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개선장군
“지금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진심이었다. 나는 쓸데없이 인간끼리 싸우면서 피를 흘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긴장했던 왕세자의 표정이 풀렸다. 무엇보다 내 의중이 중요한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단”
조건이 붙는다. 내가 인간끼리 싸우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은 전쟁 그 자체가 싫은 것도 있지만, 말도 안 되게 강한 적이 이 세계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왕과의 싸움에 모든 힘을 다해 함께 싸운다는 조건이 붙어야 합니다.”
과거의 용사들도 첫 번째 마왕의 침공 때는 혼자 싸우지 않았다. 용사 아렌 세인티아와 그에 못지않은 어쩌면 그 이상이었던 동료도 네명이나 있었지만, 제국의 나머지 인간들도 모든 힘을 동원했었다. 거기에 그때는 엘프들도 참전했다.
그러나 지금은? 일단 나라가 둘로 나누어져 있다. 엘프들과는 교류가 없다. 당시의 제국에서도 마왕의 침공이고 뭐고 저만 살겠다고 병사들을 물리고 도망치는 귀족들이 많았다.
하나의 제국이었던 그때도 그랬는데 지금은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분명 그때보다 훨씬 많은 인간이 보신만을 생각하고 뒤로 빠질 것이다.
“그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왕세자가 다시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하나의 나라로 만드는 방법도 있겠지요.”
이름도 모르는 신이지만, 10년이라는 시간을 벌어줬다. 그 시간 안에 마왕과 싸울 준비를 마쳐야 한다. 만약 제멜아크가 동참하지 않겠다면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서 준비하는 방법도 있다.
왕세자가 나를 노려보았다. 그렇지만 이제 그런 기세에 주눅 들지 않을 힘을 가지게 되었다..
“좋네, 그것은 내가 약속하지”
“당연한 일입니다. 마왕에게 패배하면 세계가 멸망하니까요.”
당연한 일을 선심 쓰는 것처럼 말하는 왕세자에게 일침을 날렸다.
“만약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인류의 변절자로 처벌하는 조항도 있어야 할 겁니다.”
“과거 용사들처럼 하겠다는 건가?”
왕세자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귀족의 대부분을 죽이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갈 가치가 없는 인간들이니까요.”
그런 인간들은 지구에서 이미 충분히 보았다. 고위층의 대부분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행동했다. 결과는 인류의 멸망이었다.
“그것도 좋네.”
왕세자가 생각보다 쉽게 허락했지만, 많은 계산을 했을 것이다. 제멜아크도 귀족 세력을 왕가가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생각도 들어있을 것이다. 과거 제국이 바로 그러했으니까.
“말로만 하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정식 문서로 남겨주시죠.”
“우리는 가능하네만, 라이브러쉬 왕국이야말로 가능하겠는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시간을 들인 후 왕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가능하겠군.”
“시간이 꽤 지났습니다. 나갈 준비를 하시지요.”
나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왕세자는 고개를 끄덕인 후 돌아가 바쁘게 공략대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유산에서 얻는 보물도 중요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명분이었다. 비록 사람을 많이 잃었지만, 정예 병력은 아니었고 당당하게 나가는 모습이 중요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라이브러쉬의 공략대들도 갑옷을 정비하고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는 등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잡히지도 않을 정도로 멀어졌구나.”
슬라이트가 다가와 조금 맥 빠진 소리를 했다.
“너라면 금방 따라올 수 있을 거다.”
“되겠냐?”
9성의 경지, 용사 이후로 누구도 올라서지 못했던 곳이다. 그것을 쉽게 올라설 수 있는 것처럼 말하자 슬라이트가 반발했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지. 너 말고 자칼하고 스테이시도 각오해야 할 거다.”
10년의 시간이 있다. 마왕의 진짜 전력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내가 본 마왕도 절반의 전력이라고 했었다. 교주는 그 강림체라고 했으니 비슷한 수준이라고 쳐도 10년 안에 내가 그것을 감당할 수준이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9성의 경지에 올랐지만,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상상도 못 할 것을 보여주지.”
나는 녀석들을 지구로 데려갈 생각이다. 이제부터는 나와 내 주변 인물이 강해지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구에 널려있는 변이체들은 좋은 상대가 되어줄 것이다.
밖으로 나갈 시간이 되어 우리는 정렬했다. 그래봐야 라이브러쉬의 공략대의 숫자는 제멜아크 공략대에 비한다면 얼마 되지 않지만, 모두의 얼굴이 밝았다.
극악한 던전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나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그런 기쁨도 있을 것이지만, 이번 던전 공략에서 진짜 주인공은 우리라는 것을 알기에 느껴지는 자부심 같은 것이었다.
100명이 조금 넘는 인원으로 들어와 5천명이 들어와서 고전하고 있던 제멜아크 공략대를 구했다. 명예뿐만이 아니라 실리도 챙겼다. 6성 기사에 불과했던 빅터 하네스가 무려 9성 기사가 되었으니까.
“그런데 이 왕자는 어떻게 된 겁니까?”
나갈 준비를 하며 조금 늦었지만, 나는 스승님에게 물었다. 내가 돌아왔을 때 라이브러쉬 공략대에는 생각지도 못한 인원 손실이 있었다.
“나가봐야 자신이 어떻게 될 줄 알고 있었으니까. 뭐라도 해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우리 망나니 왕자는 자신을 지키고 있던 수행원들을 뿌리치고 국방부 바깥으로 탈주했다고 한다. 슬라이트와 스테이시가 추적했고 망나니의 시체를 발견해 돌아왔다고 한다.
시체가 발견된 곳은 바로 청와대였다.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스스로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있었지.”
스승님이 조심스럽게 꺼낸 것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상자였다. 정확히는 나도 똑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제국의 순혈입니까?”
“이 왕자의 소지품에서 나왔다.”
다른 제국의 유산과 다르게 이곳은 제국의 순혈이 필요하지 않은 곳이다. 이 왕자가 그것으로 뭘 해보려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 쓸모도 없었을 것이다.
저것을 국왕이 직접 이 왕자에게 챙겨준 것인지 아니면 이 왕자가 몰래 바꿔치기를 했는지도 모른다. 인제 와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만약 국왕이 우리에게 가짜를 넘겨줬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DNA 분석을 할 수 있는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것이 진짜 순혈인지 분간할 수 없으니 따질 수도 없었다.
“혹시 슬라이트나 스테이시가 직접 뭔가 한 것은 아니겠지요?”
“네가 본 친구들이 그런 짓을 할 아이들이더냐?”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라면 처리했을지도 모르지만, 친구들은 아직 그렇게 더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윽고 이동이 시작되었다. 공략대 전원이 서서히 흐릿하게 변하고 있었다. 순간이동처럼 밖으로 보내주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치 멸망하기 전의 서울처럼 수많은 사람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국방부의 건물 정문 쪽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광검제와 멸악의 마법사였다.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광검제는 그저 무뚝뚝하게 보고 있었지만, 눈빛에서 뭔가 애잔한 감정이 느껴졌다.
너도 고생 좀 해봐라 같은?
나는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했다. 옆에 계셨던 스승님이 뒤늦게 광검제와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뜨셨지만, 반응할 사이도 없이 우리는 완전히 사라졌고 다음 순간 던전의 입구에 나와 있었다.
나는 던전의 입구였던 곳을 돌아보았다. 들어갈 때와 다르게 이제는 그냥 평범한 토굴로 바뀌어있었다. 이제 완전해진 서울에서 광검제와 멸악의 마법사는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공략대의 천 명이 넘는 많은 인원이 갑자기 튀어나온 것과 별개로 던전 입구 주위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있었다.
“돌아왔다!”
던전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력 중 누군가가 크게 외쳤고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그런데 던전 입구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았다. 언뜻 느껴지기로도 몇천은 되는 숫자였다. 그것도 기사와 병사뿐만이 아니었다. 강자들이 느껴졌다. 최소한 넷이다.
검제와 검성 말고도 다른 7성 이상의 실력자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이 그저 우리를 환영하려고 모인 것은 아닌가 봅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안에서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우리를 처리할 생각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것 같구나.”
스승님도 불쾌함을 숨기지 않으셨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어렵게 사람들을 모은 것이 허사가 되었다.
안에서 어떤 결과가 나왔을 때 저 인원들이 우리를 공격하려고 했을지는 잘 모르겠다. 왕세자가 죽고 우리만 나왔을 때 그러려고 했을 수도 있고 혹은 그 반대의 경우에 움직이려고 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위력 시위를 해서 던전에서 얻은 보물들 협상에서 우위를 가져가려고 했을 수도 있다.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이미 제멜아크의 왕세자가 앞으로 나서서 검을 뽑아 치켜들고 큰 소리로 귀환을 알렸다.
“나 티에그린 제멜아크가 제국의 던전을 공략하고 무사 귀환했도다!”
“와아아아아!”
모여있던 기사와 병사들이 큰 함성을 질렀다. 저러니 마치 던전 공략을 왕세자가 주도한 개선장군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미 얘기가 되어있는 상황이었다.
명예는 제멜아크의 왕세자에게 준다. 하지만 실리를 챙기는 것은 이쪽이다.
검제와 검성 그리고 아직 누군지 알 수 없는 기사 둘이 왕세자에게 축사를 건넨 후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하하하하하하하!”
에인프라흐 공작이 말도 하지 않고 큰 광소를 터트렸다. 나는 굳이 기세를 숨기지 않았다. 내가 9성의 경지에 오른 것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당장 이곳에서 숨긴다고 해도 이미 저쪽에서 다 알고 있는 상황인데 의미 없는 일이었다.
검제 쿼런틴 피어스 공작이 경악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초연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시골 할아버지 같던 검제가 저런 표정을 지을 줄은 몰랐다.
검제의 뒤에는 처음 보는 중년의 기사 둘이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지만 차림새만 보고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남부의 창, 에반트 데자트 후작
폭검, 고트린 사이벡스 후작
모두 제멜아크 왕국의 7성 기사들이었다.
정말로 여차하면 이곳에서 우리를 처리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모양이었다.
검제와 검성이 동수라고 계산하면 이쪽은 스승님 하나인데 바이런 후작까지 가세한다면 저쪽은 세 명이니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제멜아크의 7성 기사들을 모두 부른다고 해도 상대할 수 없는 내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경지를 모두 내 것으로 만든 것이 아니기에 진짜 9성 기사라고 하기에는 모자랐으나 그렇다고 해도 7성 기사 한두명 정도 상대할 자신은 있었다.
그런 제멜아크의 생각을 모두 뒤집었기에 에인프라흐 공작이 저렇게 미친 듯이 웃고 있는 것이었다.
“잘했군! 잘했어!”
에인프라흐 공작이 다가와 내 어깨를 미친 듯이 두드렸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검제도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저 작은 기연을 얻었습니다.”
나는 조금 성의 없는 대답을 했다. 검제의 얼굴이 똥 씹은 것처럼 구겨졌다.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그래도 된다. 세상은 강자에게 너그러운 법이다.
“제가 긴 이야기를 직접 하기는 어렵고 가브리엘 스피노자 남작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나는 친절하게 한마디를 붙여줬다. 물론 진짜 중요한 부분은 가브리엘 스피노자도 알지 못하지만, 광검제와 멸악의 마법사를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뒤집힐 이야기였다.
던전 공략의 환영식은 아주 성대하게 벌어졌다. 왕세자의 치적을 최대한 알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제멜아크의 왕도에서도 축제가 벌어졌다고 들었다. 수많은 제멜아크의 귀족들이 선물을 잔뜩 싸들고 달려와 왕세자에게 축하를 전했다.
던전 앞 야영지에서도 연일 축하연이 벌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돌아가지도 축제를 즐기지도 못했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