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60화 (160/206)

160. 정원사의 조언

중립의 위치에 있으면서 정치적 식견도 갖춘 사람이 누가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마탑주였다. 그러나 마탑주에게 가기 전에 먼저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슬라이트와 자칼은 중립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가장 가까운 지인에 속한다. 내가 세력을 가지게 된다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테이트 팔라시오스 백작의 이야기를 들은 슬라이트와 자칼은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나쁘지 않은데? 나는 찬성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생각이 없진 않을 것이다. 슬라이트는 몰라도 자칼은 소심해서 그렇지 생각은 꽤 깊은 편이다.

“어째서?”

“네가 내무대신의 세력을 얻어야 더 빨리 정국이 안정되지 않을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 이후의 문제다.

“우리 집에 찾아오는 귀족들이 얼마나 되는지 아냐?”

그야 엄청나게 많지 않을까. 왕국에서 현재 최고 권력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니까. 문지방이 닳도록 사람들이 들락거리겠지.

“많겠지.”

“모르긴 몰라도 네 생각보다 훨씬 많을걸? 그래서 그것을 처리하고 있는 큰형님이 대단한 거고. 자칼 너희 집은 어때?”

에인프라흐 공작가는 몰라도 변방이라고 올라프 후작가는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북부에 있다.

“우리 집에도 엄청나게 많이 찾아와”

“들었지? 그런 귀족들이 찾아오는 것은 처음이 아닐 거고 마지막도 아닐 거다. 이미 자리를 잡은 지 수십 년이 된 우리 집도 그렇고 찾아가기도 어려운 북부에 있는 올라프 후작가도 그런데 너라고 다를 것 같으냐?”

역시 어렸을 때부터 권력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녀석들이라 그런지 이런 상황에 익숙하고 생각도 비슷한 것 같다.

“그 세력을 내가 관리할 자신이 없는데? 난 너희 큰형님처럼 유능하지도 않고 귀찮은 일은 질색이야.”

갑자기 슬라이트와 자칼이 혐오스러운 무언가를 보는 표정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왜? 뭐?”

“그런 쉰 소리 할 것 같으면 꺼져라. 우리 수련할 시간도 모자라다.”

슬라이트가 손을 휘휘 저어서 나를 내쫓았다. 지구에 가지 못하고 있다고 슬라이트와 자칼이 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경험시켜줄 지옥 일정은 뒤로 미뤄졌지만, 지구에서 변이체들에게 죽을뻔한 경험을 해서 그런지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쉴 새 없이 단련하고 있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다던가? 그러면 노력하는 천재는 누가 이길 수 있지?

슬라이트와 자칼에게 쫓겨난 후 나는 스테이시를 찾아갔다. 정치적 식견은 모르겠지만,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것은 마탑주와 같다.

[전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아예 가장 큰 세력을 만드는 것이 어때요?]

역시 스테이시도 찬성 쪽이었다.

“이유는?”

[일하는 것은 언제나 아랫사람이지 가장 윗사람은 일을 안 하잖아요? 우리 스승님만 봐도 그렇고요. 빅터 공자가 편해지고 싶다면 오히려 큰 세력을 만드는 것이 맞다고 봐요.]

그런가? 생각지도 못한 관점이었다. 그런데 전생의 경험을 생각해보면 아무리 큰 세력이라고 해도 우두머리가 나태하면 그 세력은 금방 무너지더라.

마탑주가 일을 안 한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마탑이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 국왕만 봐도 날로 먹는 자리는 아니지 않은가?

난 외부의 사람들보다는 최대한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다. 내 결정에 따라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었다.

집사와 폴켄, 제이시 그리고 고용인인 마사와 힐마의 의견을 차례로 들었다.

결과적으로는 모두 찬성이었다. 이유는 가지각색이었다. 폴켄과 제이시 같은 경우에는 내가 강해지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사람이 많이 따르면 강해진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마사와 힐마의 경우에는 세력이 커지면 돈을 더 많이 벌 테니 급료가 올라가지 않겠냐는 아주 자유분방한 의견을 내어주었다. 나는 이런 내가 생각하지 못한 의견이 좋았다.

세력이 커진다면 자연히 돈이 모이게 된다. 특히 나와 스승님처럼 개인이 강대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세력에 있는 귀족들에게 상납금을 뜯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다못해 가문의 영지에서 처리하지 못하는 마수 같은 것이 나타났을 때 처리해주고 얼마간의 보수를 받는 일만 하여도 큰돈이 될 것이다.

그 외에도 철권단 출신들이 하는 일과 공주의 상단 그리고 돌턴골드 상단과 연계하는 사업만 연결을 해주면서 얻는 이득만 해도 막대할 것이다.

집사인 지미 브리스 역시 찬성이었다. 부패한 귀족 파벌이었던 내무 대신 파벌에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지미 브리스였다. 내가 그곳의 수장이 된다면 파벌도 자연히 정화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에게 맡기기를 원했다.

그러나 지미 집사는 유능한 사람이지만, 가문의 집사와 작은 사업체 정도라면 모를까. 대형 파벌을 관리하기에는 아직은 그릇이 작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청렴하고 깨끗한 세상도 작은 규모에서라면 모를까. 대형 파벌은 그렇게 굴러가기가 쉽지 않다.

아직 독립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철권단에게도 물었으나 이쪽도 역시 대부분 찬성이었다. 슬라이트나 자칼과 반대로 약소 귀족 가문 안에서도 버린 자식 취급을 받던 사람들이다.

한낱 준남작의 차남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이런 위치까지 오르게 된 나를 우상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우상이 더욱 크게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왕국 내의 젊은 층에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일종의 아이돌이라고 해야 할까. 워낙 집 밖에 나가지 않았기에 나는 전혀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들이 그런 말을 할 정도면 인기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

슬라이트의 말대로 지금 팔라시오스 백작의 제의를 거절한다고 해도 또 다른 어떤 세력이 접촉을 해올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단 생각나는 사람들의 의견을 모두 듣고 엘프의 숲처럼 아름답게 변한 정원에 앉아 한가롭게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서 아직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사람이 보였다.

제멜아크의 던전으로 떠나기 전에 고용했던 두 명의 정원사 중의 하나인 에드몬드다. 같이 고용되었던 정원사인 로인은 그만둔 것으로 되어있지만, 그가 살아있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반역에 연루되었으니까.

그것은 지금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하고 있는 에드몬드도 마찬가지다. 왕실에서 조만간 에드몬드도 처리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직까지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을 보면 별로 처리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분명 왕실에서 전해준 쪽지에 새로 일꾼도 보내준다고 되어있었는데 그것도 감감무소식이다. 이렇게 보면 전생의 공무원들이 생각나는 것이 일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에드몬드 잠시 이리 와보게”

“부르셨습니까.”

헐레벌떡 달려오는 에드몬드는 면접을 보러 왔을 때에 비하면 시체처럼 변해있었다. 본인이 반역에 연루된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같이 취직했던 로인이 어떻게 되었는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언제 끌려가서 반역죄로 쥐도 새도 모르게 처형될지 모르는 날이 몇 달째 계속되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을 것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자살하지 않은 게 용하다.

“어려운 시간일 텐데, 매일 열심히 일을 해주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물론 온전히 자의로 일을 열심히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나 누군가 그런 언질을 주었을 것이다.

“아, 아닙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자유롭게 풀어준다고 약속할 수는 없겠지만, 언제 끌려갈지 모르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게 해주겠네.”

영원히 그만두지도 못하는 고급 인력을 얻을 기회다. 그런데도 고맙게 생각하겠지. 완벽한 일꾼을 얻을 기회가 아닌가? 왕실에서도 처벌하는 것을 잊을 정도니 서신 한 통만 넣어주면 처벌은 없는 것이 될 확률이 높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에드몬드 입장에서는 하늘에서 빛이 내려오는 것 같을 것이다.

“약속하지.”

“가, 감사합니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에드몬드는 바로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고생 중에 최고는 마음고생이라고 한다. 대격변 이후에는 물론 굶어 죽은 사람이 많지만, 마음이 병들어서 죽은 사람이 많다. 굶어 죽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병들면 몸도 움직이지 않게 된다.

한참을 흐느끼다가 겨우 감정을 수습한 에드몬드에게도 나는 같은 질문을 했다.

“제가 왕실과 여러 귀족가에서 일해본 경험에 따르면 파벌의 수장을 맡는 것이 더 좋아 보이십니다.”

“어째서 그런가?”

“사람들이 왜 왕실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안십니까?”

“그곳이 근무조건이 좋아서?”

“여러 가지 조건을 따져보면 그렇긴 합니다만, 사실 급료는 귀족 가문에서 더 주는 곳도 많습니다. 그래도 대부분 일꾼은 왕실에서 일하는 것을 더 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어째서 그렇지?”

“위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도 하네스 백작가의 저택에서 일한다고 하면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겠습니다만, 왕실에 비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에인프라흐 공작가와 비교할 수 있을까요?”

에드몬드가 하는 말은 결국은 그것이었다. 한국 속담으로 한다면 머슴도 정승 집 머슴이 좋다.

“그런 시각도 있을 수 있지. 고맙네 좋은 의견이었어. 내가 왕실에는 손을 써두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에드몬드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사라졌다. 생각지도 못한 에드몬드가 아주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나 홀로 살아가는 세상이라면 귀찮은 것 다 때려치우고 어디 산으로 들어가 지구를 오가며 생활해도 된다. 그렇게 홀로 강해져서 교주를 죽이고 세상을 구해도 된다. 실제로 광검제가 아노더스에서 두 번째 마왕의 침공을 막아낼 때 이렇게 했었다.

그때의 광검제는 혼자였다. 친구들은 모두 죽거나 은둔했다.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도 모두 죽고 그 후손들도 광검제와 사이가 소원해졌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암테일 영지에 부모님과 형이 살아있고 스승님이 있으며 제이시와 폴켄도 있다. 그리고 친구들과 철권단도 있다.

사실 이미 마음도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주위 사람 모두가 찬성하는 일에 내가 귀찮다고 다른 선택을 하기도 좀 그렇지 않은가.

나는 먼저 스승님에게만 내 계획을 전했다. 스승님은 내 계획을 듣고 바로 찬성하셨다. 내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사람이 스승님이기는 하나. 이번에는 기쁘게 찬성하셨으니 나쁜 계획은 아닐 것이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저택을 벗어났다. 영체화를 쓰고 비행을 사용하니 누구에게도 걸리지 않고 저택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찾아간 곳은 오페르 후작가였다. 지금은 꽤 고생을 하고 있는 친구가 있는 곳이다. 물론 마그나가 나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우호적인 관계로는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마그나는 집무실에서 서류에 파묻힌 채 열심히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뒤로 슬쩍 다가가서 보니 원래 같은 파벌에 있던 귀족가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였다. 마그나의 안색이나 쌓여있는 서신들을 봤을 때는 좋은 답변이 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마그나의 앞으로 돌아와 영체화를 풀며 인사를 했다.

“마그나 오랜만이야.”

기왕 오페르 후작의 파벌을 내가 맡는다면 그것의 중개인으로 팔라시오스 백작을 이용할 이유가 없다. 모시던 파벌의 수장이 죽자마자 다른 귀족들을 선동해서 더 강한 쪽으로 붙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가지 않는다.

물론 좋은 처세술이고 귀족으로서 그것이 당연한 선택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좋은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봤다고 믿겠는가?

하지만 마그나라면 함께 생활하며 사람의 됨됨이를 확인했다. 적어도 팔라시오스 백작보다는 믿을 수 있다.

“빅터! 아니 지금은 하네스 백작님인가?”

마그나는 내가 갑자기 나타났는데도 크게 놀라지 않고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마그나도 이제는 오페르 후작님이잖아”

“아니 난 아직 정식으로 승계받지 못했다네. 그런데 갑자기 어쩐 일인가? 이곳은 어떻게 들어왔고?”

이제야 그것을 신경 쓰는 건가? 뭔가 앞뒤가 바뀐 느낌이지만, 상관없었다.

“마그나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지 않을래?”

기왕 이렇게 된 것 일을 좀 키워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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