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44화 (144/206)

144. 그놈의 이름

“알고 있다.”

애초에 막을 생각도 없지만, 왜 막으면 안 되는지 나는 정확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전생에 배도형은 자기 옛날얘기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다. 딱 한 번 자신의 과거사를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기가 막힌 정찰꾼이었던 정이형이 어떻게 찾았는지 몰라도 땅에 묻혀있던 담금주를 찾은 적이 있었다. 한눈에 봐도 먹으면 안될 것처럼 생긴 뱀술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먹었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고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하지 않던가. 실제로 굶주려서 먹은 것은 아니었지만, 먹고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항아리 가득 들었던 술을 네명이 뚝딱 해치우고 거나하게 취했을 때 배도형이 자기 옛날얘기를 털어놓았다.

안동에서 만났지만, 배도형은 서울 사람이라고 했었다. 대격변 후에 모든 곳이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였겠지만, 생존자들 사이에서 가장 위험했던 곳을 꼽으라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곳이 바로 서울이다. 저쪽 지구는 상황이 어땠는지 몰라도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천만이 넘는 사람이 빽빽하게 모여 사는 도시 전체가 패닉에 빠져 통제할 수 없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배도형은 그곳에서 딸이 다니던 초등학교의 교장을 때려죽였다고 했었다. 당시엔 누구도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거나 깊게 물어보지 않았었다. 살인? 그것은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설령 그것이 대격변 전의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는 누구도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격변 후에 몇십년을 살아남은 생존자들끼리 술을 먹다 나온 이야기다. 가족이나 가까웠던 사람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고 사람을 죽이지 않아본 사람이 없다. 오히려 생존자들이 많이 살아남아 있을 때는 그것이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오늘 친구였던 사람이 내일 시체가 되어있고 그 복수를 하기 위해 혹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혹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사람을 죽였다. 나 역시 그랬고 그래서 살아남았다.

그때는 흘려들었던 배도형의 이야기가 오늘 이곳에서 완성이 되었다. 내가 이것을 지금도 기억하는 이유는 그때 이야기를 하던 배도형의 표정이 너무 인상 깊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을 모두 담았다고 해야 할까. 내가 그림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 표정을 반드시 그림으로 그렸을 것이다.

그리고 배도형은 가끔 잠꼬대를 하고는 했었다. 악몽을 꾸는지 몸을 비틀면서 하는 잠꼬대의 내용은 항상 똑같았다.

“안다고?”

“그래, 효진이”

배도형은 악몽을 꾸며 늘 효진이를 불렀다. 그것이 배도형의 딸 이름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나는 자식이 없었기에 자식을 잃은 부모의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부 생존자들은 항상 안쓰럽게 그것을 지켜보고는 했다.

“나는 너를 모른다.”

“그렇겠지.”

“하지만 효진이를 알고 있는 것을 보면 나와 관계가 있던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상하군. 내가 알고 있는 외국인은 없는데?”

“내 이름은 강한수다. 아니 강현수라고 해야 하나?”

그쪽 지구에서 내 이름은 아마 강현수였을 것이다.

“네가 현수라고?”

“그래, 믿을지 모르겠지만, 다시 태어났다.”

“아니 믿는다. 나도 이렇게 다시 태어나지 않았나.”

마법 생명체로 구현된 것도 다시 태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못할 것도 없지 싶다. 이공간이라는 것은 완전히 독립된 또 하나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고 배도형은 그곳의 주민이니까. 그리고 이곳이 만들어진 시간을 생각하면 비록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삶이지만 몇백년을 살아왔다.

“우리와 가장 친했던 세 사람의 이름은?”

갑자기 배도형이 질문을 한다. 평행세계라면 이것도 똑같지 않을까?

“정이형, 김희철, 김자루”

태백시에서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친구들의 이름을 댔다.

“너 정말 현수가 맞구나?”

배도형이 대검을 집어넣으며 나를 격하게 끌어안았다. 비록 내가 아는 그 배도형과 같은 사람이 아니고 내가 알던 배도형보다는 훨씬 젊은 얼굴이지만, 친구의 포옹을 받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네가 알고 있는 현수랑은 좀 다를지도 모르지만 맞다.”

굳이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 새로 태어나선 잘살고 있지?”

“그 지옥보다는 훨씬 낫지”

“당연히 더 나아야지”

우리는 껴안은 채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옆에서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끼어들었다.

“뭐, 뭡니까? 저는 아직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설명을 좀 해주십시오.”

“쉿! 잘 돼 가고 있으니 방해하지 마시죠.”

나는 단번에 가브리엘 스피노자를 조용히 시키고 이야기를 계속 나눴다.

“이곳을 없애러 왔나 보구나”

“응”

“너라면 기꺼이 사라져줄 수 있지.”

역시 김경식처럼 다른 세상의 배도형도 내가 알던 그대로였다. 포옹을 풀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나는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털어놓았다.

“우리가 살던 곳에 괴물들을 풀어놓은 놈 있잖아. 그놈이 내가 새로 태어난 세상에도 똑같은 짓을 하려고 하고 있어. 그래서 이곳에 남겨진 물건을 얻어야 해”

“응?”

갑자기 배도형이 움직임을 멈췄다.

“피체둘라가 살아있다고?”

피체둘라가 뭔지 모르는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놈 네가 죽였잖아? 그런데 살아있다고?”

마왕, 혹은 교주로 추정되는 것의 이름이 피체둘라였나? 그리고 저쪽 세상에서는 내가 그걸 죽였다고? 여러 가지 의문이 뒤따랐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제대로 죽이지 못했었나 봐”

배도형에게는 미안하지만, 거짓말을 했다.

“이런 빌어먹을!”

콰앙!

배도형이 무척이나 흥분하며 학교의 벽을 걷어찼다. 학교의 벽이 그대로 뚫리며 자신은 결코 부실 공사가 아니라는 듯이 튼실한 철골을 드러냈다.

큰 소리가 울려 퍼지며 덕분에 창고 안에서 계속 들려오던 불쾌한 소음이 멈췄다.

“그 개자식이 아직 살아있단 말이지?”

“아마도? 아직 확실하게 확인한 것은 아니라서”

“으아아아! 우리가 어떻게 그놈을 죽였는데!”

배도형이 광분하며 날뛰기 시작하자.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불안한 표정으로 다시 끼어들었다.

“저기 괜찮은 게 맞습니까?”

“괜찮습니다.”

가브리엘 스피노자를 안심시키고 배도형의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피체둘라가 아마도 저쪽 지구를 침략했던 놈들의 끝판왕이었던 것 같다. 저쪽 지구는 그것을 막아냈다고 했으니 아마도 배도형과 강현수를 비롯한 친구들이 그놈과 싸웠던 것 같다.

내가 살았던 지구와는 다르다. 결국 우리는 피체둘라인지 뭔지는 구경도 하지 못하고 모두 죽었으니까.

“너는! 너는!”

얼마나 흥분했는지 배도형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놈과 또 싸워야 하는 거냐?”

“그렇겠지.”

“그건... 너무하잖냐.”

배도형이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다가 갑자기 저러니 무슨 조울증 환자 같지만, 배도형은 전생에서도 그런 면이 있기는 했다. 애초에 우리 생존자들은 전부 정신병 한두 개쯤은 달고 살았으니까.

“네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또 그놈과 싸워야 해?”

확실히 내가 진짜 강현수였다면 되게 억울할 것 같지만, 다행히도 나는 강한수여서 처음 싸워보는 것이라 그렇게 억울하진 않았다. 그런데 이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건가?

“그래서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그게 필요해”

아직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만든 대 마왕용 무기. 그것의 부품을 모아 완성해야 한다. 스트라이더 1000번에 대해서는 큰 미련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얻는다고 해도 제멜아크쪽과 신경전을 벌일 것이고 라이브러쉬 왕국의 소유가 된다고 해도 내가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좋다. 당연히 도와줘야지. 일단 저놈부터 죽이고.”

배도형은 군용 대검 두 개를 다시 뽑아 들고 창고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그냥 지켜보았다. 굳이 배도형이 원한을 푸는 것에 참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때 창고가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잘못 본 것인가 했더니 창고 건물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교장은 뭘로 변하나 했더니 창고와 한 몸이 된 것인가? 작은 창고라도 해도 컨테이너 세 개쯤을 합쳐놓은 크기다. 그것이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하니 꽤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배도형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빛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처단자와 죄인의 관계다. 내버려 두면 당연히 배도형이 이길 것이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지요?!”

창고의 문 부분이 기괴하게 뒤틀리며 입술처럼 움직여 말을 한다. 이것은 또 신기한 광경이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어린이는 혼이 나야 합니다!”

배도형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창고가 뛰어오르며 가브리엘 스피노자와 나를 덮쳐왔다.

“아주 지랄을 한다.”

볼 것 못 볼 것을 다 보고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살다 보니 진짜 별꼴을 다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피노자 남작님 뒤로 빠지세요.”

가브리엘 스피노자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5성 기사에게는 버거운 상대다. 배도형과 내가 있으니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방해가 될 것 같아서 그래 이 양반아.

“그럼 조심하세요.”

그렇다고 굳이 뜯어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위험해지면 알아서 피할 수는 있을 것이다. 천재니까 그 정도 판단은 하겠지.

그야말로 집채만 한 적이 아니라 집이 날아왔다. 배도형이 빠른 움직임으로 달라붙어 쌍검을 휘둘렀지만, 창고의 구석을 조금 잘라내는 것에 그쳤다.

김경식도 그랬지만, 이 배도형은 내가 알던 배도형보다 훨씬 강하다. 움직임만 봤을 땐 오히려 김경식보다 더 빠른 것 같았다.

내가 알던 전생의 배도형은 그 힘을 온전히 펼칠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굉장히 강한 생존자였다. 내가 배도형을 만났을 때는 이미 변이체들의 진화가 상당히 이루어진 후라서 생존자가 일대일로 변이체와 맞설 수 있는 시기가 한참 지나 있었다.

그렇다고 다수가 약한 변이체 하나를 못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안동시의 쉘터에 있을 때 그곳의 전투 능력을 가진 생존자들은 두 번이나 집단 사냥으로 비교적 약한 변이체를 사냥했었다.

그리고 그 전투를 지휘했던 것이 배도형이었다. 그때 안동시 쉘터의 대장은 안상철이었지만, 전투 지휘에는 그다지 재능이 없던 사람이었다.

전투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나도 그 사냥에 참여했었다. 사냥에는 전투 능력만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이능력을 제외한 순수 인간으로서 싸움 실력은 딱히 누구에게도 밀린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스트로퍼 양손검으로”

내 명령에 따라 아스트로퍼가 내 키와 비슷할 정도 길이의 양손검으로 모습을 바꿨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큰 검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아스트로퍼를 사용하니 좋은 점이었다. 여러 가지 무기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양손검을 자주 연습한 것은 아니지만, 스승님에게 배운 검술은 한가지 검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무기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아스트로퍼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몸에서 힘이 쑥 빠지는 기분과 함께 막대한 양의 오러가 아스트로퍼로 빨려 들어갔다.

“착한 어린이가 됩시다!”

헛소리를 내뱉는 창고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며칠 전 약간이지만 신체 강화의 힘까지 얻고 오러를 잔뜩 머금은 다리가 땅에서 튕겨내듯이 내 몸을 하늘로 밀어 올렸다.

“합!”

기합과 함께 뛰어오르자 나를 찍어 누르겠다는 듯이 휘둘러졌던 거대한 손이 옆으로 스쳐지나가 땅에 박히며 거대한 소음을 냈다.

오러를 잔뜩 머금은 채 양손검이 자신의 힘을 보여줄 대상을 찾고 있었다.

스악!

창고의 옆구리가 길게 찢어졌다. 그 틈으로 붉은색의 무언가가 잔뜩 쏟아졌다. 그것은 이용철 교장의 피가 아니다. 희생자들의 잔해였다.

“아, 안돼!”

이용철은 그것을 마치 아깝다는 듯이 손으로 받아 다시 집어넣으려고 했다. 기괴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역겨웠다. 인간의 도리를 벗어나는 미친 짓을 하는 인간은 질리도록 봤지만, 이 정도면 상위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이상 희생자들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놈은 빨리 사라지게 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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