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손님의 정체
정성화, 내 기억으로는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이 사람은 군인도 아니었고 전생에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왜 이 사람의 이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느냐면 꽤 유명한 사람이었고 나와도 조금은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성화는 과학자이자 사업가였다. 바이오 로보틱스 분야에서 획기적인 기술을 개발했다고 발표하며 전 세계를 들썩이게 했고 그가 대표로 있던 회사의 주가는 100배가 넘게 올랐다.
그런데 그것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은 걸리는 데는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내부자의 폭로로 그가 개발했다는 모든 기술은 이론상으로만 존재하고 현대기술로는 아니 정확히는 물리학적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며 정성화는 구속되고 회사는 몇개월 버티지 못하고 구속이 되었었다.
나와는 무슨 관련이 있냐 하면 그 회사의 주식에 뒤늦게 발을 담갔다가 피를 봤기 때문이다. 그때를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이 개새끼”
“무슨 말씀이신지?”
확실히 대격변 후에 죄를 짓진 않았지만, 이놈은 나쁜 놈이다. 천번 만번 죽어도 싼 놈이다.
그런데 이놈이 왜 여기에 있을까? 설마 광검제도 주식 폭락으로 손해를 본 것은 아니겠지?
“질문 하나만 하지”
“무엇이든지 물어보십시오.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대답해드리죠.”
“인조인간 군인을 만든 게 너인가?”
“물론입니다. 제 최고 업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정확히는 바이오로이드지요.”
역시 그렇다. 내가 살던 지구에서 내부 폭로자가 말하길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기술이라고 했었다.
“포탈이 나타난 이후에 만든 것이겠고?”
“그렇지요. 전에는 실현 불가능한 기술이었으니까요.”
현대 물리학으로 실현 불가능했던 것을 저쪽 세계의 대격변 이후 초능력을 얻은 생존자들을 힘을 이용해 만들었을 것이다.
내가 살았던 지구와 다르게 저쪽 세상은 결국 인간이 이긴 세상이니까. 처음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나중엔 그것을 연구할 시간이 주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있다는 것은 이놈이 무언가 큰 죄를 지었다는 이야기다. 대통령은 변절자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이놈은 무슨 죽을죄를 지었을까?
“너는 무슨 죄를 지었지?”
“하하! 죄라니요. 제가 만들어낸 바이오로이드로 얼마나 많은 생명을 구한 줄 아십니까? 수십만 아니 수백만은 될 겁니다. 다만 바이오로이드 군인들을 만드는데 아주 작은 희생이 필요했을 뿐이지요.”
“작은 희생이 몇 명인데?”
“다만 실험 성공률이 조금 낮아서 문제였을 뿐 정말 작은 희생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성공률이 얼마인데?”
“3퍼센트나 됩니다. 하지만 그건 사소한 문제일 뿐이지요. 바이오로이드 군인은 어지간한 S급 각성자와 비슷한 힘을 가지니까요. 거기에 고통도 공포도 느끼지 않고 피로도 느끼지 않으니 얼마든지 전투에 투입할 수 있고요.”
영화에서나 나오던 슈퍼 군인을 만든 모양이다. 그런데 성공률이 3퍼센트라... 대충 33명 중의 한명만 성공하고 나머지는 죽었다는 얘기 아닌가?
바이오로이드를 몇 명이나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10명만 만들었어도 320명이 실험 중에 죽었다는 말이 된다.
그것만으로도 이 무한 지옥에 들어올 자격은 충분한 것 같은데 뭔가 모자란 느낌이 들었다.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하지만 더 자세한 사정은 별로 듣고 싶지 않았고 주위에 지켜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여기 이놈이 안내자입니다.”
“이놈이라니요. 정성화라고 합니다.”
내 말에 정성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정중히 자신을 소개했다.
“정말 사람 같군. 확실히 우리 세계의 사람 같진 않지만 말이야. 그런데 빅터 자네는 대화가 아주 자연스럽군.”
왕세자가 정성화를 보고 감탄하며 한편으로 나에게 조금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전에 만났던 안내자가 말이 많았던 녀석이라서요. 다음 안내자를 찾는데 단서를 얻을까 해서 이야기를 좀 길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그런 이유라면 얼마든지 해도 괜찮네.”
왕세자가 손사래를 쳤다. 왕세자 입장에선 지금 나를 돕지는 못할망정 의심해서 얻을 것이 전혀 없었다. 나는 왕세자의 의심을 잘라낸 뒤 시선을 같이 들어와 있던 윌리암 와일러스에게 돌렸다.
“이 다음은 알아서 해라. 우리는 이만 나가지요.”
“뭐?”
윌리암 와일러스가 갑작스러운 내 말에 표정이 굳었다.
“이 안내인을 도우면 열쇠를 얻을 수 있지. 그렇지 않나?”
“물론입니다. 저는 그러기 위해서 존재하니까요.”
혹시 다를까 했지만, 역시나 대통령과 같은 패턴이었다. 정성화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윌리암 와일러스의 표정이 풀렸다.
“나는 누구와 달리 한번 한 약속은 지킨다.”
그렇게 말을 남기고 나는 정성화와 윌리암 와일러스만을 남긴 채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밖으로 나오자 왕세자가 말을 꺼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열쇠가 있어야 던전 공략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럴 겁니다.”
“그런데 왜 저자에게 그 기회를 넘겨주나?”
“상관없지 않습니까? 누가 공략을 하든 간에 던전을 끝낼 수만 있다면 말이지요.”
“그렇기는 한데···.”
“밖에 누가 대기하고 있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희는 그냥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아···!”
원래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말이 있다. 엄밀히 따지면 왕세자도 완전한 아군은 아니지만, 이런 연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는 말을 누군가 들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분명히 듣고 있을 것이다.
변이체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반마가 수백이다. 그중 청력이 좋은 놈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알게 모르게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능력을 사용해 우리 모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대화를 듣고 윌리암 와일러스는 던전 밖으로 나가서 두 괴물을 피해 도망갈 계획을 이미 짜놓고 있을 터였다.
지난번에 나는 안에 있었기 때문에 인조인간이 어떤 식으로 나타났는지 몰라 스승님에게 인조인간이 나타났던 방식을 묻고 그에 맞춰서 야영지를 배치하도록 건의했다.
그렇게 국방부 청사의 담 쪽으로 최대한 붙어서 야영지가 건설되었다.
그리고 윌리암 와일러스 휘하의 반마들이 국방부 내부와 외부를 방어하듯이 배치되기 시작했다. 역시 정성화의 입담에 넘어가 방어전을 치르기로 한 모양이다.
안에서 윌리암 와일러스와 정성화가 우리가 나간 후에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모르겠지만, 윌리암 와일러스가 나처럼 지구 출신이 아닌 다음에야 정성화에게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밤이 찾아왔다. 이번에도 또 인조인간이 나오는 것일까? 나는 밖에서 곧 찾아올 손님을 기다렸다.
스승님에게 들은 바로는 인조인간은 청와대의 정문 쪽에서 날아왔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곳에서도 반복되었다.
굳게 닫힌 국방부 정문 위를 누군가 가볍게 뛰어넘어 달려왔다. 그것은 지글러 후작이 연상될 만큼 빠른 속도였다.
워낙 빠른 속도였기 때문에 내 눈으로도 정확히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이번 손님은 검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번 만났던 인조인간처럼 몸이 딱히 기계로 이루어진 것 같지도 않았다.
야영지를 지을 때 손님과 최대한 접촉이 없도록 배치했기 때문에 공략대의 기사와 병사들이 무언가 나타났다고 생각할 때쯤 이미 손님은 국방부 건물 앞에 도착해 있었다.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신체 능력이 좋은 수십의 반마들이 반사적으로 손님을 막으려고 달려들었다. 덕분에 손님이 속도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손님을 모습이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무척이나 놀라서 머리가 쭈뼛하게 곤두설 정도였다. 나는 또 한 번 이 말을 떠올려야만 했다.
‘형이 거기서 왜 나와?’
그러나 이번엔 그냥 유행어가 아니었다. 인조인간이 아니다. 그리고 정말 아는 사람이었다.
손님이 손에 든 검이 춤을 춘다. 지글러 후작의 고속검에 절대 뒤지지 않는 엄청난 속도의 참격이었다. 달려들던 반마 몇 마리가 찰나의 시간에 수십 토막이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그 모습을 본 수십의 반마들이 멈추거나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반마가 아직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때의 문제다. 인간의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 보니 반마가 되기 전의 정신력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손님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번엔 원거리 능력을 가지고 있는 반마들이 공격을 퍼부었다.
쏟아지는 수십 가지의 원거리 공격을 손님은 피하거나 검으로 쳐냈다.
“검술이 정교하진 않지만, 신체적 능력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구나. 딱히 오러를 사용하지도 않는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저 사람이 쓰는 검술이 마치···.”
옆에서 같이 구경하고 계시던 스승님이 끝에 말을 삼키셨다. 나는 스승님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셨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너를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하구나.’
스승님이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나도 안다. 왜냐하면 저 사람에게 배운 검술이 맞으니까.
손님의 정체는 바로 김경식이었다. 나에게 검술을 가르쳐주고 밀려드는 수백의 변이체를 홀로 막아내다가 사망했던 김경식이었다.
그런데 저쪽 지구의 김경식은 내가 알던 김경식보다 수십 배는 강해 보였다. 비록 입구에서 막히고 있지만 김경식은 자신의 앞길을 막는 반마들의 숫자를 확실히 줄이고 있었다.
잠시 동안 벌써 쓰러진 반마만 해도 30마리가 넘었다. 대충 베어 넘기는 것도 아니다. 저 김경식은 마치 변이체를 상대하듯이 변이체를 확실히 죽이고 있었다.
“굉장하군.”
조용히 감상하고 있던 바이런 후작도 감탄을 뱉어냈다. 순수하게 무인으로서 감탄한 것이다.
“뭣들 하고 있나? 모두 변이를 시작해라!”
반마 중에서 중간 간부 정도로 보이는 놈이 혼란에 빠진 반마들의 뒤에서 소리를 지르며 독려하자 드디어 반마들이 변이체로 변하기 시작했다.
싸움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인간 모습을 때와 변이체로 변한 반마의 전투 능력은 크게 차이가 난다. 그러나 나는 반마들이 일제히 변이하는 순간에 김경식의 얼굴을 보았다.
김경식은 웃고 있었다. 그것도 한쪽 입꼬리만 살짝 올려서 비웃고 있었다. 나는 김경식이 저런 웃음을 지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허어!”
“힘을 숨기고 있었나?”
스승님과 바이런 후작이 동시에 탄성을 내질렀다. 반마들 때문이 아니다. 김경식이 진짜 실력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김경식의 검에 검기가 맺혀있었다.
괴물로 변한 백 마리가 넘는 변이체 사이에서 김경식은 마치 양 떼 속의 늑대처럼 날뛰고 있었다. 김경식이 지나가는 곳에 변이체의 토막 난 시체만이 남았다.
시체의 숫자가 반마들이 변이를 하기 전보다 더 빠르게 증가하고 시작했다. 지난 생에 보았던 김경식은 마치 신처럼 보일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지만, 지금 다시 보니 무인으로서 완성도가 높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강하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저쪽 세상의 김경식은 정말 잘 싸웠다. 단순히 빠르고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검술도 내게 알려줬던 바로 그 검술이다.
“검귀로구나.”
스승님의 입에서 얼마 전에 국왕에게 들었던 말이 나왔다.
“맞소. 저자는 타고난 싸움꾼인 것 같군.”
바이런 후작도 스승님의 말에 동의했다. 괴물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있음에도 김경식의 얼굴은 즐거워 보였다.
내가 아는 김경식은 저렇게 싸움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저쪽 세계의 김경식은 아무래도 내가 아는 김경식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백이 넘는 숫자의 반마들이 김경식에게 모두 당한 지 오래이지만, 김경식이 상대하고 있는 적의 숫자는 크게 줄지 않았다.
국방부 내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반마들이 계속 밖으로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공략대 사이에서 숨어있는 반마들이 많이 있다고 해도 벌써 백이 넘게 당했다. 500 명 남짓한 마신교의 전력을 생각하면 5분의 1이 당한 셈이다.
역시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는지 무언가 조치가 이뤄졌다.
“비켜라!”
큰 소리와 함께 반마들이 갈라지며 안에서 조금 익숙한 인물들 세 명이 나타났다. 늘 윌리암 와일러스의 근처에서 호위를 서고 있는 스무명에 속해있던 인물들이었다.
피해가 커지자 이제 진짜 전력을 꺼내놓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