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41화 (141/206)

141. 하지 못했던 말

“무슨 말씀이신지? 저를 지키지 못하면 열쇠를 얻지 못합니다.”

정성화는 뻔뻔하게 나에게도 거짓말을 하려 했지만, 이미 이곳의 시스템을 알고 있는 나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런 개수작이 통하는 건 전생에 한 번으로 충분해”

정성화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나는 곧바로 정성화를 목을 치기 위해 다가갔다. 그런데 정성화는 대통령처럼 불안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만만한 모습이었다.

“저를 죽이실 생각이시군요?”

“그래, 얌전히 열쇠를 내놔.”

“대단하시군요. 그것을 어떻게 알아차리신 거지요?”

“그건 네가 알 바 아니지.”

지나치게 여유롭다. 실제 인간이 아니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대통령이 괴물로 변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놈도 뭔가 믿고 있는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경계를 늦추진 않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성화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기계음을 내며 변신하기 시작했다.

“제가 누군지 잊으신 겁니까? 바이오로이드의 개발자입니다.”

변신하는 틈을 노릴 것도 없이 정성화의 변신은 대단히 빠르게 이뤄졌다. 지난번 만났던 인조인간처럼 양팔과 다리의 옷과 피부가 찢겨나가며 금속성의 몸이 드러났다. 그리고 곧바로 주먹을 날려왔다.

동작을 읽었음에도 피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일격이었다.

쾅!

정성화가 뻗은 주먹이 아스트로퍼의 방패를 강타했다. 단 한 번의 공격이었지만, 정성화의 힘을 알아보는 데는 충분했다.

위력은 지난번 보았던 인조인간 군인의 이상이다. 아스트로퍼의 방패가 움푹 찌그러지며 반동이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나는 그대로 튕겨 나가 벽에 부딪혔다.

벽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강하게 부딪히며 큰 충격을 받았다. 전생의 나였다면 이것만으로도 즉사를 피할 수 없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버틸 수 있는 초인의 영역에 한발을 걸친 사람이다.

“나를 감당할 수 있겠어?”

표정과 말투가 갑자기 바뀐 정성화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마도 저것이 진짜 정성화의 모습일 것이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일격에 실린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쉬울 것 같진 않지만, 최소한 스승님이나 누군가 도착할 때까지 버티는 것은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와 정성화가 서로를 향해 동시에 몸을 날렸다. 일격에 실린 힘은 정성화가 위다. 조금 전에는 경계했다고는 해도 정성화의 힘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에 공격을 허용했지만, 알고 있는 이상 굳이 그것을 막아낼 필요는 없었다.

특별히 체술이나 권법 같은 것을 배운 움직임은 아니다. 순수하게 육체 능력만을 이용한 공격이었다.

그래서 공격 경로가 정직하다. 상대가 마수나 변이체라면 모를까.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을 방법이다. 그러나 가진 힘 자체가 워낙 대단하기에 상대하기가 쉽지 않다.

속사포 같은 주먹과 발차기가 퍼부어진다. 그러나 눈에 경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최소한의 회피로 닿을 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리고 간간히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찔러넣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삼류 무인이나 건달들이 제대로 배운 무인들과 싸울 때 차이가 나는 것은 공격이 아니라 방어다. 눈먼 칼이라도 제대로 찔리면 죽는다. 그러니 공격은 쉽지만, 칼을 막아내는 방법은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흉내도 내지 못한다.

팅! 팅!

힘을 싣지 않고 살짝살짝 찔러넣는 검이 계속 튕겨 나온다. 정성화의 몸 대부분이 기계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빈틈은 있다. 이미 몇군데 사람의 몸으로 이루어진 곳을 체크했다.

“이이익!”

퍼붓는 공격이 적중하는 것이 하나도 없자 약이 올랐는지 정성화가 시뻘게진 얼굴로 더욱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집중은 끊어지지 않았다. 나는 지금 성장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음에도 조금 여유를 가지고 상대하고 있었다.

정성화의 온몸이 피 칠갑으로 변하고 있었다. 사람의 몸으로 이루어진 곳을 체크하기 위해 깊게 찌르지 않았다고 해도 엄연히 손가락 한 마디 정도씩은 검이 들어갔다 나오고 있었다. 치명상은 아니라고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상처다.

바이오로이드도 출혈로 죽을까?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과다 출혈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바이오로이드라고 부르지 않고 기계라고 불렀을 것이다.

정성화가 바이오로이드의 개발자니, 뭐니 해도 절대 무적은 아니다. 김경식이 처단자로 지정되어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뻔한 공격패턴이 슬슬 질리기 시작한다. 빠르고 힘이 있긴 하지만 그뿐이다. 틈을 보일 때마다 찔러넣는 검이 더 깊어지기 시작했다.

슈바르거트는 정성화에게서는 에너지를 빼앗아 오지 못했다. 정성화가 실제 생명체가 아니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슈바르거트는 변이체나 반마에게만 힘을 발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성화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지기 시작했다. 역시 반 정도는 기계라고 해도 나머지는 인간의 신체를 가지고 있고 중요한 부위는 금속으로 방어했지만, 과다출혈을 막아낼 방법은 없었다.

역할이 바뀌었다. 이제는 일방적으로 내가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황은 좀 전과 많이 달랐다. 가뜩이나 방어에는 취약한 모습을 보였는데 움직임마저 느려진 정성화는 제대로 된 방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슈바르거트는 독사의 혓바닥처럼 움직여 정성화의 약점만을 골라서 후벼파기 시작했다.

치명적인 급소를 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신에 걸쳐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상처가 누적된 정성화는 실제로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성화의 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움직임이 둔해졌다.

“자, 잠깐! 멈춰”

그래도 아직 입은 꽤 자유롭게 움직이는 모양이다. 정성화가 팔을 앞으로 내밀며 멈추라는 시늉을 했다.

“얌전히 죽지 그래? 어차피 영원히 죽는 것도 아니잖아?”

어차피 내일이면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다시 김경식에게 죽을 것이다. 무한한 형벌을 만들어낸 광검제에게 박수라도 쳐주고 싶을 정도다.

“너는 이 던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우리를 죽이고 열쇠를 얻는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럼 뭐가 있지?”

“날 살려준다고 약속하면 알려주지.”

정성화의 얼굴에 비열한 미소가 떠올랐다.

“약속한다. 말해봐.”

“열쇠만 모아서는 소용없다. 열쇠를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안내자가 있어야 한다. 그 안내자가 바로 나다.”

“그렇다면 오늘 너를 죽이고 내일의 너에게 부탁해도 되는 것 아닌가?”

“아니야. 저 밖의 김경식을 같이 죽여야 한다. 열쇠 말고 다른 것도 필요해. 너는 어딘가를 이미 다녀온 거지? 어디를 먼저 방문했나?”

“청와대.”

“청와대? 그 변절자 놈을 죽이고 왔겠군. 죽어도 싼 놈이지. 나는 그놈과는 다르다. 내가 개발한 바이오로이드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했는지 아는가? 그래서 나에게 열쇠를 결합할 수 있는 기능이 더 있는 거다.”

정성화가 주절주절 정보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럼 다른 안내자들은 어디에 있지?”

“삼성동 SV그룹 본사, 서초동 국정원, 마천동 천마초등학교다.”

“유용한 정보로군.”

말 그대로 좋은 정보였다. 굳이 다른 곳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어졌다. SV그룹 본사와 서초동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곳이지만, 천마 초등학교라는 곳은 처음 들어보는 곳이다. 하지만 짐작은 간다. 초등학교인데 무한히 죽어야 할 악당이 있다면 대충 그려지는 그림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너도 모르는 것이 있다.”

“뭐냐?”

“나는 사람을 잘 믿지 않아.”

푹!

무방비 상태로 있던 정성화의 심장에 검이 틀어박혔다.

“너...너!”

“사람이 아닌 것은 더 믿지 않는 편이고.”

스컥!

정성화의 목이 날아갔다.

“너에게 속는 것은 전생에 한 번으로 충분하지. 그리고 나를 부자 만들어주겠다던 약속은 네가 먼저 어겼잖아?”

“내...내가 언”

바닥을 구르던 정성화의 머리가 한 말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딴에는 제법 억울한 모양이지만, 무한히 죽을 정도로 죄를 지은 녀석에게 그런 동정은 필요 없었다.

정성화가 앞에서 한 말은 하나도 믿지 않는다. 애초에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던 인간이다.

나는 슈바르거트를 집어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수확의 시간이다. 먼저 윌리암 와일러스를 향했다. 윌리암 와일러스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모두 챙겼다. 어떤 기억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거기에 교주와 부교주에 대한 답이 있을지도 몰랐다.

물건들을 수습하며 자연스럽게 윌리암 와일러스의 시체에 손이 닿았다. 여러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던 녀석이었지만, 근본은 반마라서 완전한 변이체의 능력을 흡수할 때처럼 완전한 각성이 아닌 반 각성 같은 느낌이 전해져왔다.

놈이 가지고 있던 정신 교란 혹은 사이코메트리 어느 쪽이라도 좋았다. 모두 유용한 능력이었으니까.

그런데 흡수된 능력은 또 의외의 것이었다.

흡수된 능력은 삽입이었다.

생소한 능력이다. 변이체 중에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녀석을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다. 하지만 뭐에 쓰는 능력인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어떤 식으로 삽입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변이체의 신체 일부와 많은 사람의 생명이 필요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윌리암 와일러스는 이 능력으로 반마를 만든 거다. 아마도 본인의 이런 방식으로 여러 가지 능력을 가지게 된 모양이다.

그런데 겨우 세 가지 능력만 가지고 있던 것을 생각해보면 분명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젠장, 나한테는 쓸모없잖아.”

내가 반마를 만들어낼 것도 아니고 정말 쓸모없는 능력이었다. 실망을 잠시 뒤로 물리고 나머지 두 개의 시체도 흡수했다. 그래도 이쪽은 확정된 복권이라고 해야 할까.

감각과 신체 강화를 얻었다. 기존에 있던 초감각과 신체 강화가 조금 강해진 느낌이다. 그러나 역시 반마라서 그런지 확실히 등급이 올랐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다. 밖에서 전투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는 것은 전투가 끝났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는 것은 수백마리의 반마가 시체가 되어 뒹굴고 있다는 얘기다. 나에게는 호화뷔페나 다름없었다.

승리의 환호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일반 병사들과 기사들의 피해가 꽤 큰 것 같지만,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우리 쪽이 이겼을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들이 느껴졌다. 사람 둘과 마법 생명체 하나다. 굳이 누군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끝냈군.”

문이고 뭐고 벽들이 다 박살이 나 있어서 크게 구멍이 난 벽을 통해 들어온 사람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김경식이었다.

“예, 오늘은 제가 먼저 새치기를 좀 했습니다.”

“후우, 그렇군. 이짓도 끝날 때가 다가오는가?”

김경식이 뒹굴고 있는 정성화의 시체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끝이 나는 겁니까?”

“그렇지. 이 세상이 끝나고 나면 우리의 의무도 끝이 난다.”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던전을 공략하면 김경식을 죽이는 꼴이 되는 것이니까.

“그런 표정 지을 것은 없어, 어차피 내가 죽은 것은 알고 있으니까.”

“아, 그렇군요.”

이것도 뭐라 위로해야 할지 마땅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고맙다. 이 나쁜 놈을 매일 죽이는 것은 나쁘지 않아. 늘 새롭고 짜릿하지. 하지만 가끔씩 들어오는 사람들과 싸우는 것은 나로서는 괴로운 일이야.”

“싸우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더군.”

그것은 일종의 금제가 설정되어 있는 것인가?

“어쨌든 나를 알고 있다는 네가 이 세상을 끝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필요한 것을 챙겨야겠지?”

그렇게 말하며 김경식은 씨익 웃었다. 나는 저 웃음을 본 적이 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몰려드는 수백의 변이체를 향해 홀로 걸어가며 김경식은 저런 웃음을 지었었다.

푹!

말릴 사이도 없었다. 김경식이 검을 들어 스스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래야 그것이 나오니까. 이건 처음 해보는 건데. 쓰읍... 더럽게 아프네”

전생에 내가 만났던 김경식처럼 정말 바보같이 착한 사람이다. 그것은 다른 세계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가상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 마법 생명체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심장을 찌른 채로 말을 이어가는 김경식이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실제 생명체는 아니지만 빠르게 죽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아니 존재의 소멸이라고 해야 할까. 김경식의 몸이 흐릿해지며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주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하지 못했던 말이 생각났다. 지금이 아니면 아마 또 영원히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경식이 형”

사라져가는 김경식이 힘없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정말, 정말 고마웠습니다.”

전생에 김경식이 변이체들을 향해 달려갈 때 하지 못했던 말을 할 수 있었다. 김경식이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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