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폭풍
슬라이트와 자칼을 이른 시간 안에 7성 경지에 올려놓기 위해 생각했던 것은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실전과 대련의 연속 그것을 조금 극한의 일정으로 하려고 했던 것뿐이다.
죽기 싫으면 경지를 올려야 하는 극한상황을 만들어준다면 충분히 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숭고한 계획은 어긋나버렸다.
통로 너머에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냥 단순한 비바람 정도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지구에는 초인이라도 버티지 못할 정도의 강력한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저것이 태풍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맞는 날이 드물어서 그렇게 욕을 했던 기상예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대격변 이후에야 깨달았다.
다만 아직 봄이라서 예전 같았다면 태풍이 올 시기는 아니다. 그런데 대격변 이후에는 그런 통상적인 법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겨울과 봄에도 태풍이 오고 한반도에 지진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일어나는 자연재해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화산이 터지지 않은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백두산이나 한라산은 터졌는데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슬라이트와 자칼은 살린 태풍은 내가 본 태풍 중에서 손에 꼽힐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거의 암테일 영지의 던전에서 겪었던 바람의 시련 정도다. 바람에 살이 베일 정도다.
어쩌면 약해진 변이체들은 이번 태풍에 죽는 녀석들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이 정도 태풍은 꽤 오랜만이다. 전생에 이런 태풍을 한두 번 겪어본 적이 있다. 그때마다 엄청난 수의 생존자들이 사라졌었다.
내가 통로를 얻고 나서 처음 겪는 태풍이니 꽤 오랜만에 일어난 자연재해이기도 했다. 그동안 모았던 것을 한 번에 터트리려는 것인지 폭풍은 하루 이틀 사이에 에 멈출 것 같지 않았다.
스테이시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스테이시에게는 계속 연구에 전념하도록 따로 말을 해두었다.
어쨌든 폭풍 덕분에 슬라이트와 자칼의 생명이 연장되었다. 그렇다고 마냥 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노더스에는 또 다른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으니까.
“요즘 정치권이 심상치 않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외부의 일을 스승님에게 맡겨놓고 지구에만 있었더니 바깥의 사정을 알지 못했다. 스승님은 어지간해선 나에게 부담을 주기 싫으셨는지 바깥일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으셨지만, 말을 꺼내는 것을 보니 큰일이 생긴 모양이다.
“내무대신이 죽었다.”
생각보다 큰 사건이다. 귀족 파벌 중에서 상당히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파벌의 수장이 내무대신 나단 오페르였다.
갑자기 계산이 복잡해진다. 내무대신의 파벌은 에인프라흐 공작가의 대척점에 있는 귀족파에 가까웠지만, 주전론을 펼치는 세력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내부 결속을 다지는 보수파에 가까운 성향이었다.
그런데 파벌의 수장이 바뀌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예전에 한가지 보험을 들어두었던 게 신의 한 수처럼 느껴졌다.
“큰일이군요. 저도 가봤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네가 움직였다면 오히려 일이 더 커졌을 거다. 내가 슬쩍 다녀왔으니 뭐라 하는 사람은 없을 게다.”
나는 지금 왕국 내에서 태풍의 눈이나 다름없다. 어느 쪽으로 움직이냐에 따라서 정국이 요동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일단 대외적으로는 국왕과 에인프라흐 공작과 친분이 두텁다고 보고 있기에 국왕파로 분류되고 있지만, 내가 공식적으로 어느 쪽이라고 확실히 밝힌 적은 없기 때문이다.
“마그나는 괜찮습니까?”
예전에 우리 집에서 함께 생활했던 적이 있는 마그나다. 후계 싸움에도 불리한 입장에 있었으나 동생이 의문사하면서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었다.
“최선을 다해 수습하고 있으나 쉽지 않아 보이더구나.”
갑자기 대형파벌의 수장인 후작가를 이어받게 되었으니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여전히 가문 내에서도 마그나의 편만 있는 것도 아닐 것이고 한동안 꽤 어려운 시기를 겪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내무대신은 갑자기 왜 죽은 겁니까?”
예전에 봤을 때 딱히 건강에 문제가 보이지는 않았다. 설마 이것도 마신교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게 참···. 입에 담기도 부끄럽지만, 복상사라고 하더구나.”
뒤늦게라도 새로운 후계자를 만들고 싶었던건가? 마신교에 의한 암살이 아니라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 아닌가 싶다.
“한동안 시끄럽겠군요.”
“그렇겠지.”
“파벌의 새로운 수장 후보들은 괜찮은 사람이랍니까?”
“그것이 문제다. 내무대신의 후임으로 떠오르는 귀족들이 과격한 성향을 띈다고 폐하께서 걱정이 많으시다.”
지금처럼 국왕파의 힘이 강성할 때는 힘으로 밀어버려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이런 면에서 보면 현 국왕은 확실히 대단한 사람이다.
본인이 힘이 없다면 모를까. 본인이 8성의 경지다. 그 힘을 사용하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백성들을 위해 최대한 온건한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과감함이 결여됐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국왕이 과감한 만큼 백성들은 살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손님이 왔군요.”
이제 저택의 경계 정도는 충분히 내 감각의 범위 안에 들어와 있다. 공주 덕분에 아직도 왕실에서 저택의 외곽 경비를 맡아주고 있었는데 그곳에 마동차 몇 대가 도착해 검문받고 있었다.
“어지간한 손님은 들이지 말라고 해놓았다.”
이미 한참 전부터 그러고 있긴 했다. 어중이떠중이들을 모두 만나줄 이유는 없었다. 그랬다간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랐을 것이다.
그런데 마동차가 그냥 통과한 것을 보니 왕실 기사들이 보기에 어중이떠중이는 아닌 모양이다.
“어지간한 손님이 아닌 모양입니다.”
“시기를 봐선 귀찮은 손님이겠구나.”
스승님이 귀찮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셨다. 이 양반은 무인이지 정치 쪽에는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내가 처리하도록 하마”
“아닙니다. 저도 같이 만나보죠. 아무래도 저에게 용건이 있을 테니까요.”
이미 내가 9성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제멜아크 왕국에서 대대적으로 그렇게 공표를 했으니까. 왕세자를 중심으로 권력을 모으려면 그것이 유리하다고 하여 내가 그렇게 해도 된다고 허락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라이브러쉬 왕국의 대응이 바뀐 것이다. 그래서 스승님의 승작과 내가 작위를 받는 것이 훨씬 빠르게 이루어졌다.
찾아온 손님을 응접실에서 맞이했다. 단단해 보이는 외모의 젊은 귀족이었다.
“갑자기 찾아왔는데도 이렇게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라스 후작님 그리고 하네스 백작 저는 테이트 팔라시오스 백작이라고 합니다.”
젊은 귀족은 의외로 이미 작위를 승계 받은 백작이었다. 귀족의 소개에 스승님이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다.
모든 귀족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팔라시오스 백작가라면 나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내무대신의 파벌에 속해있기도 했다.
“팔라시오스 백작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 어떤 일로 오셨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군요.”
“당치도 않습니다. 누가 감히 이곳을 누추하다 하겠습니까?”
스승님의 말에 팔라시오는 백작은 조금 과하게 반응했다. 나에게야 안락하고 편안한 휴식처이지만, 원래 고위 귀족이 가지고 있는 대저택들에 비하면 우리 집이 손색이 있는 것은 맞다.
그보다 팔라시오스 백작이 이곳에 왜 찾아왔는지가 문제였다. 괜히 팔라시오스 백작과 연관되어 파벌싸움에 연관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왕국의 기둥이신 분들을 여태 제대로 뵙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분명 파벌에 관련된 일로 찾아왔을 텐데 팔라시오스 백작은 일단 말을 돌렸다.
“파벌의 수장이 되는 것이 힘을 보태달라고 오신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나는 돌직구를 던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상남자다. 예전 같으면 눈치를 봤겠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가 없다.
내 말에 팔라시오스 백작의 표정이 변했다. 사실 이 사람이 우리 집을 찾아올 이유가 다른 것이 있겠는가?
“부끄럽게도 제가 파벌의 다음 수장으로서 가장 선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작의 말이 맞다.”
스승님이 팔라시오스 백작의 말을 확인해주셨다. 그럼 굳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아도 되지 않은 것 아닌가? 우리야 딱히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가만히 있으면 팔라시오스 백작이 파벌의 수장이 되었을 것이다.
“제가 그냥 가만히 있어도 저를 따르는 다른 귀족들이 저를 파벌의 다음 지도자로 만들어줬겠지요. 그러니 그것을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은 아닙니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건가?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는다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스승님의 기세가 사납게 변했다. 스승님이 무엇을 우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젊은 귀족이 큰 파벌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다음에 무엇을 생각할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생각하시는 그런 것이 절대 아닙니다. 제가 바보도 아니고 목숨이 몇 개씩 있는 것도 아닌데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다행히도 반역을 꿈꿨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만약 이 자리에서 반역의 반자만 꺼냈어도 정말 목이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럼 무엇 때문에 오셨습니까?”
내 물음에 팔라시오스 백작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이것은 또 의외의 전개였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새로운 9성 기사, 그리고 매우 젊다 못해 어리다.
에인프라흐 공작은 이제 나이가 많다. 그 뒤를 이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앞으로 몇십년 같은 권력의 정점에 있을 것이다.
그런 나를 수장으로 세우는 것은 어쩌면 최고의 선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그것이 크게 구미가 당기는 제안은 아니다.
“전 권력에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마신교 그리고 교주만 아니었다면 그냥 암테일 영지로 내려가 평생 조용히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마그나 오페르 후작과 친분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마그나와 이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오페르 후작가가 이대로 조용히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닐 것이다. 마그나의 아버지인 나단 오페르 후작은 유능했지만, 청렴한 정치인이 아니었고 그렇게 당연히 적을 많이 만들어놨을 것이다. 오히려 가문의 내부 세력조차 마그나 홀로 감당하기엔 어려울 것이다.
“오페르 후작가를 노리는 세력이 많이 있습니다.”
나단 오페르라는 거목이 쓰러진 이상 그 시체를 노리는 무리가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오페르 후작가만 공격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남아있는 세력의 작은 구성원들도 휩쓸려 나가겠지.
“그것은 마그나 오페르 후작이 스스로 이겨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이 일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선을 그었다. 만약 마그나가 직접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다면 도울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파벌이 아니라 마그나 개인을 돕는 것이다.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저희 세력이 분열되어 흩어진다면 누가 가장 좋아하겠습니까?”
흩어진다고 해도 귀족들이 한군데로 몰리진 않을 것이다. 여러 곳으로 흩어지겠지. 그러나 국왕파로 넘어갈 귀족이 많진 않을 것이다. 여태까지 국왕파와 각을 세우던 귀족파의 대표 세력이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여기서 날름 세력을 흡수해버린다면?
“그보다 일어나십시오.”
아직까지 무릎을 꿇고 있는 팔라시오스 백작에게 일어나라고 했지만, 팔라시오스 백작은 요지부동이었다.
“부디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다른 구성원분들의 허락은 받고 이러시는 겁니까?”
내 밑으로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귀족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전원 동의했습니다.”
아니 왜?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세력이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 나쁜 것은 아니다. 아무리 개인의 힘이 뛰어나다고 해도 내가 광검제처럼 홀로 제국과 싸워도 이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기존의 귀족파 세력을 국왕파로 전향시키는 것도 좋다. 만약 마왕의 침공이 일어났을 때 국왕파의 목소리가 높을수록 방해 없이 힘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금방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군요. 며칠 말미를 주시면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팔라시오스 백작이 떠나갔다. 스승님과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긴 토론을 했다. 그러나 역시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스승님은 천생 무인이고 나 역시 이런 정치 문제에 경험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래도 저희끼리는 답이 나오지 않겠습니다.”
“그렇구나.”
집단 지성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