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36화 (136/206)

136. 한시적 동맹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내 실책입니다. 이런 곳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누가 이런 곳을 예상했겠습니까? 완전히 다른 세상인 것을요.”

스승님과 왕세자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니 왕세자는 멀쩡했다. 최소한 사제에게 정신 조종을 받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보다 마신교와는 어떻게 된 일입니까?”

조금 길었던 인사치레가 오라고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모두 내 잘못입니다.”

왕세자는 깊이 자책하는 것처럼 보였고 의욕이 없어보였다. 평생 실패가 없는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조금 실망스러웠다. 나에게는 왕세자가 온실 속에서 자라다가 인생에서 처음 만난 벽에 좌절한 애송이처럼 보였다.

왕세자가 스스로 만들어낸 좌절의 늪에 빠지자 옆에서 지켜보던 고든 바이런 후작이 나섰다.

“밤마다 정체 모를 것들로부터 공격을 받는 것은 브라스 백작도 알고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도 매일 습격을 막아내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정예가 아닌 숫자가 많은 터라 피해가 막심했습니다.”

예상한 일이었다. 기사라면 모를까. 훈련 조금 한 일반 병사로는 현대화기를 막아낼 수 없으니까.

“매일 그렇게 수백이 넘는 병사들이 죽어갔습니다. 3천명이 넘는 병사가 그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때 윌리암 와일러스가 본색을 드러내더군요.”

“그들과 맞서진 않으신 겁니까?”

“처음에는 그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윌리암 와일러스가 제안한 조건을 거절하기가 어려웠지요.”

“무슨 조건을 제안한 겁니까?”

“쉽게 설명하자면 한시적 동맹입니다.”

바이런 후작의 설명을 듣던 왕세자가 큰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불의와 타협을 해선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바이런 후작이 왕세자의 말을 이어받았다.

“싸우자고 하면 이기지 못할 것도 없었겠으나 상대의 전력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싸웠다면 이기긴 하겠으나 공멸에 가까웠겠지요. 무엇보다 밤의 공격을 윌리암 와일러스가 막아준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고요.”

확실히 반마들이라면 현대화기와 상극일 것이다. 그것은 내가 전생에 직접 확인했다. 머리가 터지고 심장이 뚫려도 죽지 않고 좀비처럼 달려드는 놈들이다.

현대의 군대는 대격변 이후에 그렇게 변이체에게 무너졌었다. 던전에 들어온지 꽤 시간이 지난 이쪽은 밤의 공격 때 중화기가 얼마나 등장하는지 몰라도 어지간한 중화기로는 반마들을 죽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본대의 피해를 막기 위해 반마들과 협력관계를 맺은 것은 분명 크게 잘못된 선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신교의 전력이 얼마나 됩니까?”

“반마가 300명 정도 됩니다.”

이곳까지 오면서 느낀 적의를 계산해보면 그것보다 많을 것 같았다. 드러난 전력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확실히 적은 숫자는 아니로군요.”

“그런 숫자가 숨어들 때까지 몰랐던 제 잘못이지요.”

반마 300명이면 확실히 적은 숫자는 아니다.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반마가 일반 기사보다는 강하다는 계산을 해야 할 것이다. 아까 본 것처럼 기사 출신의 반마도 있다.

그럼 그들을 막으려면 최소 500 명 정도의 기사가 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물론 거기에 바이런 후작이나 스승님 같은 전략 병기가 투입되면 모든 계산의 무의미해지겠지만, 윌리암 와일러스가 그것을 계산하지 않고 본색을 드러냈을 것 같지 않았다. 뭔가 한 수가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그게 어찌 바이런 후작의 탓이겠습니까. 밖에서 들은 정보에 의하면 윌리암 와일러스 그자가 사람을 조종하는 기술이 있다고 합니다. 중간 관리들을 그렇게 조종했겠지요.”

“그런 정보는 누구에게 들으셨습니까?”

“쿼런틴 피어스 공작님에게 들었습니다.”

“아!”

왕세자와 바이런 후작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런데 그분은 어디에?”

“함께 들어오시진 않았습니다.”

“어째서요?”

“던전 밖에서 아르옌 에인프라흐 공작님과 함께 대기하고 계시지요.”

“아···.”

에인프라흐 공작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돌아가는 정세를 파악했는지 왕세자의 얼굴이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그런데 바이런 후작, 혹시 안내인이라고 하는 자는 만나셨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이런 후작은 그게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결국 한 달 동안 의미 없는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다.

스승님이 막 안내인에 관한 설명을 해주려고 할 때 내가 먼저 스승님에게 신호를 주어 이야기를 멈췄다.

“무슨 일... 그렇군.”

스승님도 나보다 조금 늦게 감지하셨는지 말을 하다 멈추셨고 바이런 후작도 표정을 굳혔다.

“그가 오고 있습니다.”

무슨 일인지 몰라 눈만 굴리고 있는 왕세자를 향해 바이런 후작이 설명을 해주었다. 왕세자의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그리고 곧 윌리암 와일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무명 정도의 호위를 거느리고 나타난 윌리암 와일러스는 왕세자를 무시하고 우리 둘에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는 것은 아니지요? 윌리암 와일러스라고 합니다.”

여전히 초췌한 얼굴이었으나 자세만은 당당했다. 스무명 정도 호위가 있다고는 해도 7성 기사 둘 앞에서 저렇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역시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반갑다는 말은 하지 못하겠군.”

스승님은 짧게 대답하셨다. 윌리암 와일러스는 마치 도발하듯이 킬킬거리며 웃더니 시선을 나에게 돌렸다.

“부교주님께 말씀은 들었습니다. 빅터 하네스 공자.”

“그런가? 그런데 그거 아나? 네가 여기 들어와 있는 동안 너희 부교주 죽었다더라.”

물론 나는 부교주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도발은 도발로 갚아주는 것이 예의 아니겠는가?

“그럴 리 없다.”

도발은 생각보다 쉽게 성공했다. 윌리암 와일러스가 존댓말을 갑자기 거두고 살기를 드러냈다.

“나도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야. 하지만 검성께서 그렇다고 하더군. 윌리암 와일러스 아니 사제라고 불러줄까?”

윌리암 와일러스의 표정이 더욱 무섭게 변했다. 조금만 더 도발하면 녀석이 반마로 변하는 것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전에 들은 말로는 네가 미래를 읽는다고 하더군. 거짓말이지?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이 던전을 벌써 공략했겠지.”

나는 도발을 계속했다. 아직 안내인을 찾지 못했다는 말을 들은 후 확신한 것이다. 마신교 놈들이 미래 예지를 한다고 하던 사제는 결코 그런 능력이 없다. 나와 같이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지금 너의 비참한 죽음이 보이는구나.”

저주처럼 내뱉는 사제의 말에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동안 어떤 말로 사람들을 속여왔는지 몰라도 결국은 사이비 교주 같은 놈이다.

일단 드러난 것으로는 사람을 조종하는 능력과 사이코 메트리가 있을 것이다. 사이비 교주 노릇을 하는데 거의 완벽한 기술의 조합이다.

“그건 내가 걱정할 일이고. 괜히 행차하셨을 것 같지는 않고 할 말이 있을 텐데?”

내 말에 윌리암 와일러스는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제안할 것은 같다. 밤의 공격을 우리가 막아주지 던전을 공략하기 전까지만 힘을 합치자.”

“그건 우리가 너무 손해 같은데? 우린 이미 던전의 공략법을 찾았거든.”

윌리암 와일러스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5단계 중의 1단계를 통과했다. 그리고 밤의 공격을 아무 희생 없이 막아내고 있으니 네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열쇠가 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우리가 빠지면 제멜아크 왕국 쪽은 피해가 클 것이다.”

겨우 생각해낸 것이 제멜아크 공략대를 인질로 삼은 것인가?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멜아크 공략대는 여전히 병사들이 많이 남아있었고 매일 천이 넘는 현대의 군대와 전쟁을 치른다면 피해가 클 것이다.

이것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슬쩍 뒤의 눈치를 보니 왕세자는 곤란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왕위 계승권이 확실하게 보장된 왕세자라고 해도 이번 공략에서 실적을 내야 하는 부담이 있을 것이다. 애초에 그러기 위해서 계획된 던전 공략이었다.

그런데 제국의 유산을 너무 우습게 보고 덤빈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마신교가 끼어든 것도 문제였다.

그때 머리가 조금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윌리암 와일러스를 보니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녀석이 무언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 당했던 정신교란과 비슷한 느낌? 아무래도 그때의 반마보다는 사제가 쓰는 능력이 더 윗줄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정신교란인지 조종인지 모를 능력이 나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것은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니 잠시 스승님과 이야기를 해봐도 괜찮겠나?”

윌리암 와일러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스승님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스승님께 부탁해 기막을 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하죠.”

“괜찮겠느냐?”

“잘하면 쉽게 이용해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스승님에게 계획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복잡한 계획은 아니었다. 다음 거점을 찾아 그곳의 안내인과 처단자를 마신교 쪽에 떠넘기는 것이다.

각 거점의 난이도가 같다고 하면 다음에도 7성 기 사 이상의 힘을 가진 처단자가 나타날 것이고 그것을 막으려면 많은 반마를 잃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계속 통하겠느냐?”

“한 번만 통한다고 해도 전력을 많이 깎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쁘지 않은 계획이다.”

스승님의 동의를 얻은 나는 돌아와서 윌리암 와일러스에게 답을 주었다.

“좋다. 받아들이도록 하지. 대신 길잡이는 우리가 맡도록 하지. 우리는 던전 공략법을 알고 있으니까. 동의하겠지?”

“동의한다.”

“다만 찾아야 하는 곳을 정확히 알고 있지는 않아. 허탕을 많이 칠 수도 있어. 우리도 일부러 시간을 끌 이유는 없으니까. 그것은 이해하겠지?”

거점이 될만한 곳을 여러 곳 짐작하고는 있지만 맞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이해한다.”

윌리암 와일러스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교란이 나에게 통했는지 아닌지 확신이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어차피 녀석의 뜻대로 한시적 동맹이 이루어졌으니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녀석은 이곳의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상당한 전력을 이끌고 던전 공략에 참여했다. 그렇지만 이곳에선 다른 던전과 다르게 물건에선 기억을 읽을 수 없으니 녀석 입장에서는 막막했을 것이다.

“좋아. 그럼 한시적 동맹인가? 잘 부탁해.”

내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윌리암 와일러스는 돌아갔다. 스승님을 남겨두고 나는 홀로 라이브러쉬 공략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일행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공략대를 합류시켰다.

드디어 하나가 된 두개의 공략대는 다음 날 아침 곧바로 경지대학교 캠퍼스를 벗어나 국방부를 향했다.

천 명이 넘는 인원이었지만 행군 속도는 크게 느려지지 않았다. 쓸데없는 정찰이 줄어든 까닭이었다.

밤의 습격은 약속대로 반마들이 막아냈다. 우리가 만났던 군대와는 다르게 확실히 중화기가 많이 보였지만 현대화기는 반마들에게는 크게 위협적인 것은 아니었다.

공격을 막아내는 반마들을 보며 나는 군침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얻는다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능력들이 수십 개가 보였다. 미친 듯이 날뛰며 군인들을 학살하는 반마들이 뷔페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반마들의 능력은 확실히 뛰어났다. 변이체의 신체적인 능력을 제외하더라도 기본적인 실력이 어지간한 기사들보다 윗줄처럼 느껴졌다. 이것은 꽤 오랫동안 준비한 전력이 틀림없었다.

방어전에 참가하거나 눈에 띄게 활동하는 반마는 바이런 후작의 말대로 약 300명이었지만, 야영지를 살펴보는 척하며 내가 따로 감지한 느낌으로는 최하 200명 정도가 더 있었다.

만약 전면전을 치른다고 계산할 때 스승님과 바이런 후작을 빼고 계산하면 거의 양패구상에 가까운 결과가 나올 것 같았다.

확실히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그러나 이쪽에 7성 기사라는 무시무시한 전략 병기가 둘이나 있음에도 당당하게 행동하는 사제를 보면 뭔가 숨기고 있는 전력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틀 만에 국방부에 도착했다. 새롭게 구성된 수뇌부들만 내부 탐색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새로운 안내인을 찾을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여러분 환영합니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맞이하듯이 과장된 동작으로 우리를 반기는 사람을 보고 나는 속으로 이런 말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형이 왜 거기서 나와?’

아는 사람이었다. 물론 사적으로 알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이 사람은 국방부와 아무 관계도 없을뿐더러 악인도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살던 지구에서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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