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무너진 균형
검은색 금속인형이 고장 난 로봇처럼 불편한 움직임으로 삐그덕거리면서 일어섰다.
“이건 아무 능력 없어도 약간의 마나만 있으면 가동시킬수 있는 아이거든”
인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고장 난 로봇 같던 것이 무척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봇은 마치 격투가인 것처럼 싸우는 동작을 취하기도 하고 육상선수처럼 달리기도 했다. 비록 크기가 무릎 정도밖에 오지 않지만 저런 움직임이라면 어지간한 기사도 잡기 힘들 것 같았다.
“어때?”
확실히 좋은 물건이 맞다. 그런데 이게 마왕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 무기 같지는 않다.
“유용한 물건 같네요.”
초월급 대마법사이자 이 공간의 신 앞에서 쓸모없을 것 같다고 말할 배짱은 없다.
“쯧쯧! 이게 단순히 움직이는 인형이라고 생각한 거겠지? 이것은 진가는 그게 아니야. 잘 봐”
그러자 인형이 붉게 달아오르면서 움직임이 변하기 시작했다. 일단 빠르다. 반푼이라고 하지만 9성 기사가 된 내 눈으로도 움직임을 쫓을 수 없을 만큼 빨라졌다. 그런데 인형이 점점 더 붉게 달아오르는 것 같다.
위험감지가 도망치라고 미친 듯이 경고를 보내기 시작했다.
“잠깐, 그거 일회용이잖아.”
“시범을 보여준다고 사용할 뻔했네. 헤헤!”
광검제가 한마디 하자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짓고 인형을 멈췄고 혀를 내밀고 귀여운 척을 했다. 수백살 먹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도 귀엽지 않지만, 실수로라도 그런 말을 뱉었다간 가루로 남길 수 없을 것이다.
“굉장히 빨라지는군요.”
“그렇지? 최고로 성능을 올리면 마왕이 방심할 때 접근할 수 있을 정도는 될 거야.”
그래서 그게 다인가? 저 조그만 녀석이 빨라지는 건 알겠지만, 마왕에게 접근한다고 해서 한 방 먹일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광검제는 이것을 일회용이라고 했으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거 폭탄입니까?”
“어떻게 알았지?”
“일회용이라고 해서요.”
자폭드론 같은 거였군. 확실히 그런 것이라면 실력이 없는 사람도 마왕에게 한 방을 먹일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자, 너에게 큰 도움은 안될 것 같지만 넣어둬. 사용법은 별로 어렵지 않아.”
어려울 것 같은데? 단순히 마나만 있으면 된다고 했지만, 방금 그런 움직임을 로봇이 알아서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이건 차라리 스테이시에게 주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하나는 끝났고 다른 하나가 남았다. 이곳의 진짜 정체성이라고 해야 할까.
“혹시 이곳에 스트라이더 1000번이 있습니까?”
“어, 맞다. 그거 황제가 줬었지.”
답은 바로 나왔다. 이번에도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품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런데 물건을 꼭 저기서 꺼내야만 하는 걸까?
어쨌든 기대가 된다.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만든 물건 중 최고라고 할 수 있는 1000번은 과연 어떤 물건이고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을까?
“자, 이것도 가져가.”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내민 것은 기묘한 모양의 물건이었다. 작은 말뚝이라고 해야 할까? 마법사들이 쓰는 작은 완드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건 뭐 하는 물건입니까?”
“무려 주변의 마나 파장을 바꿀 수 있는 물건이야. 대단하지?”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는 대단한 것처럼 말했지만, 전혀 모르겠다. 마나 파장을 바꿀 수 있으면 뭐가 어떻게 된다는 것일까?
물론 마나 파장이 뭔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바꿨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기에 이런 아이템을 만들었는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데 좀 자세히 설명을 해주십시오.”
대답이 나온 쪽은 광검제였다.
“그것을 땅에 박고 파장을 잘 조절한다면 너의 지구에서도 생명을 키울 수 있다.”
충격이었다. 왜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물론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이런 능력을 가진 물건을 만들 능력이 없기도 했지만, 상상도 하지 못한 기능이었다. 지구와 아노더스의 마나가 다른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바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광검제가 이 물건의 용도를 알고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지만, 이것은 마치 지구에서 사용하려고 만든 것이 아닌가?
“참고로 이건 두 개를 만들었어. 하나는 지르크에게 줬고 다른 하나가 이거지.”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럼 광검제께서는?”
“진짜 나는 그곳에 있겠지.”
역시 광검제는 지구에 있었다. 그런데 왜 자신이 살던 지구가 아니라 내가 살았던 멸망한 지구일까?
“어째서 그곳입니까? 원래 살던 세상이 아니라요.”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했었다. 그런데 내가 도착한 지구는 내가 살던 곳이 아니더군.”
“그것도 내가 만들어줬어!”
알고는 있었지만, 미친 능력이었다. 어떻게 보면 마왕을 세 번이나 물리친 광검제보다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더 대단해 보였다. 이공간을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서 다른 차원으로 가는 물건을 만들었다는 것 아닌가?
“황제는 실망했겠군요. 멸악의 마법사가 만든 최고 역작이 지구를 위한 물건이었으니까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그야 생물이 번식하지 못하는 지구를 위한 물건 아닙니까?”
“똑똑한 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파장을 조절할 수 있다고 했잖아.”
“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이건 생물이 번식하지 못하는 지구를 살릴 수도 있는 물건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멀쩡한 세계를 초토화시킬수도 있는 엄청난 무기였다. 이것을 아노더스에서 사용하고 고의로 마나의 파장을 뒤틀면 죽음의 대지 같은 것이 만들어질 것이다.
과연 제국의 유산 중 최고의 던전에 넣을 만 했다. 이걸 적국의 수도에 박아버린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만약 제국의 후계자가 이것을 손에 넣었다면 제국의 부활까지는 몰라도 라이브러쉬와 제멜아크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것에는 성공했을 것이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나쁜 짓 하는데 사용하면 안 된다?”
“약속드리건대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나는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건네주는 1000번을 건네받았다. 손에 들린 작은 말뚝, 이것만 있으면 어쩌면 지구를 다시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끝입니까?”
“그래, 줄 것도 다 줬고 네가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도 없지.”
“그렇군요.”
그렇지만 이렇게 헤어지기에는 뭔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광검제에게 한 달 아니 며칠만 더 배울 수 있어도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가라”
그런 생각을 읽었는지 광검제가 파리 쫓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어떻게 나가야 합니까?”
“지금 바로 나갈래?”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물음에 나는 잠시 생각했다. 지금 이대로 모두 밖으로 나가도 상관없겠지만, 그것은 그림이 별로 좋지 않다.
“나가고 싶을 때 나갈 수 있는 겁니까?”
“어느 정도는 봐줄 수 있지.”
“그럼 제가 일행과 합류하고서 나갈 수 있게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 그렇게 해”
나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감사했습니다.”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와 광검제가 미소를 지었다.
“이제 편히 쉴 수 있겠군.”
“이제 하다 말았던 공사를 계속할 수 있겠어.”
둘은 다정한 연인처럼 보였다. 한명은 이미 300년 전에 죽은 사람이고 다른 한명은 무슨 이유에선지 아직 죽지 못하고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영원한 연인인 것이다.
“저희가 다시 볼 일은 없겠지요?”
“없을걸? 없어야 정상 아닐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제 진짜 이별의 시간이 다가온 느낌이었다.
“나를 찾아가라.”
광검제가 마지막으로 무심하게 한마디를 흘렸다. 그렇지 않아도 진짜 광검제도 자신을 찾아오라고 쪽지를 남겼었다. 이제 혼자서도 지구를 활보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본격적으로 광검제를 찾아 나설 것이다.
“알겠습니다.”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는 전에 사용했던 거대한 마법서를 다시 품에서 꺼냈다. 그리고 나에게 내밀었다.
“이건 황제가 맡긴 것이 아니긴 한데 너에게 줄게.”
“엄청나게 중요한 것 아닙니까?”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마법서라니 말도 안 되는 보물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에겐 쓸모가 없는걸? 바깥세상이 어떨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살던 시대보다는 많이 발전했겠지? 그래도 내가 연구했던 것들이 완전히 쓸모없진 않을 거야.”
“아니요. 전혀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마법사님의 발끝도 못 따라가고 있지요.”
“그래?”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는 왠지 조금 기뻐 보였다.
“그럼 더 도움이 되겠네. 네가 봐서 내 후계자가 될만한 아이에게 건네줘. 아니면 너도 재능이 있어 보이니 네가 사용해도 좋고.”
당장은 스테이시가 떠올랐지만, 내가 사용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보물을 거절하면 바보였다.
“잘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마법서를 넙죽 받아 챙겼다.
“그럼 아까 그 멍청한 애하고 같이 사람들 많은 곳으로 보내주면 되는 거지?”
졸지에 제멜아크 왕국 최고의 천재가 멍청한 애가 됐다.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눈으로 본다면 멍청이 아닌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나. 날고기는 천재라고 해도 교수님의 시야로 보는 학부 1학년생 수준일 것이다.
나는 가브리엘 스피노자를 찾아서 공략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이동 서비스까지 해준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지요.”
“그래, 그럼 네 일행하고 만나고 세 시간 쯤 후에 밖으로 나가게 해놓을게.”
“알겠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두 사람을 마주 보며 다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럼 영원히 행복하시길.”
이 세계가 그들에게 영원한 천국으로 남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고개를 들었을 땐 공략대의 야영지로 돌아와 있었다.
“어흐으으으”
옆에서 신음이 들려 쳐다보니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눈을 감고 드러누워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뭐합니까?”
내가 부르는 말에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눈을 뜨고 상황을 확인하는듯하더니 몸을 벌떡 일으켰다.
“빅터 공자 어떻게 나를 버려두고 갈 수가 있습니까. 덕분에 죽을 뻔했습니다.”
거리가 그리 가깝진 않았지만, 광검제와 마왕의 전투 여파가 그곳까지는 닿았을 것이다. 그래도 임시로 초월급에 올라가 있었으니 어떻게든 방어는 했던 모양이다. 꼴은 거지꼴이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어보였다.
“다친 곳은 없어 보여 다행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겁니까?”
“이야기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 하도록 하지요.”
그렇지, 우리가 나타난 것을 느끼고 바람처럼 달려오고 계신 분이 있었다. 스승님이었다.
“괜찮은 거냐?”
스승님은 나를 보자마자 안부를 물으셨다. 나는 오히려 이곳이 걱정이었다. 전투의 여파가 이곳까지 충분히 닿았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괜찮습니다. 이곳은 문제없었습니까?”
“그래, 어떻게든 버텨냈다. 그런데 너?”
“기연을 얻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스승님은 단번에 내 기세가 달라진 것을 알아보셨다.
“하하!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을 알았지만, 빨리 왔구나.”
스승님은 매우 기뻐하셨다. 자신보다 제자가 강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다. 그러나 스승님에게는 그런 것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스승님과 그렇게 해후를 나누고 있을 때 바이런 후작과 왕세자도 달려왔다. 그 외에 슬라이트와 친구들도 모여들었다.
3시간 정도를 준다고 했으니 시간은 충분했다. 우리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 이곳을 떠난 이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앞부분은 가브리엘 스피노자가 설명했다.
가브리엘 스피노자는 우리가 국정원에서 광검제와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를 만난 부분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뒷부분을 내가 설명했다. 나는 광검제와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에게서 물건을 얻은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분명 무언가를 얻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나 아무도 그것에 대해 추궁하지 않았다. 이미 바이런 후작도 내가 크게 성장한 것을 느꼈고 그것을 왕세자에게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라이브러쉬 왕국과 제멜아크 왕국 사이에 힘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순간이었다. 일종의 보고회가 끝나고 제멜아크의 왕세자가 조용히 나를 찾아왔다.
“빅터 하네스 공자, 그대는 두 왕국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왕세자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내 대답에 따라 대륙의 판도가 바뀔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