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이공간의 신
이건 빠르게 이동해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내 감각을 속일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거나 은신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 잘 아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이 여기서 나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바로 이 세계의 설계자였으니까.
“광검제...님”
광검제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기억 속에서 본 그 모습과는 조금 다르지만, 확실했다. 광검제였다.
“네? 뭐라고요?”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내 말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이분은 광검제님입니다.”
광검제는 내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우리를 정확히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가브리엘 스피노자는 갑자기 실어증이 걸렸는지 어버버 거리면서 눈동자를 정신없이 굴리고 있었다. 몇백년이 지났고 실제가 아니라고 해도 광검제는 그런 영향력이 있는 존재였다.
“광검제께서 이곳의 어떤 역할이십니까?”
나 역시 존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지 이 세상을 두 번이나 구원했던 영웅이라서가 아니라 마법 생명체임에도 그 존재감이 엄청났다.
안내인이라면 광검제가 죄인이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렇다고 처단자의 역할일 것 같지도 않다.
“글쎄, 그것은 명확하지 않군.”
광검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광검제, 지르크 폰 가이스트이기도 하고 강현수이기도 하다.”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광검제가 강현수라고?
여태까지 강현수가 평행세계의 강한수 즉 나와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지?
“그래서 너는 뭐지?”
광검제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마치 투시를 하는듯한 시선이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빅터 하네스이자 강한수입니다.”
난 솔직하게 대답했다. 감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가지고 있는 초감각과 전혀 상관없는 그냥 느낌에 불과하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광검제는 이곳에 존재하는 다른 인물들처럼 단순한 NPC 같은 것이 아니다.
광검제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랬던 거군”
광검제의 눈빛이 변했다. 지금까지는 그냥 무감정과 혹은 무시였다면 호감이 약간 보였다. 광검제도 내가 다른 지구의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른 쓰레기들은 만나 보았나?”
다른 안내인들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예, 여기가 아마도 마지막입니다.”
“운이 좋군.”
“예?”
“나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면 무조건 죽었을 테니까.”
광검제는 굉장히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역시 제국의 유산이라고 해야 할까. 사람을 살려서 내보낼 생각이 없이 만들어진 던전이다.
“이번에는 방식이 다른 겁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광검제가 안내인이 아니라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눈앞의 광검제가 만약 왕년의 광검제와 같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이브러쉬와 제멜아크 두 국가의 정예를 모두 끌고 와도 이기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여태까지와는 다른 방식이라는 것도 신경쓰였다. 결코 쉬울 것 같지 않았다. 제국의 마법사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던전을 만들었던 것일까?
“저기 저도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며 끼어들었다.
“너는 뭐지?”
광검제의 질문에 가브리엘 스피노자는 조금 전의 나처럼 자신을 소개했다.
“가브리엘 스피노자라고 합니다. 제멜아크 왕국의 남작입니다.”
“닥치고 있어라.”
광검제가 차갑게 말하자 가브리엘 스피노자는 감히 대들지 못하고 바로 찌그러졌다.
내가 기억 속에서 다른 용사들과 함께 있는 모습만 보았기에 비교적 정상인 같은 모습만 봐서 그렇지, 이것이 본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왜 광검제라는 이명이 붙었겠는가? 그가 저지른 기행이나 미친 짓이 역사서에 수도 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가장 큰 기행으로는 첫 번째 마왕군과의 전쟁이 끝난 후 광검제는 무척 많은 사람을 죽였다. 추정하기로 그 숫자가 만명이 넘었다.
누가 보면 만명을 별거 아니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전부 귀족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숫자다. 그 시절 제국에 귀족이 많았다고 해도 제국 귀족의 3분의 1 이상이 쓸려나간 대형 사고였다.
그럼에도 제국에서는 그런 광검제를 제지하지 못했다. 제국의 모든 전력을 동원해도 용사들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광검제와 이곳에서 싸운다? 정말 운 좋게 한번 이긴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 내일이면 다시 살아날 것 아닌가?
광검제는 마왕과 전쟁에서 도망치거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귀족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광검제가 강현수였다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내가 광검제라도 분명 그렇게 했을 테니까.
“그럼 저희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면 됩니까?”
“나와 함께 싸운다. 그리고 이겨야 한다.”
광검제와 함께 싸워서 이기지 못할 상대가 있나? 그런데 그런 상대가 딱 하나 있었다.
“피체둘라입니까?”
광검제의 입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너는 꽤 많은 것을 알고 있군?”
“그렇진 않습니다. 우연히 주워들었습니다.”
“맞다. 피체둘라와 싸워야 한다.”
‘이런 미친···.’
속으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초월자 이상의 상대와 싸워야 한다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광검제가 우리 편이라고 해도 초월자 그 이상의 존재들 싸움에 휘말리기만 해도 죽을 것이다.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원래 피체둘라보다 훨씬 약하게 만들어졌으니까.”
안심할 수는 없다. 약하다고 해도 마왕이다.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괴물이다.
“이곳은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겁니까?”
지금 이 던전은 원래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만들었던 이공간이 아니다. 제국에서 던전으로 만들기 위해 손을 본 것이다.
그런데 아스트로퍼의 말을 들어보면 제국에서도 원래 이공간을 크게 변화시키진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마왕, 피체둘라는 이곳에 원래 있었다고 봐야 했다. 매일 마왕과 싸워야하만 하는 광검제?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그런 것을 만들었을 것 같지 않다.
“그건 아니지. 황제가 워낙 부탁하기에 살짝 구조를 변화시킨 것 뿐이다.”
제국의 마법사들이 바꾼 것이 아니라 황제의 부탁을 받고 스스로 바꾼 것이라는 건가? 스스로 구조를 바꾸는 던전이라니 그런 것은 정말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아니 애초에 이곳은 던전이 아니었으니 스스로 던전이 되었다는 건가.
옆을 슬쩍 보니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었다. 묻고 싶은 것이 정말 많은 모양이다.
“정신없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죽이겠다.”
광검제가 그곳을 보지도 않고 싸늘하게 내뱉었다. 가브리엘 스피노자의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정지했다.
“아무리 약해졌다고 해도 저희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약합니다.”
6성 검사에 4 서클 마법사지만, 광검제나 마왕 앞에서는 눈앞에 날아다니는 파리 수준도 되지 않을 것이다.
“알고 있다. 그러니 힘을 주지”
광검제가 한쪽 손을 들자. 광검제의 옆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공간을 찢고 나온 것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광검제보다 훨씬 익숙한 얼굴이었다.
“미레이 얘들에게 힘을 줘”
“오랜만의 훈련병들인걸?”
갑자기 튀어나와 나와 가브리엘 스피노자를 보며 붉은 입술을 핥는 여자는 멸악의 마법사,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였다. 평소에 자주 보는 아스트로퍼와 비슷한 그러나 좀 더 미화된 느낌?
“훈련병입니까?”
“그래 훈련병이지 이곳은 원래 훈련소였으니까.”
이제야 이곳의 원래 용도를 알 것만 같았다.
“광검제께서는 피체둘라를 완전히 없애지 못한 것이군요.”
“그래 두 번이나 그랬지.”
아니다. 두 번이 아니다. 광검제는 마왕과 싸웠다. 지구에서 한번, 그리고 아노더스에서 두 번. 이곳이 만들어진 것은 광검제가 아노더스에서 두 번째로 싸우기 전이다.
“아니요. 세 번입니다.”
“음?”
광검제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표정을 지었다.
“이곳이 만들어지고 난 후에 한 번 더 싸우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홀로 막아내셨습니다.”
“그렇군. 그랬을 거야.”
광검제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뭘 했어?”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질문을 던졌다.
“그때는 이미 연세가···.”
“크학!”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시늉을 하자 광검제가 얼른 부축했다. 내가 보아왔던 것과 달리 이곳에서 둘은 마치 사이좋은 연인관계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제작자인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의중이 들어갔다고 봐야 할까.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
“그리고 피체둘라가 또 기회를 보고 있습니다.”
광검제와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표정이 동시에 무섭게 변했다.
“바깥은 몇 년이나 지난 거지?”
“용사님들께서 처음 마왕을 막아내신 지 약 400년이 지났습니다.”
“나는 뭘 하고 있지?”
가상의 광검제가 진짜 광검제가 뭘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보다 400년이 지났지만 진짜 광검제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모릅니다. 모습을 감추신 지 오래되었습니다.”
보통은 죽었다고 했겠지만, 광검제의 흔적을 지구에서 본 적이 있는 나는 모른다고 답했다.
“제길, 그럴 줄 알고 이곳을 만들었던 건데···.”
광검제의 혼잣말에서 유추할 수 있는 정보라면 아마도 이곳은 용사들이 사라진 세상에서 다음 마왕의 침공을 막아낼 새로운 용사들을 훈련하는 훈련소였던 모양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제대로 왔잖아?”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그런 광검제를 위로했다.
“그래, 확실히 저 녀석은 다르긴 한 것 같네. 나와 닮았어.”
닮았나?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평행세계라고 해도 외모가 똑같던데 강한수와 강현수는 너무 다른 것 같다. 그런데 강한수 시절의 내 얼굴이 떠오르질 않는다. 젊었을 때 나는 어떻게 생겼더라? 워낙 오래전 일이고 대격변 이후에는 굳이 무언가로 내 얼굴을 비춰볼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었다.
“이번 한 번 뿐이겠지만, 잘 배우도록 해.”
광검제가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에게 신호를 보내자. 곧바로 우리 몸에 변화가 생겼다.
“우오오옷!”
이번에는 광검제의 위협도 소용이 없었는지 가브리엘 스피노자의 입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끝없이 솟아오르는 힘이 느껴진다. 감각이 끝없이 확장되고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가브리엘 스피노자처럼 괴상한 소리를 내진 않았다. 나는 이것을 이미 한번 경험해본 적이 있었다.
암테일 영지의 던전을 공략할 때 임시였지만 초월급의 힘을 가진 적이 있었다. 이것은 그때와 같았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겁니까?”
마법적인 원리일까? 만약 그렇다면 한정된 공간에 한정된 힘이라고 할지라도 마왕을 그곳으로 불러내어 수십명을 초월급으로 올려놓은 후에 싸우면 되지 않을까?
“못할 게 뭐가 있어? 나는 이곳에서 신인걸?”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대답에 나는 머리가 조금 멍해졌다.
‘신의 힘이라고?’
여기는 이공간이다. 아공간과 완전히 개념이 다른 또 다른 하나의 세계이다. 그리고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는 이곳의 제작자다. 그렇다는 것은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분신이 신과 같은 힘을 사용해도 이상하진 않다.
그렇다면 암테일 영지에서 나에게 그런 힘을 준 것은 뭐지? 그 오두막에서 보았던 두 사람이 떠올랐다. 나는 신을 만났던 것일까?
“적응이 쉽지 않을 거다. 너희들이 직접 싸우라고 준 힘이 아니다. 죽지 말라고 준 것이지. 미레이 시작하자.”
“응!”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앙증맞은 손가락을 한번 튕기자 무언가가 나타났음이 느껴졌다. 초월급에 올랐기 때문에 감지가 된 것이다. 평소라면 어림도 없을 정도로 무척 먼 곳이다. 방향으로는 성남 쪽이었다.
한없이 불길하고 기분 나쁜 끈적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이것이 마왕인가?
“그럼 오랜만에 몸이나 좀 풀어볼까?”
“응!”
광검제와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는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하고 나도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저도 같이 좀...으아아!”
콰앙!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갑자기 늘어난 힘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대로 벽을 들이받아 커다란 구멍을 뚫고서 밖으로 사라졌다.
“지름길이 생겼네”
우리는 방향을 바꿔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지구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마왕, 한번 구경이나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