 멀진 않구나.”
“네, 그런데···.”
나는 조금 전에 들렸던 반마의 울음소리에 대해 스승님에게 말씀드렸다.
“어쩌시겠습니까?”
저쪽이 마신교만 따로 떨어져 나온 인원이라면 굳이 지금 만나지 않아도 된다. 던전을 공략하고 밖으로 나갔을 때 저것들을 상대해줄 인류 최강의 괴물 둘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 스승님은 긴 고심 끝에 답을 내셨다.
“너와 나만 한번 정찰을 해보자꾸나. 우리 둘이라면 모습을 감추는 것은 쉽지 않으냐?”
“알겠습니다.”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정찰해서 붙어볼 만 하다면 이곳에서 사제를 제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스승님과 나는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수뇌부들에게 알리고 둘이서만 정찰을 떠났다. 스승님은 평소에 잠이 많은 편이지만 7성 기사야 하루 이틀 잠을 자지 않는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의 밤이지만 그런 것은 우리에게 큰 장애가 되진 않았다. 흔적을 따라서 빠르게 달려가자 대충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알 것 같았다.
제멜아크 공략대가 이동한 방향의 이정표에는 경지대학교라고 적혀있었다.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해도 대인원이 머물만한 곳으로 대학 캠퍼스는 맞춤에 가까웠다.
내가 살았던 지구에서는 대학의 이름이 저것과는 달랐지만, 그 외에는 모든 것이 똑같았다.
내가 서울에 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서울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이 대학은 전생의 나와 작은 인연이 있던 곳이다.
워낙 오래전이다 보니 금방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대학 입구를 지나치면서 대문을 보니 아주 오래된 서랍장에서 찾아낸 옛날 물건 같은 기억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좋아했던 여자아이가 이 대학에 진학했었다. 군대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얼굴 한번 보겠다고 학교 앞에서 무작정 기다렸었다. 그런데 막상 그 아이가 나타났을 땐 나는 그 아이 앞에 나서지 얼굴 한번 봤으니 됐다고 자신을 달래며 뒤돌아섰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참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냥 앞에 가서 오랜만이야라고 하면서 한마디 말을 걸어보는 게 그렇게 어려웠을까? 그 후로 그 아이를 다시 볼 기회는 영원히 없었다.
그런 기억을 떠올리며 스승님과 함께 대학교의 높은 담을 뛰어넘자 저 멀리 여기저기 불을 피워놓고 천막을 세워놓은 제멜아크 공략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숫자가 많이 줄진 않았구나?”
스승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내가 볼 때는 충분히 많이 줄어든 것 같았다. 천막의 개수로 대충 짐작해보건대 천명이 좀 넘을까? 그렇다면 무려 4천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다.
아직 바쁘게 움직이며 전투의 뒤처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었는데 전투가 끝나고 원래 사람 모습으로 돌아가서 그런지 외모로 반마를 구별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천막이 지어진 곳 한가운데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명령을 내리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왕세자가 살아있군요. 저기 고든 바이런 후작도 보입니다.”
“그건 다행이구나.”
“그건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일까요. 마신교과 손을 잡은 것인지 아니면 윌리암 와일러스에게 저 두 사람도 조종당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마신교와 떨어져 있었다면 더 쉬웠을 것이다. 무시하거나 다 죽이면 되니까. 이렇게 섞여 있으니 일이 복잡해졌다.
적당히 몸을 숨기고 지켜봤지만, 사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든 바이런 후작이 왜 움직이지 못했는지 알 것 같군요.”
“그렇구나. 저렇게 섞여 있다면 혼자서 몸을 빼기가 어렵겠지.”
제물로 쓰기 위해 데리고 들어왔던 병사들은 거의 다 사망한 것 같지만 정예 병사나 기사단은 여전히 많이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왕세자 때문에 고든 바이런 후작이 마음대로 몸을 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만 돌아가서 일행들과 상의를 해볼까요?”
정찰의 목적은 달성했고 왕세자와 바이런 후작이 살아있는 것도 확인했다. 남은 것은 저들과 합류할지 아닐지를 결정해야 했다.
결정권자는 여전히 스승님이지만 이런 중요한 문제를 통보하듯이 명령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러자꾸나.”
쪼그리고 앉아있던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스승님의 좌측에서 무언가가 불쑥 나타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스승님과 내가 거의 동시에 반사적으로 출수했다.
스각! 스컥!
원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몰라도 갑자기 나타난 것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타나자마자 사람이었던 것이 되고 말았다. 깔끔하게 삼등분이 된 것을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세 토막이 난 녀석이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반마···.”
스승님이 말하기가 무섭게 가슴 위로 잘린 녀석이 큰 소리를 질렀다.
“칩입자다아아아!”
하지만 그 소리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내 검이 이번엔 녀석의 머리를 세로로 쪼개버렸으니까.
‘제길 영체화인가?’
아무리 나라고 해도 멀리서 영체화를 쓰고 움직이는 녀석을 감지할 수는 없었다. 이런 녀석을 순찰로 쓸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미 늦었고 초감각으로 감지되는 범위 내에 여러 개의 움직임이 잡히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뒤따라 들어오는 우리를 경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이미 조각난 녀석을 계속 검으로 조각내 확실히 목숨을 끊어놓았다. 그리고 예전에 사라졌던 반쪽짜리 영체화를 다시 얻을 수 있었다.
사라진 것을 몇번이나 아쉬워했을 만큼 영체화는 아주 유용한 능력이다. 이것이 다시 생긴 것은 좋은 일이나 이미 우리 존재를 들켜버린 것이 문제였다.
“어떻게 할까요?”
도망가려고 한다면 충분히 도망갈 수 있다. 여태까지 내가 만나본 반마들의 전투력은 그렇게 인상적이진 않았다.
“한번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도록 하자. 무작정 싸우자고 한다면 적당히 피해를 주고 물러나면 되겠지. 어차피 우리는 소수가 아니냐?”
우리는 공략대는 소수다. 제멜아크 공략대가 전부 마신교의 손에 들어갔다고 한다면 전면전은 바보 같은 짓이다. 게릴라전을 택할 수밖에 없다.
순식간에 주변에서 기척이 늘어나 지금은 수십명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나 섣불리 공격해오진 않았다.
“우리는 라이브러쉬 왕국의 공략대다. 그쪽에 있는 것 알고 있으니까. 나와서 얘기를 해라.”
조금 시간이 지나자 저쪽에서 기사의 갑옷을 입고 있는 사내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한눈에 보기에도 긴장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7성 기사가 마음만 먹는다면 조금 전처럼 반마 하나 죽이는 것은 무척이나 쉬운 일이다.
“제멜아크 근위기사단의 레오 폴입니다.”
기사는 우리 앞에 나타나 간단한 예를 취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폴 경. 우리를 왕세자 전하께 안내해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어렵습니다.”
진짜 근위기사단의 기사라면 이런 대답이 나올 리는 없었다. 역시 이놈도 반마다.
“그럼 윌리암 와일러스 아니, 사제에게 안내해줄 수는 있겠습니까?”
내 말에 레오 폴이라는 기사는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일단 의사를 전달해보겠습니다.”
레오 폴이 뒤를 돌아 턱짓을 하자 근처에서 감지됐던 인원 하나가 굉장히 빠른 속력으로 야영지를 향해 달려갔다.
저것도 보통 기사의 속도라곤 볼 수 없었다. 신체 강화 능력자인 것 같았다.
“폴 경, 당신과 같은 사람이 이곳에 얼마나 있습니까?”
“그것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근위기사에 오른 뒤 반마가 된 것인지 반마가 된 후 근위기사가 된 것인지 몰라도 레오 폴은 절도 있으면서 딱딱한 전형적인 기사처럼 우리를 대했다.
차라리 여기서 다 죽이고 능력을 흡수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왕세자가 인질처럼 잡혀있는 형국인 것 같지만, 고든 바이런 후작이 어떻게든 지켜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하기 전에 답변이 돌아왔다. 달려갔을 때처럼 엄청난 속도로 돌아온 녀석이 레오 벨의 곁에 멈춰서서 귓속말을 전했다.
지금 보니 단순한 신체 강화가 아니라 뭔가 속도에 관련된 능력인 것 같았다. 저것도 탐이 나는 능력이다. 저 능력을 얻는다면 지글러 후작 방식의 검술을 구현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안으로 안내해드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왕세자 전하께 안내해드리지요.”
“알겠습니다.”
사제는 만나주지 않는 건가? 그다지 기대하지 않기는 했다. 그런데 왕세자를 만나게 해준다는 것은 또 의외의 일이었다.
스승님과 나는 반마 수십 명의 호위 아닌 호위를 받으며 천천히 야영지인 대학 캠퍼스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야영지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니 의외로 좋은 점이 있었다. 우리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인간들을 감지하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인간들을 반마라고 가정하면 마신교의 전력을 대충 계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전히 밖으로 나와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있던 왕세자가 다가오는 우리를 보고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왕세자의 바로 옆에 있던 고든 바이런 후작도 놀랍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