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58화 (158/206)

158. 또 다른 누군가

하늘을 날았다. 전생엔 그 흔한 해외여행 한번 가보지 못해 비행기를 타볼 일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번 생에는 비공정을 몇 번 타봐서 하늘을 날아보기는 했다.

그래도 직접 비행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리저리 날며 비행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생존자 중에서도 비행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주 드물게 존재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쉘터 같은 생존자 그룹에서 생활하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혼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안전한 곳을 찾아내 독점할 수 있는데 굳이 다른 생존자들과 부대끼며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같은 사람이 변이체만큼이나 위험했던 세상이었다. 그들의 판단이 다르다고 볼 순 없었다. 나에게 만약 비행 능력이 있었다면 나도 그들과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비행 능력을 가진 생존자들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떠도는 소문으로는 중국이나 일본에 안전한 곳이 있어서 비행 능력자들은 모두 그곳으로 건너갔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내가 최후의 생존자였으니까. 비행 능력자들이 갑자기 사라진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비행 능력은 꽤 만족스러웠다. 비록 ‘성장’ 이나 ‘정신 교란’ 혹은 ‘지배’ 같은 능력이 나왔다면 더 이득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고속 비행도 그에 못지않은 좋은 능력이었다.

지구에서 부교주나 광검제를 찾아야 한다. 그들이 한국 내에 있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있다 하더라도 걸어서 움직인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고속비행은 매우 좋은 능력이었다.

속도를 최고로 올려보기도 하고 높이 올라가 보기도 하며 비행 능력을 체크했다. 고속비행이라고 해도 역시 처음부터 잠자리처럼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내가 봤던 비행 능력자들에 비한다면 훨씬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었는데 그것은 아무래도 그들은 비행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 신체 능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맨몸으로 100km 이상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에너지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직접 움직여보니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재생력과 비슷한 정도라고 해야 할까.

먹는 것이 항상 부족했던 대격변 이후의 세계를 생각하면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없었을 것이다.

문경시 내에 도착했다. 이미 빨간 풍뎅이를 처치했기에 이곳에는 더 이상 변이체가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한때 머물렀던 문경시 쉘터는 철저하게 파괴되어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원래 쉘터가 있던 곳의 한쪽 편에 자리를 잡고 에너지 보충을 위해 음식을 꺼내먹었다. 치킨을 몇 마리나 먹은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새로 얻은 섭식 강화 덕분인지 잘도 들어갔다.

잠시 문경시에서 함께 했던 동료들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낸 뒤 나는 다시 움직이려고 했다. 여기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상주시가 있다. 직접 가본 것은 아니지만, 문경시 쉘터가 파괴되었을 때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대부분 그쪽을 선택했었다.

무엇보다 그쪽이 가장 가까운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쪽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상주시 방향 쪽에 좋지 않은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소문 자체가 없었다.

문경시 쉘터는 10년 이상이나 버틴 굉장히 오래된 쉘터답게 여러 방향에서 밀려들어 오는 생존자들이 모여 있었고 계속해서 사람들이 충원되고는 했다.

그런데 단 한 방향, 상주시 방향에서 합류하는 생존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내가 있을 때만 그랬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상주시 출신이라는 생존자를 보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맞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쪽은 아주 평화롭거나 아니면 아주 위험하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다른 생존자들은 전자라고 생각하고 상주시로 향한 것이고 나와 함께 했던 생존자들은 그것을 위험 요소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었다.

옛 기억이 떠오르며 상주시 쪽을 한번 가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다. 비행 능력도 생기지 않았나.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생각이 났을 때는 바로 움직이면 된다. 비록 밤이라서 시야가 낮처럼 좋진 않지만, 날아서 이동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적당한 속도를 내어 상주시 방향으로 비행을 시작했다. 가는 길을 잘 아는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 듣기로 문경시에서 그냥 남쪽으로 가면 상주시가 있다고 들었다.

실제로 30분도 걸리지 않아서 나는 상주시의 상공에 도착했다. 그리고 굉장히 흥미로운 것을 목격했다.

상주시 중앙에서부터 원형으로 무언가 밖으로 터져나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마치 엄청난 화력의 무언가가 폭발했거나 혹은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흔적이었다. 그러나 중앙에 깊은 크레이터가 생기지 않은 것을 봐서는 아마도 폭발일 것이다.

중앙으로 내려가 살펴보니 흔적이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꽤 오래된 흔적이라 마나의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화약에 의한 폭발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이 흔적을 만든 것은 누구일까. 부교주일까? 아니면 광검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손님이 오셨다.

몸을 질질 끌며 나타난 녀석은 처음 보는 형태의 변이체였다. 몸을 끌고 다니는 형태를 처음 본다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원래는 저런 상태가 아니었을 것이다. 범인을 알 수 없는 폭발에 휘말려 하반신이 날아갔었던 모양이다.

그 정도의 상처라고 해도 변이체 놈들은 내버려 두면 재생을 통해 원상복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녀석은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한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녀석은 필사적으로 팔을 이용해 기어 오고 있었다. 위험감지가 전혀 일을 하지 않고 있다. 이 정도면 그냥 내버려 둬도 얼마 후에는 알아서 소멸할 수준이다.

원래는 어떤 녀석이었을까? 그래도 한 지역의 주인이었던 만큼 한때는 꽤 강했던 녀석이었을 텐데 지금은 원래 상태를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망가지고 약해져 있었다.

몸을 질질 끌고는 있지만, 하반신이 꽤 길게 늘어져 있는 걸로 봐서 원래는 긴 몸체를 가지고 있었을 것 같지만, 그것뿐이었다. 온몸이 폭발의 여파 때문인지 화상을 입은 것처럼 많이 눌어붙어 있었다.

끄르르륵!

녀석의 울음이 마치 이 고통을 빨리 끝내달라는 말처럼 들릴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도 방심은 하지 않는다. 한줄기 숨만 붙어있다면 마지막까지 사람을 물어뜯는 것이 바로 변이체니까.

슈바르거트에 오러를 씌워 날렸다. 겨우 기어 오던 녀석이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목이 떨어져 나갔다. 가까이 다가가 검을 꽂아 넣어 녀석의 숨을 완전히 끊어내었다.

이놈은 또 뭘 하던 녀석이었을까. 손을 대니 이빨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떠오르는 능력은 ‘맹독’ 이었다.

꽝이다. 그것도 상당한 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에게 물어서 독이라도 주입하라는 건가? 예전이라면 모를까. 이제 와서 내가 그런 개싸움을 할 일이 있을까?

설령 마왕과의 싸움에서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해도 마왕이 겨우 변이체의 독에 중독된다고 어떻게 될 것 같지도 않았다.

안 쓰면 그만인 능력이긴 하지만 송곳니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묘해졌다. 그보다 이 폭발 자국의 주인을 찾아내야 할 시간이다.

폭발 흔적의 중앙에 남아있는 몇 가지 물건을 추렸다. 그래봐야 돌멩이와 철근 조각 같은 것이었지만, 그것들의 기억을 읽어 들였다.

처음 돌멩이는 꽝이었다. 돌멩이는 대격변 이전의 시간을 보여줬다. 두 번째 철근 조각도 마찬가지였다. 건설 현장이 보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녹아서 엉겨 붙은 플라스틱이었다. 원래는 무엇이었는지 모를 플라스틱 덩어리는 제대로 폭발이 일어났던 순간을 보여주었다.

마치 빨간 풍뎅이의 전성기처럼 매끄러운 비늘을 자랑하는 긴 몸체의 변이체가 보였다. 방금 내가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준 바로 그 녀석일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 여유 있는 얼굴로 홀로 당당히 서 있는 사내가 있었다.

“죽이진 않을 테니 꼬리를 좀 잘라주지 않겠습니까?”

부교주였다. 부교주는 변이체에게 신체의 일부를 달라고 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부교주 정도 되면 변이체와 말이라도 통하는 걸까?

캬아아아아!

그러나 말이 통하는 것 같진 않았다. 용맹한 포효와 함께 변이체는 부교주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변이체가 완전했던 모습이긴 하지만 부교주는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강자였다.

달려드는 변이체는 가볍게 한손으로 막아선 부교주는 맨손으로 변이체의 하반신을 붙잡고 뜯어냈다.

나에게는 신비한 광경이었다. 사람이 맨손으로 변이체를 찢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의 나라고 해도 저렇게는 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게, 말을 들으면 좋지 않습니까?”

하반신을 잃고 피를 쏟아내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변이체를 멀리 집어던져 놓고 꼬리 부분을 챙겨서 아공간에 집어넣은 부교주가 갑자기 깜짝 놀란 것처럼 허공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기억이 끝난 것이 아니라 플라스틱 덩어리의 시야에 그렇게 보인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폭발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기억이 끝이 났다.

부교주가 공격받았다. 물론 아주 오래전 기억이니 이 사건으로 부교주가 어떻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만난 것은 이 사건의 한참 후일 테니까.

그런데 지구에서 부교주를 공격한 것은 누구일까? 광검제? 아니다. 광검제라면 부교주가 살아있지 않을 것이다.

부교주에게 아무리 통로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말도 안 된다. 이 정도 위력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누군가가 지구에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주변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특별한 단서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 근처에서 활동하고 아직 살아있다면 분명히 나와 만날 일이 생길 것이다.

아침이 되자 친구들이 다시 넘어왔다. 나는 상주시를 떠나지 않았다. 스테이시라면 혹시 모를 다른 단서를 찾아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제 떠날 때와 다른 장소라는 것을 파악한 녀석들이 두리번거리고 죽어있는 변이체의 시체를 구경하는 사이 스테이시는 마법으로 주위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된 흔적이에요. 상급 마법을 사용한 것은 분명한데 그 이상의 단서는 발견하지 못했어요.]

조사 결과를 알려주는 스테이시의 눈이 퀭하다. 아마도 집에 돌아가서도 잠을 자지 않았을 것이다. 스테이시가 할 일이 정말 많다.

개인적으로는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마법서를 연구하는 것만도 평생이 걸릴 고된 일이었다. 그 외에 자폭 인형도 움직이는 방법을 연구해야 하고 스트라이더 1000번도 사용법을 연구해야 한다.

스테이시를 모험에서 빼는 것이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마법사는 기사와 달리 실전에서 죽도록 싸우는 것이 경지 상승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두 녀석이 문제다. 나는 이제 혼자서 움직이는 것이 훨씬 편하다. 그렇다면 둘이서 이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스승님과 함께 움직이는 방법도 있겠지만, 스승님은 이곳에만 계실 수가 없다.

위상이 높아진 만큼 밖에서 할 일이 매우 많아지셨다. 원래라면 나도 나가서 돕는 것이 맞지만, 지금은 이쪽 일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스승님도 알고 계셨기에 이렇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슬라이트와 자칼 두 녀석이 7성에 빨리 오르는 것이 가장 좋은 결과다.

“너 눈빛이 매우 불손한데?”

내 시선을 느낀 슬라이트가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처럼 반응했다. 녀석 감이 좋군.

“너희들은 빨리 7성 기사가 되어줘야겠다.”

내 선언에 슬라이트와 자칼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그게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이냐?”

“그래!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은 너처럼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얌전하던 자칼이 오히려 사납게 달려들었다. 성장 방법에 문제가 있었을 뿐이지 결국 이놈도 북방의 호랑이 자식이 아닌가? 슬슬 본색을 드러내는 모양이다.

그리고 누가 보통 사람이라는 말인가? 나야말로 보통 사람이다.

“된다. 내가 되게 만든다.”

내 뜨거운 눈빛을 받은 두 녀석이 몸을 바르르 떠는 것을 보며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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