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51화 (151/206)

151. 힘의 근원

내가 꺼낸 것은 아렌 세인티아의 정수였다. 예전엔 준비가 되지 않아 먹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먹을 수 있다. 거기에 지금 이 공간에서만큼은 신이나 다름없는 두 사람이 곁에 있다. 이것보다 좋은 보험이 어디 있겠는가?

“그거 엄청 더러운 거야. 알아?”

광검제가 질린 표정으로 말을 한다. 광검제도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야 좀 인간미가 보인다.

“압니다. 아렌 세인티아님으로 만든 것이죠? 멸악의 마법사께서 만드신 거고요.”

“아는데도 먹는다고?”

“지금이 딱 좋은 기회니까요.”

“너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빨리 강해지겠죠.”

나는 교주를 이길 만큼 강한 힘도 필요하지만, 빨리 강해져야만 하는 이유도 있다. 교주나 부교주가 문제가 아니다. 지금은 우방에 가깝지만 당장 던전 밖으로 나갔을 때 제멜아크 왕국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 모른다.

양 국가는 사이가 나쁘지 않지만, 그렇다고 경계를 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 검제와 검성이 이곳에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힘의 균형이라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내가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간다면 왕국 간의 힘의 균형이 무너진다. 하지만 근소한 차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성장해서 나간다면?

내 힘으로 라이브러쉬 왕국 내의 호전적인 파벌을 눌러버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된다면 어떨까?

“좀 도와주십시오.”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대놓고 광검제와 멸악의 마법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하하! 나는 좋아! 내가 만들었지만, 저것 먹으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거든”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는 깔깔거리며 찬성했다.

“죽지는 않게 해주마.”

광검제도 마지못해 찬성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주저 없이 제법 큰 환약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역시 이것도 책에 나오는 영약처럼 스르르 녹아 사라지거나 하진 않았다.

고무를 씹는 것 같은 식감의 환약을 나는 우걱우걱 씹었다. 그런데 의외인 부분도 있었다. 재료가 재료이니만큼 끔찍한 맛이 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최소한 내가 만들었던 토끼꼬리풀 영약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맛이 나쁘지 않다. 전생에 담배를 끊는다고 먹었던 적이 있는 은단과 맛이 비슷한 맛이다.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다. 열심히 씹어서 침과 함께 얼른 삼켰다. 얼마 동안은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때? 어때?”

옆에서 호들갑을 떨며 대마법사가 상태를 물어왔다. 이렇게 보니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와 아스트로퍼는 정말 똑같다.

“아무 느낌도 없습니다.”

정말 아무 느낌도 없었다. 내가 영약을 먹어본 적이 거의 없긴 하지만, 이렇게 아무 증상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상한데? 오래돼서 상했나?”

아무리 나라도 그건 좀 그렇다. 인간을 재료로 만든 약이 오래돼서 상했다니 비위가 상한다.

“가짜인가?”

광검제도 의문을 표했다. 차라리 이것이 가능성이 높았다. 진짜 가짜인가?

그러나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폭발했다. 오러홀이나 마나 서클이 반응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몸 어딘가가 터진 것도 아니다. 마치 내 존재자체가 폭발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가 사라졌다. 사이코 메트리로 기억을 읽을 때와 비슷했다. 서서히 시야가 돌아오면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뭐지? 내가 왜 이런 곳에 누워있지?’

대충 통나무를 이어 붙인 것 같은 천장이 보인다. 나는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몸이 굉장히 무거웠다. 중력이 수십 배로 증가한 느낌이었다.

“저 녀석 또 왔네?”

“이번에도 이상한 방법을 썼는데?”

누군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불편한 자세로 눈동자를 굴려보니 이미 본 적 있는 사람들이다. 엄청난 미남과 중년인 정확히는 사람은 아니다. 저 존재들의 정체를 이제 나는 알고 있다.

“편법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지.”

“이번엔 저 녀석이라는 거야?”

“그건 네가 정해야지. 왜 나에게 물어봐?”

두 지고한 존재가 뭐라고 떠들던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켜 세워 앉는 데 성공했다. 단지 몸을 일으켜 앉은 것뿐인데도 진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정말 온몸의 힘을 모두 사용했다. 근력도 오러도 이곳에서는 아무 소용없는 것 같았다.

“네가 정해주면 편하잖아.”

“이 자식아 넌 일 안 하냐?”

두 존재가 옥신각신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니 왠지 화가 났다. 이런 것들이 신이라고? 이러니까 세계가 멸망하는 것 아닌가? 그걸 왜 지켜보는 거지?

“쟤 너에게 할 말이 많은 모양인데?”

많다. 정말 많다. 그런데 입이 움직이지 않는다. 몸을 일으키는 것은 됐는데 왜 입을 움직이지 않는 걸까?

중년인이 자세를 바꿔 앉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저 보는 것뿐인데도 숨이 막혀왔다. 그런데 나 지금 숨을 쉬고 있긴 한가?

“우리가 일을 안 하는 거 같지?”

안 하고 있는 것 맞지 않나?

“나도 인간이었던 시절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인간이었나?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건가? 하기야 광검제 정도면 이미 인간이라고 하기도 뭣하다. 강함을 떠나서 이미 400년을 넘게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자리에 앉아보면 그게 아니란 말이지. 그리고 아무것도 안 하진 않았다. 피체둘라 괘씸한 놈이 10년 정도는 움직이지 못하게 해뒀지.”

마왕의 이름이 나왔다. 설마 교주가 있던 제멜아크 동부 사막을 날려버린 것이 이 사람 짓인가?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10년,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지만, 교주가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에게 성장할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물론 저쪽에 교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교주는 여전히 위협적인 상대다.

“싸워서 이겨내라. 넌 이미 한번 경험이 있잖냐?”

내가 다시 태어난 것을 알고 있는 건가? 그렇겠지, 신이니까. 알고 있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경험이라...나는 패배한 경험이 있다. 광검제처럼 이겨내서 세상을 지키지 못했다.

“모르겠느냐? 전승자야. 네가 살았던 세상은 멸망한 것이 아니다. 그 수많았던 생명들이 너를 응원하며 힘을 주고 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뻥 뚫린 느낌이 들었다. 내가 변이체 놈들의 힘을 흡수하게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이나 지구를 오갈 수 있는 통로를 가지게 된 것 모두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살릴 수 있는 겁니까?”

갑자기 입이 트였다. 궁금했다. 아직은 아니지만 모든 생명이 사라지는 것이 확정된 지구를 다시 살릴 수 있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가능하다.”

그 대답이면 충분했다. 지구를 살릴 수 있다고? 방법 따위는 모르겠지만, 신이나 되면서 없는 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제 가거라”

다음 순간 나는 잠시 의식이 사라졌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왔다.

“어, 왔다!”

눈을 뜨자. 앞에서 호들갑을 떨고 있는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보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너 사라졌었어!”

“예?”

“갑자기 빛이 슈슝! 하더니 너 사라졌었다고.”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말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시선을 돌려서 광검제를 보니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 존재가 이 세상에서 잠시 사라졌었다. 그곳에 다녀왔나?”

“예”

“그래, 아렌도 그랬었지. 그리고 나도 그랬었다.”

전대 용사들이 경험한 것을 내가 똑같이 경험한 것을 보니 진짜로 내가 이번 용사가 된 모양이다.

“몸은? 몸은 어때?”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말을 듣고 몸 상태를 확인해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이런 미친···!”

오러홀 안에서 회전하고 있는 별의 갯수가 아홉개다.

“만족하지 마라. 애송아. 그 정도로는 한참 부족하다.”

광검제가 현실을 일깨워줬다. 9성 기사가 되었어도 광검제와 마왕의 전투를 생각해 보면 9성 기사라도 일검을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런데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몸 안을 돌고 있는 오러의 느낌이 다르다. 오러의 질이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원래도 내 오러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지만, 거기에 뭔가가 더 추가된 느낌이다.

“얘, 아렌처럼 변했어.”

내가 오러를 살짝 끌어올리며 확인하자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그것을 알아보았다.

“신성력이군.”

이번에도 광검제가 답을 내주었다. 평생 신을 믿어본 적도 없는데, 신성력을 쓰게 생겼다.

“별로 놀랄 것은 없다. 용사는 다들 가지는 힘이지 용사의 의무가 끝나면 사라질 힘이다. 피체둘라의 하수인들을 처치할 때 조금 유용하지”

광검제는 대단한 것을 대단하지 않게 설명하는 재주가 있었다.

어쨌든 좋은 힘을 얻었다. 갑자기 3단계나 승급을 해서 지금 내 힘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이 잘 되지 않는다.

그리고 경지는 올랐지만 지금 나는 속 빈 강정과 같다. 절대적인 경험이 부족하다. 수십 년에 걸쳐 실력을 차근차근 쌓아 올린 천재들과 비교할 수가 없다. 임시로 경지가 올랐던 것과 크게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럼 이제 던전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했다. 내가 이곳에 들어온 목적은 어디까지나 던전을 공략하고 제멜아크의 왕세자를 살려서 데리고 나가는 것이었다.

설마 여기서 광검제나 멸악의 마법사와 싸우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마왕을 다시 불러낸다고 해도 이길 자신이 없다.

“뭐긴 여긴 이제 문 닫는 거지”

“던전이 사라지는 겁니까? 그럼···.”

“던전은 사라지지만, 이 세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이제 훈련소로도 던전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뿐이야.”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손을 한번 흔들자 광검제와 마왕의 전투로 무너졌던 주위의 건물들이 원상태로 복구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이곳에서는 신이다.

“그럼 이것은 쓸모가 없는 겁니까?”

나는 던전을 공략하면서 얻었던 물건들을 꺼내놓았다.

모아서 조립하면 마왕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는 그것들의 부품이었다.

“아, 그거 필요해?”

“가지고 있으면 쓸모가 있지 않겠습니까?”

“알았어”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는 품에서 자기 몸통보다 큰 책을 꺼내 펼쳤다. 안에는 아무것도 쓰여있는 백지였다.

뭐가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책을 보고 웅얼거리면서 영창을 시작하자 강력한 마력의 반응이 느껴졌다.

과연 대마법사라고 할까. 마력 반응이 상상을 초월했다.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큰 산이 앞에 나타난 느낌이었다. 경지가 오르지 않았다면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꺼내놓았던 물건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액체처럼 흐물거리게 변하더니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나는 여태까지 그 조각들이 조립되어 하나의 물건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냥 의미 없는 형상이었던 모양이다. 이걸 어떻게 조합하면 무기가 될 수 있을까. 열심히 궁리했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정해진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미레이가 그렇게 치밀하고 계획적인 인간처럼 보이나?”

내 물음에 광검제가 한숨을 쉬며 대답해주었다.

하나로 합쳐진 검은색의 액체금속은 공중에서 흐물거리며 조금씩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미레인 반 스트라이더가 굉장히 진지한 얼굴로 집중하는 것을 보면 쉬운 작업은 아닌것 같았다.

“기대는 하지 마라.”

광검제가 중간에 한마디를 했지만, 어차피 무기라면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작업이 끝났다.

“어때? 지금 생각나는 대로 만들어 봤어.”

“뭡니까. 이건?”

작업물의 결과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무기라고 하면 적어도 칼, 도끼, 창, 활 그것도 아니라면 총이나 대포 정도가 나와야 한다.

“마왕용 무기?”

“그러니까. 왜 인형입니까?”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업물은 금속인형이었다. 심지어 귀엽지도 않다.

“검 같은 걸로 만들어줘도 큰 의미가 없잖아? 가까이 접근해서 찌를 수 있겠어? 그 정도 실력이 있으면 보통 검으로 찌르나 큰 차이 없지 않을까?”

분명 틀린 말은 아닌데 그렇다고 무기가 인형이 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잘 봐. 이걸 어떻게 쓰는 게 보여줄게.”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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