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친구를 위해
세 방향에서 달려드는 사냥꾼들 앞에 이용철은 늑대 떼에게 사냥당하는 소처럼 무력했다. 애초에 배도형에게도 매일 죽어 나가던 죄인인데 분노한 사냥꾼 둘이 더해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가브리엘 스피노자는 예상대로 무리하지 않고 마검사답게 마법과 검술을 같이 사용하며 이용철을 괴롭혔다. 예상보다 훨씬 영리하게 전투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슬라이트가 공격적이고 자칼이 방어적이라면 가브리엘 스피노자는 공수의 균형을 맞춘 느낌이었다. 내 걱정이 무색하게 실전경험도 충분해 보였다. 자칼처럼 실전에 들어가면 더 강해지는 타입인 것 같았다.
실제 전투는 나와 배도형이 주도했다. 배도형이 주의를 끌면 내가 큰 타격을 주는 방식이었다. 그냥 배도형 혼자 싸우게 놔뒀다면, 상대적으로 짧은 무기인 군용 대검의 특성상 가루 수준으로 조각조각을 냈을 것이다.
그렇게 매일 고통스럽게 죽는 것이 이용철 교장에게는 어울리는 형벌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전생의 나와 배도형처럼 손발이 잘 맞았다.
쿵!
반으로 갈라진 창고가 쓰러지며 일방적인 사냥에 가까웠던 전투가 끝이 났다.
“간만에 재밌는 전투였다.”
“나도”
전투를 끝낸 배도형의 감상이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슬라이트나 자칼과 함께 할 때보다 훨씬 즐거웠다.
“그럼 새로 태어난 강현수의 실력을 좀 볼까?”
배도형이 특유의 자세를 잡았다.
“나하고 한번 해보자는거야?”
“그래, 너를 한 번도 못 이겼는데 오늘은 이길 수도 있을 것 같거든.”
진다. 객관적인 실력을 보자면 그렇다. 지금 내 실력으로는 배도형을 이기지 못한다. 배도형은 절대 인조인간이나 김경식의 아래가 아니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하면 지진 않을 것 같았다.
“한번 해보지 뭐. 아스트로퍼 방패”
아스트로퍼를 방패로 변환시켰다. 배도형과 대등하게 싸우기 위해서는 아스트로퍼를 무기로 사용할 수 없었다.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지켜보고 있지만, 슈바르거트를 꺼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배도형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뭡니까? 갑자기?”
“진짜로 싸우는 게 아니라 대련이니 걱정하지 말고 지켜보십시오.”
갑자기 배도형과 싸우는 분위기가 되자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당황했지만, 안심시켜서 멀리 쫓아냈다.
슈바르거트를 꺼내자 배도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많이 보던 검인데?”
이것은 광검제가 마왕을 죽이고 얻은 검이라고 했었다. 그럼 피체둘라는 정말로 저쪽 지구에 이어 아노더스에 침공했던 그 마왕인 건가? 광검제는 정말로 이곳까지 와서 피체둘라와 다시 싸운 거고?
하지만 배도형은 금세 슈바르거트에 대한 관심을 거뒀다. 오히려 눈이 휘둥그레 커진 것은 멀리 쫓아 보낸 가브리엘 스피노자였다. 뭔가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지금은 필사적으로 참는다. 라는 표정이었다.
“들어와 봐”
배도형이 나를 도발했다. 선공을 양보해준다는데 그것을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아무리 대련이라고 해도 져줄 생각은 없었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생각이다.
배도형과 대련이 시작되었다. 대련이라고 하지만 나는 실전과 똑같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전력의 차이가 확실히 나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배도형이 충분히 받아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배도형의 쌍수 단검술은 내가 알고 있던 배도형의 그것보다 몇단계는 위였다. 아니 감히 비교하면 안 될 수준의 차이였다. 내가 알던 배도형은 군용 대검을 즐겨 사용하긴 했어도 쌍수로 사용하지도 않았었다.
배도형은 이용철 교장을 상대할 때보다 훨씬 매섭게 나를 공격했다. 워낙 빠르게 이어지는 공격에 검로를 읽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였다. 아스트로퍼의 방패로 간신히 막아내며 가끔 반격을 시도할 뿐이었다.
몸에 상처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재생력이 발동하며 작은 상처들을 곧바로 치유하기 시작했다.
“역시 강현수네”
빠르게 아무는 상처를 보며 배도형이 웃었다. 강현수는 재생력도 가지고 있던 건가? 뭔가 좀 억울했다. 강현수는 피체둘라인지 마왕인지 모를 그놈을 상대했던 만큼 강했는데 강한수는 왜 그렇게 약했던 걸까?
이따금 마법까지 사용하며 최선을 다했지만, 서서히 전투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었다. 몸에 생기는 상처도 조금씩 깊어져서 배도형이 나를 죽이려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잠시 들었다.
하지만 죽이려고 했다면 벌써 몇번은 죽었을 것을 알기에 나는 더욱 최선을 다했다. 스승님을 제외하고 이런 압도적인 강자와 모든 힘을 다해 싸울 기회가 많지 않다. 이능력 ‘성장’이 발동되고 있었다. 싸우면 싸울수록 나는 성장한다.
격전 중에 배도형에게서 틈을 발견했다. 하지만 함정처럼 일부러 보인 틈이라는 것이 너무 뻔히 보여서 멀리 떨어뜨릴 심산으로 검을 크게 휘둘렀다.
서걱!
그런데 베였다.
“무슨?”
목을 반 이상 베인 배도형이 웃으며 그 자리에서 멈춰있었다. 일부러 검에 목을 갖다 댄 것이다.
배도형이 손가락으로 반대쪽 손목을 툭툭 쳤다.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벌써 동이 트려고 하고 있었다. 배도형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이겨본다며?”
배도형이 피가 쏟아지는 목을 부여잡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표정은 밝게 웃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던 모양이다.
이윽고 배도형이 사라지며 그 자리에는 검은색의 작은 피라미드가 땅에 떨어졌다.
기분이 무척 더러워졌다. 빌어먹을 던전이다. 내 손으로 친구를 죽이게 만들었다. 이 배도형이 내가 알던 그 배도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이 느껴졌다.
파손된 천마 초등학교가 복구되기 시작하며 완전히 박살 나 있던 창고 겸 이용철 교장도 희미하게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하나의 물건을 남겼다.
“상처는 괜찮으십니까?”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득달같이 달려와 내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 이미 상처는 모두 치유되어 있었지만 그래서 더 문제였다.
“괜찮습니다. 솜씨가 워낙 좋아서 옷만 베더군요.”
“하지만 출혈의 흔적이 있는데···.”
“그냥 생채기 수준입니다.”
가브리엘 스피노자의 질문 공세가 쏟아지기 전에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일단 감정이 불가능한 삼각뿔은 가브리엘 스피노자에게 확인하게 한 뒤에 챙겨 넣고 이용철 교장이 사라진 후 나온 물건을 확인했다.
“이건 스트라이더 217번이로군요.”
정교란 조각이 양각된 술잔처럼 생긴 것을 주워둔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말했다.
“감정이 그렇게 빨리 되는 겁니까?”
“아니요. 스트라이더 도감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모든 물건의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국 시절 창고에 있던 물건의 목록이 제멜아크에 남아있거든요. 그것을 슬쩍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게 슬쩍 본다고 기억이 되는 것이던가? 천재들의 세계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억까지 하시는 것을 보면 좋은 물건인가 봅니다? 무슨 기능이 있습니까?”
“술잔입니다.”
술잔처럼 생긴 것은 보면 안다.
“그냥 술잔입니까?”
“물론 그냥 술잔은 아니지요. 아, 이것의 이름을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스트라이더 217번의 이름은 미레이의 주배입니다.”
주배라는 것은 술잔이라는 뜻이다. 아무래도 진짜 술잔인 모양이다.
“그래도 뭔가 마법이 걸려있는 것 아닙니까?”
“오, 그것은 지금 바로 시험해보도록 하지요. 저도 정말 궁금했거든요.”
가브리엘 스피노자는 곧바로 마법으로 물을 생성하더니 미레이의 주배에 가득 채웠다. 그러자 투명했던 물이 호박색의 액체로 변하기 시작했다.
“뭡니까 그건?”
“제가 본 내용으로는 멸악의 마법사께서 샤프리스 벌꿀주를 매우 좋아하셨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술이 여간 구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 술이라서 직접 만들기로 했다고 하더군요. 물을 부으면 샤프리스 벌꿀주로 변하는 술잔인 겁니다.”
어이가 없다. 뭐 만드는 사람 마음이긴 하지만 이런 것도 보물이라고 할 수가 있는 건가?
“그런데 이게 보기보다 대단한 보물입니다. 단순하게 물을 보통 술로 변하게 하기도 어려운 기술이지만, 맛이 뛰어난 술로 변환시킨다는 건 전무후무한 기술입니다. 여기에 들어간 마법 수식을 연구할 수 있게 해준다면 마법사들이 노예가 되어도 좋다고 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대단한 물건은 맞는 것 같다. 당장 나에게 저런 아이템을 만들어보라고 하면 감히 흉내도 낼 자신이 없다.
“거기에 더 가치가 있는 것은 샤프리스 벌꿀주가 당시에도 아주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량 생산이었고 비싼 술이었는데 지금은 아예 사라진 술이라는 겁니다. 아마 여태까지 이 던전에서 나온 물건 중에 가장 가치가 있는 물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는 걸까.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술잔이 알고 보니 대단한 물건이었다.
“그럼 전설의 술맛을 한번 볼까요?”
“잠시만 제게 먼저 줘보시겠습니까?”
나는 술이 가득 찬 술잔을 넘겨받아 배도형이 사라진 그 자리에 뿌려주었다.
“아아, 아까운 술을···.”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앓는 소리를 했다.
“어차피 물만 부으면 만들어지는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요.”
술잔을 돌려주자 재빨리 다시 물을 채운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이번에도 내가 빼앗아 갈까 봐 경계하는 눈빛을 보내면서 술잔을 입에 대었다.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술을 꽤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우리의 일정이 대폭 늦어졌다. 가브리엘 스피노자는 술을 무척 좋아하지만, 술이 세진 않았다. 보통 5성 기사쯤 되면 술도 무척 세지기 마련인데 어찌 된 것인지 과연 명품 술이라면 한잔을 홀짝홀짝 마시던 가브리엘 스피노자는 만취 상태가 되어 잠을 자기 시작했다.
주정을 부리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차마 남자를 업고 걷기는 싫었던 나는 적당한 곳으로 끌고 가 바닥에 던져놓았다.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깨어난 것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였다.
“아아, 제가 이런 실수를!”
정신을 차리자마자 벌떡 일어나더니 야단법석을 떠는 가브리엘 스피노자와 나는 하나의 거래를 하기로 했다.
“이것은 대단히 큰 실수인 것은 알고 계시지요? 던전 안에서 임무 중에 술에 취해서 하루를 그냥 보내다니요. 이게 알려진다면 남작님의 명성은···휴”
가브리엘 스피노자는 얼굴이 하얗게 되어 벌벌 떨기 시작했다.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단순히 명성만이 아닐 것이다.
제멜아크 왕세자의 성정으로 봐서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우리 망나니 왕자 같았으면 목을 치라고 하지 않았을까?
가브리엘 스피노자는 천재지 바보가 아니다. 그 천재성을 이용해 빠르게 눈치채고 내가 원하는 답을 내놨다.
“뭘 원하십니까?”
나는 그렇게 마음의 평화를 얻어냈다. 이동하는 동안 입을 다물고 있기로 약속한 것이다. 굳이 슈바르거트를 비밀로 해달라거나 그런 조건을 걸지 않았다. 그게 지켜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사실 일정이 반나절 정도 늦어진다고 해서 큰 차질이 생기는 일정도 아니다. 다만 서초동이나 삼성동은 이곳에서 꽤 거리가 있었기에 그 긴 시간 동안 나의 정신건강을 지킬 수단이 필요했다.
천마 초등학교를 떠난 우리는 가브리엘 스피노자의 입이 닫힌 만큼이나 빠르게 이동했다. 어쩌면 스피노자 남작은 이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입을 움직이는 데 쓰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다음 날 오후쯤이 되어 우리는 삼성동에 도착했다. 거리로 본다면 서초동이 더 가까웠을 텐데 서울의 지리를 잘 모르고 예전 생각도 잘 나지 않기에 이정표를 따라오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기고 말았다.
시간과 거리를 손해 본 셈이지만, 어차피 나만 빼고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에 조용히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SV 그룹 본사 앞에 도착했다. 원래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잠실의 마천루를 뛰어넘은 한국 최고의 건축물이었다.
“우와! 이것은 정말 엄청나군요.”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137층짜리 마천루인 SV 그룹 본사 건물을 보고 입을 다물기로 약속했던 가브리엘 스피노자의 입을 다시 열렸다.
솔직히 나도 이렇게 직접 앞에 와서 본 것은 처음이었고 가브리엘 스피노자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탓하진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 작은 문제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아, 전기가 안 들어오니 엘리베이터도 작동 안 할 거 아냐.”
137층을 걸어 올라가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