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46화 (146/206)

146. 형제의 지옥

137층을 걸어 올라가는 것은 아무리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라고 해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부디 안내인이 최상층에 있는 것이 아닌 중간쯤 어딘가 있기를 기원하겠지만, 이곳은 워낙 유명한 곳이다 보니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SV그룹은 20년이 되지 않는 사이에 급성장한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이었다. 그 과정 중에 10대 대기업 중 세 곳이 이곳에 인수 합병되었을 정도다.

어떤 IT 기업처럼 우후죽순으로 자회사를 만들며 문어발 경영을 하지도 않았다. 대한민국의 머스크라고 불리던 진명철 회장은 외계인을 잡아 고문하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만큼 기존의 개념과 상식을 뛰어넘은 물건들을 만들어내고는 했다.

그 진명철 회장의 집무실은 방송에 수백 어쩌면 수천번은 나왔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바로 이 건물의 최상층인 137층이었다.

나는 이곳의 주인은 진명철 회장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살던 지구의 진명철 회장은 대단히 모범적인 기업가였으나 대격변 이후에 어떻게 되었고 무슨 일을 했는지 소식을 전혀 들은 바가 없다.

하지만 저쪽 지구였다면 정성화처럼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쁜 짓을 하지 않았을까?

가브리엘 스피노자와 나는 말없이 SV 그룹 본사 건물의 계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 50 몇층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70층이 넘어가자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힘겨워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아직 여력이 충분했다.

“그냥 여기서 기다리겠습니까?”

“헉헉! 아닙니다. 올라가야지요. 체력부족으로 이렇게 발목을 잡게 되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천천히 따라갈 테니 먼저 가십시오.”

쉬엄쉬엄 올라왔다면 가브리엘 스피노자도 충분히 따라왔겠지만 내가 그 사정을 봐주지 않은 것이 컸다.

“그럼 천천히 따라오십시오. 먼저 가서 대화나 좀 나누고 있겠습니다.”

“그러십시오.”

이것은 이제 띄엄띄엄이라도 한국어를 알아듣기 시작하는 가브리엘 스피노자를 좀 떼어놓으려는 나의 술책이었다.

가브리엘 스피노자를 떼어놓고 나는 더 속도를 내어 등반을 하기 시작했다. 일체화를 통해 강화된 신체에다 반쪽이긴 하지만 얼마 전 신체 강화도 습득했고 거기에 재생력까지 가진 내 체력은 거의 무한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먹는 것으로 열량 소모는 보충해줘야 하므로 사탕을 한 주먹 꺼내 씹어먹었다. 이것은 특별히 더 달게 제작한 사탕으로 가브리엘 스피노자도 내가 자꾸 무언가를 꺼내 오독오독 씹어먹자 관심을 보여 몇 개 줬더니 너무 달다며 난리를 피웠었다.

슬라이트나 자칼도 모두 이미 당한 적이 있는 일이었다. 유일한 예외로 스테이시만이 가끔 내 사탕을 노리고는 했었다.

그러는 사이 최상층에 도착했다. SV 타워의 최상층은 창문을 포함해 모든 벽이 유리로 되어있어 굳이 초감각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집무실 중앙에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런데 내가 기억하고 있는 진명철 회장이 아니다. 하지만 닮았다. 저쪽 세계의 진명철 회장은 생긴 것이 다른 것일까?

이번 안내인은 조금 달랐다. 내가 집무실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는데도 격한 환영 인사 없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진명철 회장?”

“진수철이오.”

이름도 다른 건가? 그런데 생각해보니 진명철 회장에게는 동생이 있었다.

“동생?”

“맞소.”

“아, 그런거구만”

정확한 직급은 기억나지 않지만 SV 그룹에는 진수철이라는 오점이 있었다. 진명철 회장의 동생으로 그룹에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무능력했고 매번 사고를 쳤었다.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갑질에 성추행에 여러 가지 사고를 아주 골고루 치곤 했었는데 그러면서 그룹 요직에서 점점 한직으로 밀려났었다.

아예 그룹에서 내쫓지 못한 것은 진명철 회장의 동생 사랑이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동생이 그룹에서 내쫓길 위기에 처하자 상당수의 지분을 동생에게 넘기면서 아예 이사직을 주기도 했었다.

그런 진명철 회장의 동생인 진수철이 이곳의 안내인으로 앉아있었다.

“네가 이곳의 안내인이겠지?”

“그렇소. 당신은 던전을 공략하러 온 사람인가?”

“그래”

“이곳까지 온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로군.”

가브리엘 스피노자를 떼어놓고 온 것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넌 무슨 죄를 지었지?”

진수철이 평소에 사고를 좀 쳤다고 해도 무한하게 죽는 형벌에 처해진 정도로 큰 죄를 지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진수철의 한쪽 입꼬리가 기묘하게 말아 올려졌다.

“형을 죽였지”

간단명료한 대답이었다. 어쩌면 내가 살던 지구에서도 진명철 회장의 대격변 이후 행적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진수철에게 죽임을 당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격변 이후에 가족이나 일가친척을 죽인 사람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다. 단지 그것만이 아닐 것이다.

“진명철 회장을 죽였다고 여기에 갇히게 된 것 같지는 않은데?”

“형이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기 직전이었거든, 괴물만을 죽일 수 있는 바이러스라고 했었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내가 살던 지구의 진명철 회장은 언제 죽은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가 변이체만을 죽일 수 있는 바이러스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면 세상이 바뀌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죽였어? 세상을 구하는 일이 아닌가?”

“바보 같은 생각이지. 세상의 모든 돈을 다 긁어모으고 있었는데 괴물을 없애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이런 병신들 때문에 내가 살던 지구가 멸망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새삼스럽게 분노가 끓어오른다. 아니 진짜 멸망했다. 이런 놈들만 없었어도 멸망하지 않았거나 혹은 몇 년 정도는 더 버텼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너는 딱히 원하는 것이 없나? 다른 안내인들은 지켜달라느니 그런 소리를 하던데 말이야.”

“흥! 네깟 놈이 나를 지켜줄 수는 있고?”

아, 무시당했다. 생각해보니 굳이 참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녀석의 앞에 놓여있는 회장님용 책상을 뛰어넘어 진수철의 가슴팍에 이단 옆차기를 박아넣었다.

“컥!”

불시에 당한 기습에 진수철이 가슴팍을 부여잡고 의자째로 뒤로 넘어갔다.

“넌 뭘로 변신할 줄 아냐? 한번 해봐”

굳이 검을 꺼내지 않고 손과 발만 이용해서 무자비한 구타를 시작했다. 검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보통 사람은 한 대만 맞아도 죽을 수 있는 위력이다.

그런데 이 녀석 변신을 하지 않는다. 변신을 하는데 필요한 조건 같은 것이 있었나?

“뭐해? 변신하라니까?”

“사, 살려줘”

녀석이 도움 요청했지만, 어차피 아무도 없는 곳이라 무의미한 일이었다.

어차피 처단자가 올 때까지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아주 반죽음을 만들어서 처단자에게 넘기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인 것 같았다.

“변신해! 하라고!”

“아, 아냐! 난 못해!”

설마 이놈은 애초에 변신을 못하게 설계된 놈인가?

그때 뒤늦게 따라온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파리한 안색으로 정상에 올라왔다.

“이게 무슨?”

내가 진수철을 개 패듯이 패고 있는 모습에 당황한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자 진수철이 나에게 얻어맞아 가면서도 바닥을 기어서 가브리엘 스피노자에게 다가갔다.

“사, 살려주시오!”

“아, 이놈 저번에 그놈보다 더 나쁜 놈입니다.”

내 말에 가브리엘 스피노자의 눈이 양옆으로 찢어졌다.

퍽!

“억!”

가브리엘 스피노자의 발차기가 진수철의 턱에 작렬했다.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제대로 봤던 안내인은 이용철 교장뿐이다. 가브리엘 스피노자는 그 악업의 흔적을 보고 치를 떨었었는데 그보다 나쁜 놈이라고 하니 동정할 마음이 싹 사라진 것이다.

“변신해! 해보라고!”

“죽어! 죽어!”

구타를 하는 사람이 한명 더 늘어났다. 그래도 마법 생명체인 덕분에 그렇게 맞고도 진수철은 죽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곤죽이 되도록 맞았다. 온몸이 흐물거리도록 맞은 진수철을 구석에 던져놓고 우리는 처단자를 기다렸다.

궁금한 것이 하나 더 생겼다. 과연 처단자도 137층을 걸어서 올라오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방법을 사용할 것인가.

우리는 이것을 두고 내기를 했다. 나는 다른 방법을 사용할 것이라는 것에 걸었고 가브리엘 스피노자는 걸어 올라온다는 것에 걸었다.

그리고 처단자가 나타났다. 이번 처단자는 놀랍게도 밤손님처럼 찾아오는 군인들처럼 집무실 구석의 그림자에서 솟아났다.

“내가 이겼군.”

“아, 안돼”

이번 내기로 가브리엘 스피노자는 또 입을 봉인 당했다.

이번에 나타난 처단자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나와 큰 관계는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곳과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미리 작업을 좀 해두었습니다. 괜찮겠지요?”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진수철을 내려다보고 있는 처단자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아, 괜찮습니다.”

여태까지 보아왔던 처단자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의 처단자는 바로 진명철 회장이었다.

이곳의 처단자들은 겉으로 봐서는 강함을 전혀 느낄 수 없긴 하지만 진명철 회장은 정말로 강해 보이지 않았다. 몸에 가지고 있는 무기조차도 없었다.

그래도 어떤 방식으로든 진수철을 매일 죽여왔을 테니 정말로 약한 것은 아니겠지만, 진명철 회장은 애잔한 눈빛으로 쓰러져 있는 진수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혀...형”

진수철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발음도 되지 않는 목소리로 진명철 회장을 불렀다.

“고생했다.”

진명철 회장은 그렇게 한마디를 남기며 쓰러져있는 진수철을 일으켜 세워 안아주었다. 그런데 그냥 안아준 것이 아니었다.

우드득!

진수철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려 퍼졌다.

“혀...엉 미안해”

진수철은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도 우리에게 맞을 때와는 달리 진명철 회장에게 계속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미...안해”

이윽고 진명철 회장의 품에 안겨있던 진수철의 목이 꺾이며 일이 끝났다.

일을 마친 진명철 회장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여태까지 보아왔던 안내인과 처단자의 관계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에 나와 가브리엘 스피노자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이 지옥을 끝내주러 오신 분들이시군요.”

진수철의 시신을 곱게 눕힌 진명철 회장의 말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는 죄인과 처단자의 관계가 아니다. 죄인이 둘인 것이다.

“당신도 죄를 지었습니까?”

내 질문에 진명철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도 죄인입니다. 동생이 그런 줄 알고 있었으면서도 마지막까지 동생을 믿은 죄인이지요. 제가 동생을 미리 막았다면 수억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었을 겁니다.”

벌써 수백년의 시간. 진수철이 괴로웠을까. 진명철이 괴로웠을까? 내 생각으로는 단연코 후자가 아니었을까?

진명철 회장은 내 앞에 와서 죽여달라는 것처럼 무릎을 꿇었다.

“어서 가져가시고 부디 이 지옥을 끝내주십시오.”

하지만 나는 아직 궁금한 점이 많았다.

“혹시 개발하기 직전이었다는 그 제품. 만드는 법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군요.”

정말 아쉬웠다. 하지만 예상하고 있었다. 이 던전을 만든 것은 광검제다. 완성되지 않은 바이러스 배양법까지 알고 있지 못한 것이 당연했다.

만약 저것이 변이체에게도 적용이 되는 것이라면 마왕은 몰라도 그 이하 반마라던지 아니면 지구에 남아있는 변이체 정도는 싹 쓸어버릴 수 있는 물건이었다.

“아쉽군요. 하지만 시제품까지 만들어놓기는 했습니다.”

“혹시 그곳이 어딥니까?”

“용인 연구소입니다.”

저쪽 지구의 진명철 회장과 내가 살았던 지구의 진명철 회장이 같은 일을 했다면 어쩌면 용인에 그것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제조법의 일부라도 건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럼 보내드리겠습니다.”

진명철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고 내 검이 잘 내밀고 있는 진명철 회장의 목을 쳤다.

그런데 진명철과 진수철 형제가 사라지며 나타난 물건에 반응한 것은 나와 가브리엘 스피노자만이 아니었다.

-아무도 건들지 마! 저건 내 거야! 내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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