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끝과 시작
매일 협상과 회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힘의 밸런스가 무너져서 이쪽으로 추가 기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은 내가 광검제와 멸악의 마법사에게서 받은 물건들은 나를 제외하고 본 사람이 없으므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뭔가 얻었다는 것을 추측하긴 어렵지 않을 테지만 증거는 없으니까. 나도 양심이 없는 인간은 아니기에 던전에서 나온 다른 모든 보물을 제멜아크에 양도하는 것에 합의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고 많은 재물을 대가로 받았다.
나에겐 보물들이 딱히 필요하지 않지만, 제멜아크는 공략 성공의 표시로 그 보물들이 필요했다.
세세한 협상 같은 것은 라이브러쉬에서 급파된 외교관들이 했지만, 나도 그 자리에 참석은 해야만 했기에 매일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는 제멜아크 왕국의 승전 행사에 불려 나가기도 했는데 이것은 이것 나름대로 참 힘든 일이었다.
제멜아크 왕세자는 약속을 지켰다.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국왕의 직인까지 찍힌 마법 서약서를 비공식적으로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전달했다.
하지만 나를 조금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는데, 공식 석상에서 제멜아크 공략대를 도운 공로로 나에게 영웅 칭호를 내렸다.
“이러시깁니까?”
“마음 같아서는 작위와 영지로 내리고 싶네만, 이것으로 참아주게”
대륙 최강자와 우호 관계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린 것이다. 뭔가 얻어먹을 것이 있나하고 찾아오는 온갖 아첨꾼과 모리배들이 몰린 것을 제외하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영웅 칭호와 함께 내린 왕실의 특권으로 나는 라이브러쉬 왕국의 준 귀족으로서는 유일하게 제멜아크 왕국의 영토를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는 특권과 제멜아크의 왕도를 제외한 곳에 장원을 하나 소유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일종의 특별시민권이라고 해야 할까. 한마디로 라이브러쉬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넘어와. 같은 성격이었는데 라이브러쉬에서 파견된 외교관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했지만, 내가 상관없다고 하는데 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나중에 여유가 된다면 제멜아크쪽에 별장을 하나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집에 돌아갈 날이 되었다. 아직도 협상할 문제는 많이 남아있었지만, 내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었다.
가벼운 여행이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예상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소요되었다. 돌아간다고 해도 할 일이 태산일 것이다.
올 때와는 다르게 제멜아크 왕국의 성대한 환송을 받으며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
몇 달 만에 돌아온 집은 떠날 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중간에 소식을 전해 듣긴 했지만, 숙련된 정원사 하나와 비록 하급 정령이라고 하나 정령사의 힘은 놀라울 정도였다.
황폐했던 저택의 마당이 엘프의 숲처럼 변해있었다. 놀라운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폴켄이 급성장했다. 이 녀석도 슬라이트 못지않은 천재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딱히 지도해주는 사람도 없었는데 혼자서 훈련하여 엄청난 성장을 보여주었다.
엄연히 폴켄도 스승님의 제자인지라 함께 있어 주지 못했던 스승님은 대단히 미안함을 느끼셨다. 정작 폴켄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지만, 스승님은 한동안 폴켄의 지도에 전념하시기로 하셨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바빠졌다. 매일 왕궁에 불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던전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서로 제출하고 국왕과 왕세자를 비롯해 에인프라흐 공작까지 모아놓고 다시 긴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내가 던전 안에서 급성장하지 못했다면 어쩌면 제멜아크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내놓은 자식이고 돌아왔을 때 유폐가 확정된 왕자였다곤 하지만 망나니 왕자가 죽었다.
원래라면 그 책임을 누군가 지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9성의 경지에 오르며 그것도 흐지부지한 이야기가 되었다.
물론 망나니 왕자를 보필하던 수행원들은 망나니를 놓친 것에 대해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사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죄였지만, 이 사람들도 지은 죄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낮은 처벌인 파면으로 끝났다.
그리고 그 수행원들은 모두 내가 고용해 암테일 영지로 보냈다. 내가 왕실과의 거래를 한 결과였다. 그곳은 지금 사람을 아무리 보내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죽을 위기에 있던 사람들을 살려서 일자리까지 줬으니 성심성의껏 노예처럼 일할 것이다.
원래 공략대에 참가하는 것에 대한 보상도 전부 수정해야만 했고 그 협상도 다시 해야 했다. 다행인 것은 굳이 내가 뭔가를 제시하지 않아도 왕실 쪽에서 수십 가지 방법을 제시해왔다.
결과적으로 스승님은 후작으로 바로 승작하셨고 나는 백작이 되었다. 암테일 영지 인근의 남작령과 자작령이 5개의 소유권이 모두 우리에게 주어지면서 봉신가문에 되기를 원치 않는 가문들의 대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야말로 신흥 대귀족의 탄생이었다.
국왕과 왕세자 그리고 에인프라흐 공작과의 만남이 자주 이뤄지면서 최고권력자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해가 넘어가고 나는 17살이 되었다. 이제야 시간이 나서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마신교에 관한 일은 국왕과 에인프라흐 공작과 며칠 밤을 새우며 토론해 결과를 냈다.
둘이 생각하는 것처럼 부교주는 죽지 않았고 교주도 어딘가에서 힘을 모으고 있다. 힘을 회복한 교주의 힘은 왕년의 마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부터 준비해도 늦다.
대충 이런 내용을 열심히 전달했고 국왕과 공작도 납득하는듯했으나 역시 직접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실감하지는 못하는듯 했다.
하지만 제멜아크에서 받아냈던 것과 같이 마왕이 나타났을때 모든 국력을 동원해 대항하겠다는 것과 인류의 배신자들을 처벌한다는 서약서를 받아내는 것에는 성공했다.
이로써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할 만큼은 다 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와 그리고 내 주위 사람을 강하게 만들면 된다.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중요한 것은 마왕과 맞설 누군가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니까.
17세의 어느 봄날, 슬라이트와 자칼, 스테이시, 스승님, 폴켄 그리고 정령사 뮤어 아이번까지 포함한 대인원이 함께 지구로 건너갔다.
들어오기 전에 대충 설명은 해줬지만, 이들이 받은 충격은 꽤 컸던 모양이었다.
“이게 뭐야···.”
슬라이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구의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다. 모두 가상의 서울을 경험해본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런 시발”
자칼의 입에서도 욕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건 꿈일 거예요. 꿈이어야 해요. 꿈이겠죠?”
스테이시는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정령이 괴로워하고 있어요.”
가장 당황한 것은 뮤어 아이번이었다. 지구에서도 정령을 활용할 수 있다면 지구에 생명체를 부활시키는 작업 때 유용할 것 같아서 같이 데려와 본 것인데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치 자신에게 직접 고통을 받는 것처럼 뮤어 아이번이 괴로워하기에 나는 다시 통로를 열어 뮤어 아이번을 일단 돌려보내 주었다.
그나마 오래전에 비록 기상연구소에서 나온 적이 없긴 하지만 경험이 있는 폴켄은 충격을 받은 것 같진 않지만,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곳은 마치 그곳과 비슷하구나.”
스승님도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고 계셨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지만, 이제 스승님의 도움 없이도 큰 위험이 없는 나는 홀로 지구를 여행했다. 그리 먼 거리를 이동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몇번의 시행착오 끝에 안동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안동시는 세월의 영향을 덜 받은 것인지 몰라도 태백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좋았다. 그래도 무너지기 직전의 낡은 느낌이기는 했지만, 건물들의 상태도 양호한 것이 많았고 여러 가지 문명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안동 쉘터를 박살 냈던 녀석도 그대로 남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생에 내가 안동시 쉘터에 소속되어 있을 때 안동에는 변이체 여러 마리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중 몇 마리는 생존자들이 처치하기도 했고 변이체끼리의 영역 다툼으로 멀리 쫓겨난 녀석도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안동시의 주인이 되어 안동시의 쉘터를 파괴했던 놈은 바퀴벌레라고 부르던 녀석이었다. 다리와 별개로 곤충처럼 6개의 팔이 있는 녀석이었는데 손끝마다 날카로운 갈퀴가 있어서 벽이나 천장을 자유자재로 타고 올라가는 녀석이었다.
물론 무척 빠르고 강한 것은 기본이었다. 다른 변이체를 찍어 누르고 안동시를 차지했던 녀석이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6개의 갈퀴손은 스치기만 해도 사람은 화장지처럼 찢어지고는 했다. 그리고 설령 치명적인 상처가 아니라고 해도 녀석에게 작은 상처라도 입으면 감염이 되어 열병을 앓다가 죽는다.
거기에 건물이 무너져도 버텨내는 단단한 갑각질의 외피를 가지고 있었기에 생존자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녀석이었다.
녀석은 내가 안동시로 진입하자마자 어떻게 알았는지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전생에는 도망치는 것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강력한 변이체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물론 내가 과거 만났던 그때처럼 녀석이 강한 상태는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충분히 사람을 찢어 죽이는 데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녀석을 왕도에 풀어놓으면 사람이 얼마나 죽을까? 최소한 7성 이상의 실력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저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어느 건물의 지하의 틈에서 빠져나온 녀석이 나를 반겼다.
키에에에!
오랜만에 먹이를 발견한 녀석이 기쁜 듯 괴성을 지르며 세 쌍의 팔과 한 쌍의 다리를 사용해 마치 바퀴벌레처럼 빠른 속도로 바닥을 기어 왔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느리다. 내가 아직 6성의 경지였다면 감당하기 힘든 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슈바르거트를 꺼냈다. 빠른 속도로 기어 오던 녀석은 솟구치듯이 뛰어오르며 세 쌍의 갈퀴손을 내게 휘둘러왔다.
서걱!
단 한 번의 휘두름이었지만, 녀석의 한쪽 팔 3개가 공중을 날았다. 그리고 녀석을 스쳐 지나가며 한 번 더 공격했다.
서걱!
반대편의 팔 3개도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순식간에 팔을 모두 잃어버린 녀석이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포기하지 않는 것이 변이체다.
크아아!
녀석이 징그럽게 생긴 입에서 체액을 뿜어냈다. 저것에 맞으면 사람의 피부가 그대로 녹아내린다. 가볍게 그것을 피해냈다.
녀석의 팔을 잘라내며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반마와 전투할 때처럼 슈바르거트를 통해 변이체가 가진 힘을 빨아들였다는 것이다. 아직 마왕처럼 다른 기능을 더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만으로도 변이체를 상대할 때는 매우 좋은 기능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아렌 세인티아의 정수를 먹으며 얻은 신성력이다. 오러가 변했다. 지금도 녀석의 잘린 팔 부위는 마치 지독한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지글지글 타오르고 있었다.
변이체를 상대하기에는 최고의 상성을 가진 기술을 두 개나 얻은 것이다. 팔을 모두 잃고 힘도 빼앗겼지만, 바퀴는 붉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달려들었다.
“이래야 변이체지”
나는 바퀴벌레를 칭찬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변이체다. 던전 안에서 만났던 반마들은 솔직히 너무 형편없었다. 마지막 한 줌 숨이 붙어있을 때까지 악귀처럼 달려들어야 변이체다.
물론 그렇다고 살려주진 않을 것이다. 마지막 한마리까지 모두 찾아서 죽일 생각이다.
바퀴벌레는 머리를 날려버리고 다음에는 심장을 찔렀다.
원래라면 이렇게 해도 쉽게 죽지 않는 것이 변이체이지만, 새로운 기능이 해금된 슈바르거트 앞에서는 그 끈질긴 생명력이 대폭 감소한다.
검을 잠시 꽂아두는 것만으로도 빠르게 슈바르거트에게 생명력을 빼앗긴 바퀴벌레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게 바퀴벌레는 제거하고 안동시를 차지한 내가 이곳에 친구들을 내놓은 것이다.
“이것은 악마인가?”
슬라이트를 비롯한 친구들이 놀란 이유 중에는 바로 앞에 바퀴벌레의 시체가 그대로 놓여있던 것도 있었다.
“그래, 던전 안에서 봤던 반마가 아닌 진짜 악마다.”
친구들의 얼굴에 짙은 혐오감이 나타났다. 악마가 아니라고 해도 2미터짜리 바퀴벌레를 본다면 누구나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여긴 대체 뭐지?”
친구들에게 이곳의 진짜 정체를 알려줄 때가 되었다.
“여기 마왕을 막아내지 못해 멸망한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