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43화 (143/206)

143.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실로 효율적인 문자로군요. 연구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가브리엘 스피노자의 입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한글을 가르치니 왠지 더 귀찮아진 것 같다. 한글을 가르치니 표지판 같은 것을 더듬더듬 읽으면서 더 귀찮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상점의 간판 등에 쓰여있는 영어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최대한 질문을 줄이기 위해 속도를 제법 내고 있는데도 그렇다.

“이런 고대 문자를 독학하여 대화도 가능하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이젠 대답하기도 귀찮아서 혼자 오해를 하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고 있었다.

우리는 저녁에 잠시 식사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밤이 돼서도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소수 정예의 장점이었다.

달리는 도중에 군인 둘이 나타났지만, 둘이 하나씩 가볍게 처리하는 것으로 끝났다. 난이도가 낮아지며 보상도 낮아졌는지 나온 것은 아무 마법도 느껴지지 않는 금반지 하나였다.

“이것은 스피노자 남작님이 기념품으로 가지시죠.”

떨어진 금반지를 던져주자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밝게 웃었다. 이 정도는 횡령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수준이니 가브리엘 스피노자도 가볍게 받아들였다.

“좋은 기념품이로군요.”

밤의 습격이 끝난 이후에도 새벽까지 멈추지 않고 강행군을 하던 우리는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두 시간 정도 짧게 수면을 취했다. 습격도 방어했고 마신교도 사라진 이상 불침번도 필요 없었다.

잠에서 깨어난 우리는 간만에 불을 피워 간단한 조리를 했다. 마검사 둘이 있으니 식사 준비는 어렵지 않았으나 내 요리 실력이 문제였는데 가브리엘 스피노자는 요리도 꽤 잘했다.

“요리를 따로 배운 겁니까?”

“예, 어렸을 적에 잠시 흥미가 있어서 배운 적이 있습니다.”

나도 배운 적은 있다. 그것이 실력으로 전환이 되지 않을 뿐이다. 사람이란 게 뭐든지 배운다고 무조건 모든 분야를 잘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놈이 예외에 속한다.

팔방미인이라고 해야 할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화하면서 알게 된 것인데 제멜아크의 천재는 뭐든지 배우면 금방 일정 수준에 오르는 모양이다.

무슨 마법 소녀도 아니고 그런 게 가능한가 싶지만, 가능한 인간이 여기에 있었다.

“대단합니다.”

“저보다 더 대단한 분이 그런 말을 하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겸양을 떨었다. 당장 눈에 보인 성과는 내가 좀 있을지 몰라도 어차피 가짜 천재 아닌가.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진짜 천재들에게 밀리는 날이 올 것이다. 범재인 나는 그날을 조금이라도 늦추려면 죽도록 노력해야 한다. 너무 불공평한 일 아닌가?

물론 나에겐 다른 능력들이 조금 있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런 뻔뻔한 생각들을 하며 빠르게 이동한 우리는 날이 저물기 전에 천마 초등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는 하윽교라는 곳이군요. 생긴 것으로 보면 관공서처럼 보입니다.”

가브리엘 스피노자의 발음이 자연스럽진 않지만, 굳이 교정을 해주진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서 나가면 사용할 일도 없을 텐데 무슨 상관인가.

“단어의 뜻으로는 초급 아카데미 같은 곳이라고 생각됩니다.”

안으로 들어가 교실을 둘러보고는 가브리엘 스피노자도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책상과 의자가 작은 것을 보니 어린아이들이 무언가를 배우는 곳 같군요.”

그리 큰 규모의 학교가 아니었다. 3층으로 지어져 있는 학교 안에 들어서자 마법 생명체의 느낌이 바로 전해져 왔다.

“맞게 찾아온 것 같군요.”

“그것이 느껴지십니까?”

“예, 제가 감각이 예민한 편이고 라이브러쉬 마탑주의 후계자인 스테이시 플레이스 양에게 마법 생명체를 감지하는 법을 조금 배웠습니다.”

“대단하군요. 저도 그것을 배워보고 싶습니다.”

배운다고 될까 싶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천재들이니 장담할 순 없었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알려드리지요. 일단 가보지요.”

감지된 곳을 찾아가니 교장실이었고 문을 열자 후덕한 체형의 교장이 다른 안내인들처럼 우리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아주 오랜만의 손님이로군요.”

돼지를 연상시키는 후덕한 몸매와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면상이다.

“네가 여기 안내인인가?”

“그렇습니다. 이용철이라고 합니다.”

모르는 사람이다. 정성화처럼 방송에서라도 한번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적어도 내가 살았던 세상에서는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 학교의 교장인가?”

“그렇습니다.”

학교의 교장인데 무한히 죽을죄를 지었을 정도의 죄인, 귀가 더러워질 것 같아서 어떤 죄를 지었는지 듣고 싶지도 않다.

내가 생각한 것을 가브리엘 스피노자도 떠올렸는지 표정이 매우 사나웠다.

“그래 안내인, 너는 원하는 게 뭐지?”

“혹시 두 분 말고 다른 일행은 없으십니까? 여성 동료분 말입니다. 어릴수록 좋습니다만”

“없다.”

“그것참 아쉽군요.”

교장 이용철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신다. 그 모습이 매우 역겨웠다.

“이 쓰레기 같은 놈이! 감히!”

나는 참았는데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어허! 저를 그렇게 핍박하면 이곳 던전을 빠져나갈 수 없으실 겁니다.”

이용철이 엄포를 놓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나도 가브리엘 스피노자도 알고 있었다.

“진정하시죠. 스피노자 남작님. 그래서 원하는 것은?”

“제 안전입니다. 저는 잠시 뒤에 해가 지면 창고로 가서 숨을 겁니다. 습격자로부터 그곳을 지켜주시죠. 그럼 이 던전을 공략할 수 있는 열쇠를 드리겠습니다.”

크게 다른 부분은 없었다.

“그렇군. 이 분이 잠시 흥분한 거 같으니 우리는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도록 하겠다.”

“그러시겠습니까? 상관은 없습니다.”

나는 아직 흥분을 완전히 가라앉히지 못한 스피노자 남작을 끌고 교장실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온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씩씩거리면서 말했다.

“분명 이곳은 죄인을 처벌하는 감옥과 같은 곳이라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저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예상되지 않으십니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실 수 있습니까?”

왕국 최고의 천재라고 해도 스무살의 젊은이에 불과한 가브리엘 스피노자다. 한참 혈기가 왕성할 나이다.

“그런다고 피해자가 살아나지는 않으니까요. 실제로 일어났던 일도 아니고요. 이 세계가 실제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나는 이것이 실제 세계에서 일어났던 일을 구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가브리엘 스피노자에게는 가상의 세계일 뿐이다.

“아! 제가 실수했군요. 이곳을 현실과 같다고 생각해버렸습니다.”

머리가 너무 좋아서 벌어진 일이라고 해야 할까. 이걸 전문용어로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럼 시간이 조금 남으니 저놈이 가려고 했던 곳을 찾아보죠.”

“창고 말입니까?”

“예”

학교의 구조라는 것이 사실 뻔하다. 딱히 푯말이 붙어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학교 뒤쪽에서 창고로 추정되는 작은 가건물을 찾아낼 수 있었다.

청와대의 지하벙커라면 모를까. 처단자들의 무력을 생각하면 전혀 방어가 되지 않을것 같은 가건물이다. 이용철은 이곳으로 왜 오려고 했던 것일까. 던전의 설계자인 광검제는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일까.

번호를 돌리는 자물쇠로 문이 잠겨있었지만, 그런 것은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를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철컥!

굳이 검으로 자를 것도 없이 힘으로 자물쇠를 비틀어 부숴버리고 문을 열었다. 어스름한 저녁이기에 마법으로 불을 밝히자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런 시발···.”

이번에는 내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굳이 보고 싶지 않았던 이용철이 벌인 악행의 증거가 이곳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마법 생명체도 아닌, 그냥 물건이다. 진짜처럼 구현해놓았을 뿐이라고 해야 할까. 이것이 진짜였다면 악취 때문에 코를 들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장면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니다. 대격변 이후의 세상에서는 법이 사라진 세계에서 자신의 숨겨왔던 욕망에 충실했던 미친놈들이 많았다.

이런 장면을 수십번까지는 아니어도 꽤 여러 번 본 기억이 있다. 죽일 수 있는 놈은 죽였다. 사람이기를 포기한 녀석은 변이체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전투 능력을 각성한 생존자의 경우에는 나로서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아마 이용철도 저쪽 지구에 변이체가 쏟아져 나왔을 때 비슷한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다.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조용해서 돌아보니 무척이나 충격을 받았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내 시선을 느끼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분노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천번 만번을 죽어 마땅한 놈입니다!”

나는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분노를 쏟아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가 한마디를 내뱉었다.

“가상의 세계일 뿐입니다.”

문을 닫고 뒤를 돌아서자 멀리 모퉁이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이용철이 보였다.

“벌써 내려왔나?”

“보셨습니까?”

이용철을 우리에게 가까이 오지 않고 말을 걸었다.

“봤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셨군요.”

이용철은 잔뜩 겁을 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속임수다. 저놈도 지금 겉보기에만 겁먹은 돼지 같은 모습이지 대통령이나 정성화처럼 뭔가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 앞서 만난 두 죄인의 무력을 생각해보면 적어도 스피노자 남작보다는 강할 것이다.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니 와서 안으로 들어가라.”

“정말입니까?”

“네가 뭘 하든 우리는 던전을 나가는 게 우선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스피노자 남작”

“그렇습니다.”

스피노자 남작은 흥분이 식었는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군요!”

갑자기 밝아진 표정의 이용철이 뱃살과 볼살을 출렁거리며 어울리지 않게 사뿐사뿐 뛰어왔다.

어떻게든 여기서 싸움을 일으키려는 함정 같기도 해서 눈을 잠시 감는 것으로 함정을 벗어났다. 그러나 그 간단한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는지 가브리엘 스피노자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렇게 열린 사고방식을 가진 분들이실 줄이야! 혹시 동료가 안 계신 것은 여러분들이 직접?”

가까이 다가온 이용철이 아주 신난 음색으로 질문을 던졌다. 나도 이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닥치고 들어가기나 해라”

“약속은 지키시겠지요?”

“우리는 던전에서 나가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했을 텐데?”

“홍홍홍! 좋은 자세입니다.”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이용철이 창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꿈에서 나올까 두려운 끔찍한 소리가 안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웨에엑!”

몸을 부들거리던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버티지 못하고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등을 두드려주며 달랬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지요. 그래도 충분할 테니까요.”

조금 떨어진다고 해서 기사의 청각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소리는 아니지만, 가브리엘 스피노자의 정신건강을 지켜주기 위해 창고에서 조금이라도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친 돼지 놈은 실제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몇시간째 쉬지도 않고 역겨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대체 언제 오는 걸까요?”

우리는 애타게 처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때가 되면 오겠지요.”

“오늘따라 유난히 시간이 가지 않는군요.”

그러나 슬슬 올 시간이 되긴 했다. 곧 교문을 빠르게 통과해 달려오는 누군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아는 사람이었다. 이게 이럴 수가 있는 건가? 물론 내가 대격변 이후에 생존을 위해 여러 도시를 떠돌며 많은 사람을 만났다고 해도 나와 연관된 사람이 죄인이나 처단자로 지정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마치 나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연결되어있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창고 앞에 있다가 이곳의 처단자를 맞이했다. 처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춤에 달린 군용대검 두 자루를 뽑아 들어 싸울 자세를 취했다.

나는 두손을 들어 싸울 생각이 없음을 알렸다. 딱히 말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대화를 좀 나누고 싶어질 뿐이었다.

“잠깐! 배도형!”

사나운 표정으로 곧 달려들 것 같던 처단자의 몸이 멈췄다. 이곳의 처단자는 정말 잘 아는 사람이었다. 몇 년이나 함께 했으며 태백시에서 헤어진 나의 마지막 동료이자 친구였던 배도형이었다.

“나를 아는가?”

“너는 나를 기억 못하겠지만, 나는 너를 알지.”

“그렇다면 나를 막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알겠군.”

지난 생에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배도형이었다. 나는 배도형이 왜 이러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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