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42화 (142/206)

142. 불타오르다.

김경식과 정성화의 시체가 사라지며 국방부 건물도 원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타난 물건들이 바닥에 남았다. 정성화가 있던 자리에 나타난 것은 예상대로 열쇠 하나와 굉장히 지저분한 작은 엄지발가락이었다.

사람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일단 초록색이었고 길고 뾰족하게 다듬어진 발톱이 사람의 발가락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것도 보물인가?”

차마 손으로 잡기에도 께름칙한 느낌이 나는 것이었다. 여태까지 말없이 김경식과 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스승님과 바이런 후작도 발가락을 보고 인상을 쓰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혼자 처치한 것이지만, 이제 두 나라가 함께 있는 만큼 보물의 소유권에 대해 의논을 해봐야 했다.

“일단 자네가 가지고 있게.”

바이런 후작이 손을 흔들며 나에게 미루었다. 저 발가락을 직접 만지기 싫다는 의지가 충만해 보였다.

바이런 후작이 그렇게 말하니 일을 쉬워졌다. 혹시나 이 자리에 탐욕이 가득한 누군가가 제멜아크쪽의 대표로 있었다면 처음 물건을 가지는 순서부터 해서 굉장히 복잡해졌을지도 모른다.

혹시나 저것도 변이체의 신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발가락을 주워들었지만,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무슨 처리를 한 것인지 보기와는 달리 촉감은 아주 매끈하고 단단해서 생물의 신체였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고 김경식이 사라진 곳에 나타난 것은 주먹만한 크기의 검은색 정육면체였다.

“이것도 제가 살펴볼까요?”

“그러도록 하게”

이번에도 바이런 후작의 승인을 얻어 내가 먼저 물건을 확인했다. 그것은 크기에 비해 아주 묵직했다. 금속도 목재도 아닌 기묘한 촉감이었다.

무언가를 담은 상자인가 생각도 들었지만, 그냥 정육면체일 뿐 개봉할 수 있는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일단 눈으로 보거나 만져서 뭔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 보이는군.”

그것도 일단 챙겨 넣고 보니 밖의 상황이 궁금했다.

“피해는 얼마나 됩니까?”

스승님과 바이런 후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꽤 많은 사상자가 나왔네”

그럴 것이다. 제멜아크 쪽은 일반 병사들이 많았으니 그쪽에서 갑자기 반마들이 튀어나왔다면 사상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쪽에서도 죽은 사람은 없지만, 부상자가 꽤 많이 나왔다.”

그래도 죽은 사람이 없다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아이들은 무사하지요?”

“그래, 아이들은 모두 무사하다.”

하기야 항상 주위에 있어서 잘 느끼지 못하지만, 엄연히 6성 기사에 5 서클 마법사인 아이들이다. 어디서 맞고 다닐 실력은 아니다.

그런데 밖으로 나왔을 때 문제가 생겼다. 나오기 전부터 느낀 것이지만 국방부의 마당에 거대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뭘 저렇게 태우고 있는 거지요?”

무엇을 태우는지 이미 알고 있지만, 뇌에서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수십명의 마법사들이 거대한 시체의 산의 둘러싸고 마법으로 시체들을 불태우고 있었다.

“뭐기는 반마들의 시체를 태우고 있지 않은가? 부정한 것은 태워야 하지 이곳이 던전 안이라고 해도 달라질 것이 없네.”

바이런 후작이 설명해주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스승님을 바라봤다. 스승님이라면 사정을 알고 계실 테니 잠깐은 막아줄 수 있지 않으셨을까? 스승님은 그런 내 슬쩍 시선을 피하셨다.

“죽은 사람이 많으니 저렇게라도 뭔가 보여주는 것이 있어야. 사기가 유지되지 않겠느냐?”

이해는 하지만 아깝다.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가 날아갔다.

‘아, 내 것들인데···.“

당장이라도 달려가 불을 끄고 시체의 산을 뒹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랬다간 당장 나도 반마가 된 것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윌리암 와일러스와 김경식에게서 나온 물건의 감정을 받기 위해 스테이시에게 물건을 맡기며 슬쩍 물어봤다.

“연구용으로라도 반마의 시체 빼돌린 마법사들이 있을까?”

[아니요. 절대 없어요. 아무리 우리가 연구에 미친 마법사들이라고 해도 정도는 안다고요. 그리고 반마는 그렇게 큰 연구 가치도 없고요.]

일말의 기대했었는데 실망이었다. 이럴 때는 왜 미친 마법사 모드가 발동되지 않는 것인가.

스테이시를 만난 후엔 곧바로 왕세자를 찾아갔다. 앞으로의 일정을 정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스승님과 바이런 후작 그리고 웬일인지 우리 망나니 왕자까지 모두가 모여서 이미 이야기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이 전력으로 밤의 습격을 계속 막아낼 수 있을지 걱정이구려”

제멜아크 공략대가 이번에 입은 피해는 약 200명이 사망하고 300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래도 남은 인원이 천 명이 넘는 대인원이다.

사망보다 문제인 것이 부상자들이다. 부상자들을 데리고 이동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사망자들은 대부분 병사이었고 우리의 진짜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기사와 마법사들은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방어만 생각한다면 크게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동이 문제고 피해는 계속 누적되겠지요.”

제멜아크 공략대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린다. 괜히 윌리암 와일러스와 반마들을 처리하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아니냐는 책망이 담겨있다.

“그만! 마신교의 힘을 빌려 던전을 공략한다 해도 밖에 나가서 그것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왕세자가 그런 측근들에게 호통을 쳤다. 확실히 왕세자는 제대로 된 사람이었다. 왕세자의 호통에 제멜아크 공략대의 수뇌부들이 얼굴을 붉히며 거북이 목이 되었다.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조용히 듣고 있던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입을 열었다. 제멜아크의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왕세자의 참모다. 뭐라도 좋은 생각이 있으니 입을 열었을 것이다.

“말해보게”

“전부가 움직일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가브리엘 스피노자의 말에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난 이미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안내인이 있는 거점은 처단자만 나타나지, 이곳에 있을 때는 군인들의 공격이 없다.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

나도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먼저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반마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오늘 어떤 공격도 받지 않았습니다. 즉 이곳에 주둔하고 있을 때는 다른 공격이 없다는 것이지요.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설명을 이어갔다. 그제야 모두 뭔가 깨달은 표정이 되었다.

“오늘 나타나 함께 싸웠던 그 사람을 막아서거나 하지만 않는다면 싸움에 휘말리지 않는 한 큰 피해는 없을 겁니다.”

내가 얼른 한마디를 보탰다.

“그게 무슨 소리요?”

“제가 알아낸 이 던전의 구조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이 던전이 돌아가는 구조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영원히 매일 죽어야 하는 지옥이라는 건가?”

“죄인에게는 그야말로 최고의 형벌이군요.”

내 설명에 모두 납득하고 있었다.

“그럼 스피노자 남작의 말대로 이곳에 주둔하면 큰 피해는 없다는 게 맞는 거군?”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그럼 소수 정예만 움직여 다른 거점들을 처리하면 되는 것이 아니오?”

왕세자의 말에 다시 좌중이 입을 다물었다.

“그렇습니다. 전하”

오직 가브리엘 스피노자만이 대답했다.

“그럼 그것을 누가 맡을 것이냐 하는 것인데···.”

다시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다들 고대어라고 알고 있지만, 한국어를 통해 처단자와 말이 통하는 것은 나밖에 없었으니까.

다만 나는 제멜아크 소속이 아니기에 왕세자라고 해도 쉽게 그 일을 맡아달라고 하지 못했다.

“기꺼이 제가 그 역할을 맡겠습니다.”

내가 나서자 왕세자가 반색했다.

“그래 주겠소? 그럼 다른 인원들은 어떻게 정하는 것이 좋겠소?”

“저 혼자 하겠습니다. 그것이 편합니다.”

“아니 그래도 혼자는···.”

혼자가 편하다. 이런저런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된다. 스승님이라면 모를까. 나머지는 걸리적거리기만 할 뿐이다.

“굳이 같이 움직일 인원을 뽑으라고 하신다면 고든 바이런 후작님이나 제 스승님이 필요합니다. 두 분 모두와 함께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습니까?”

말 그대로다. 바이런 후작이 왕세자의 곁을 떠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 스승님도 발이 묶이게 된다. 함께 움직이고 있지만, 같은 국가의 소속이 아니다.

“그렇군.”

바보가 아닌 왕세자는 쉽게 이해했다. 그런데 갑자기 망나니 녀석이 나섰다.

“그렇다면 우리 라이브러쉬 공략대가 따로 움직이는 것은 어떤가?”

무슨 생각으로 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장내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했다. 이것은 우리가 알아서 해결하고 과실을 우리가 다 먹겠다는 뜻으로 들리기에 충분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저 혼자 해결하겠습니다.”

서둘러 나섰지만, 분위기가 변했다.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이 한번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 끝없이 의심하게 되어있다.

망나니가 의심을 심었고 나 홀로 움직이는 것도 던전의 보상을 독식하겠다는 것으로 들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빅터 공자가 소수의 인원일수록 움직이기 편하다고 생각하는듯하니 그렇다면 제멜아크 왕국의 대표로 제가 따라가도록 하지요.”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나섰다. 분위기가 바뀐 이상 제멜아크에서 누군가 한명은 데려가야 할 분위기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안면이 있는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낫다.

“그래 주겠는가? 빅터 하네스 공. 자네 생각은 어떤가?”

왕세자가 나를 부르는 호칭도 달라졌다.

“스피노자 남작님이라면 저도 좋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결정이 되었지만, 회의는 계속되었다. 결국 하루가 더 지나고서야 나와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나머지 안내인을 찾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괜찮겠느냐?”

“아무 생각 없이 나서진 않았습니다. 다른 안내인들이 어디 있는지도 알아냈고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겁니다.”

스승님도 홀로 떠나는 나를 걱정했지만, 오히려 나는 긴장감이 없었다.

감정을 맡긴 물건들이 돌아왔다. 윌리암 와일러스가 쓰던 물건 중에 아공간 물품에서 많은 물건이 나왔다. 이곳에서 얻은 보물들이었다. 처음부터 그것들은 내 관심 대상이 아니었고 나머지 물건들을 내가 받아낼 수 있었다.

이것들은 가지고 다니면서 짬이 나는 대로 기억을 읽어낼 생각이었다.

감정은 제멜아크의 마법사들과 함께하니 몇 배나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정육면체는 누구도 감정을 해내지 못했다. 의문의 발가락도 감정이 되었다.

[스트라이더 27번 고블린 발가락이에요.]

“뭐에 쓰는 물건인데?”

고블린이라고 하면 나에게는 익숙한 이름이다. 물론 실제로 본 적은 없는 창작물 속의 몬스터다. 아노더스에도 고블린이란 이름의 마수는 없었다.

[이건 마법이 걸린 물건이 아니에요. 감정이 되지 않아요. 이름을 알아낸 것도 제멜아크의 마법사 중에 고서적을 연구하던 사람이 알아본 것에 불과해요.]

“한마디로 뭐에 쓰는 물건인지 모른다는 소리지?”

[네]

고블린 발가락의 소유권도 왕세자가 나에게 양도했다. 내가 홀로 얻어낸 물건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별로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이라서 인심이라도 쓰자는 쪽이었던 것 같았다.

이것도 기억을 한번 읽어봐야 할 것 같았다. 분명히 이름을 붙이는데 광검제가 연관되었을 것이다.

“그럼 출발해 볼까요?”

“그럽시다.:”

성대한 환송을 받으며 가브리엘 스피노자와 나는 국방부를 떠나 던전공략에 나섰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삼성동, 서초동 그리고 마천동이다. 삼성동과 서초동은 그래도 가까운 편이지만, 마천동은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방향을 먼저 마천동 쪽으로 잡았다. 문제라면 가브리엘 스피노자는 궁금한 점이 무척이나 많았다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고대어라고 생각하고 있는 한국어를 알게 되었는지 이곳의 글자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인지 쉴새 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괴롭힘을 이겨낼 수 없어서 대충 가르쳐주었는데 놀랍게도 가브리엘 스피노자는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한글을 이해하고 더듬더듬 읽기 시작했다. 한글의 위대함을 다른 세상에 태어나고 나서야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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