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기다림
“무슨 일을 말하는 건가?”
“너 지금 상황 안 좋지?”
따로 조사해보지 않아도 탁자 위에 널브러진 서신들과 마그나의 꼴만 봐도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좋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마그나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부끄럽지만 그렇다네”
“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어?”
마그나가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라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저지른 일에 대한 업보인 것을 오롯이 내가 책임을 져야 할 일이지 않겠나. 그리고 자네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네. 이미 받은 것이 많지 않은가.”
바른 생활 사나이의 기질이 이상한 곳에서 발휘된 모양이다.
“쓸데없는 생각이야. 너에게 달려있는 식구들을 생각했어야지.”
이제 마그나의 어깨에는 오페르 후작가라는 거대한 짐이 올라가 있었다. 마그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래, 그렇긴 하지.”
“외부에서 공격은 그렇다고 해도 내부 정리는 된 거야?”
마그나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역시 그것도 잘되지 않은 모양이다.
“도와줄까?”
“내가 자네에게 쉽게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것은 자네의 방식 때문인 것도 있네.”
“내 방식?”
“내 동생을 처리한 방식 말이네”
알고 있었나? 연쇄살인범이 한 것처럼 꾸며서 완벽하게 넘어갔다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있었나?”
“아니 짐작만 하고 있었을 뿐이네. 그런데 지금 보니 자네가 맞군.”
넘겨짚은 수에 당해버렸다. 내가 마그나를 좀 얕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명가의 가르침을 어렸을 때부터 받은 정통 귀족이고 무엇보다 정치력으로만 대형 파벌의 수장이 된 내무대신의 아들이다. 그 피가 어디 가겠는가.
“나도 바보가 아니네. 물론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연쇄살인범이 후작가의 경계를 뚫고 내 동생만을 암살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런데 굳이 그런 일을 해서 나를 도와줄 사람은 자네밖에 없다는 말이지.”
“그런데 왜 내색하지 않았지?”
“증거가 없기도 했지만, 나를 위한 한 일인 것을 아는데 어찌 자네를 탓하겠나. 그리고 내 동생이긴 하지만 좋은 사람은 아니었으니 말이네.”
“혹시 나단 오페르 후작도 알고 있었나?”
“아니, 아버지는 아마 자네라고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네, 나야 자네하고 한솥밥을 오래 먹었으니 그리 짐작한 것이네.”
마그나가 내가 한 일을 들킨 것은 좀 의외의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앞으로 하려는 일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원래 내 방식대로 죽여버리는 것이 가장 쉽고 빠른 길이지만, 네가 싫다면 다른 방법도 있다. 아니 그냥 우리가 손을 잡았다는 것만 알려도 대부분의 일을 해결될 거야.”
지금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스승님과 내가 있는 브라스 후작가와 하네스 백작가와 손을 잡았다는 것만으로도 대형 동물의 시체를 탐하려고 하던 승냥이들은 감히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가문 내부에서 여전히 마그나를 지지하지 않고 있는 세력도 당장은 입을 다물게 될 것이었다.
“확실히 쉽고 빠른 방법이네, 그런데 그렇게 문제를 해결한다면 이곳은 오페르 후작가인가 아니면 하네스 백작가인가?”
마그나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사실 마그나가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고 이러기를 바랐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마그나의 의지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자네, 그 웃음은 매우 불길하구만”
웃는 얼굴에 침을 못 뱉는다던데 마그나는 예외인 것 같다.
“좋아. 그런 것을 원했어. 우리가 함께 일하려면 그런 자세가 필요했거든”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의 마그나에게 내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으음···.”
내 계획을 모두 들은 마그나의 고민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생각할 것이 많을 것이다. 피가 흐르는 계획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피가 전혀 흐르지 않는 방법이란 것은 없다.
“어쩔 수 없는 건가.”
아직 20대 중반 젊은 나이에 가주가 되어버린 마그나의 고뇌가 느껴졌다. 그러고보면 나는 굉장히 특수한 경우다. 책임 없는 쾌락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 자네의 계획을 따르기로 하지”
마침내 마그나가 결정을 내렸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꽤 오랫동안 마그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도 마그나의 집무실에 찾아오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마그나는 생각보다 훨씬 더 가문 내에서 입지가 좋지 않았다. 유일한 후계자인데도 불구하고 정작 실권을 물려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그나에게 듣기로 오페르 후작가의 실권은 여러 명이 나뉘어 있었는데 일단 마그나가 3할 정도의 지분이 있었고 마그나의 작은 아버지인 할만 오페르 자작이 3할, 그리고 마그나의 어머니와 후처가 2할씩을 나눠 가지고 있는 형국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 마그나의 친모가 마그나의 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귀족가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후계가 유일한 상황에선 또 보기 드문 현상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누굴 쳐야 세력을 온전히 마그나가 가지고 올 수 있을까?
우리가 선택한 답은 아무도 아니었다. 여기서 다행인 것은 오페르 후작가의 무력을 담당하고 있는 기사단장이 마그나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원래 무력으로 흥한 가문이 아닌 만큼 기사단의 전력이 변변치 않고 기사단장의 발언권이나 영향력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왕도에서 내로라하는 다른 고위 귀족과 비교하자면 그런 것이지 지방 귀족의 전력보다는 월등했다. 다른 고위 귀족이라고 하면 에인프라흐 공작가를 비롯해 7성 기사가 존재하는 후작가들인데 그런 곳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오페르 후작가의 영지가 공격받았다. 이제 막 씨를 뿌려두었던 거대한 농지가 불바다가 되었다. 정식으로 영지전을 선포한 공격도 아니었고 흉수가 누군지도 알 수 없었다.
마그나가 직접 기사단을 이끌고 영지를 지키기 위해 왕도를 떠났다. 당연히 왕도에 빠르게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당연히 오페르 후작가에 우호적인 소문은 아니었다.
현재 오페르 후작가를 노리는 곳은 무척 많았다. 첫번째로 나단 오페르가 저지른 업보로 인해 원한을 가진 귀족 가문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집단으로 행동하진 않지만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두번째로 반대 파벌인 국왕파가 오페르 후작가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이쪽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세 번째가 가장 문제인데 같은 귀족파로 분류되지만 오페르 후작과 다른 노선을 걷고 있던 다른 파벌들이었다. 이들은 오페르 후작가를 무너뜨리고 파벌을 흡수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팔라시오스 백작이 재빨리 나를 찾아와 파벌을 통째로 넘기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들 때문이었다.
당연히 위의 세 분류의 귀족들이 모두 의심받기 시작했다. 전부 자신이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부인했으나 영지전을 선포하지도 않고 타영지의 그것도 농지를 불태웠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그때 왕도에서 머물고 있던 오페르 후작가 내부에서도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그나가 왕도를 벗어나자 작은아버지와 두 부인 사이에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작은아버지 할만 오페르 자작이 후처와 손을 잡았다.
후작가의 행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할만 오페르 자작과 부유한 친정의 힘을 손에 쥐고 재정 쪽에 관여하고 있던 후처가 손을 잡자 힘의 균형이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본처인 마그나의 어머니는 당연히 마그나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그러지 않았다. 대신 외부의 힘을 끌어들이는 것을 선택했다.
본처가 선택한 외부 세력은 다른 귀족파였다. 그렇게 마그나가 왕도를 벗어난 사이에 두 개로 나뉜 오페르 후작가가 충돌했다.
소리 없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애초에 더러운 일에 수없이 손을 대고 있었던 오페르 후작가이고 그것의 실무를 담당했던 것이 바로 할만 오페르 자작이었다.
전쟁은 아니었지만, 사람이 죽어 나간다. 몇십년간 오페르 후작가에서 일했던 관리들의 부정이 공개되고 그에 맞는 처벌을 받았다. 처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오히려 매우 무거웠다.
밤늦게 술자리에 참석했다가 이상한 시비에 걸려 맞아 죽는 사람이 생기고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서 죽는 사람도 있었다. 갑자기 알 수 없는 병에 걸리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야말로 암투였다. 소문으로는 왕도에서 고용 가능한 모든 암살자들이 오페르 가문의 암투에 고용되었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저택에서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만 그런 것이지 나도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스테이시의 연구에 동참하기도 하고 슬라이트와 자칼의 수련을 돕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아직 완전히 내것으로 만들지 못한 경지를 체화하고 있었다.
아직 지구의 폭풍은 멈추지 않았다. 대격변 이후로 이런 자연재해들이 강력해지긴 했지만, 이번에는 좀 지나칠 정도였다.
워낙 오랜만에 일어난 자연재해이기는 해도 벌써 일주일 넘게 9성 기사가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할 만큼의 폭풍이 몰아친다는 것은 이상했다. 이 정도면 폭풍의 반경에 있는 변이체도 무사하지 못할 수준이다.
그렇다고 당장 지구로 뛰어 들어가서 왜 이런 폭풍이 일어났는지 조사할 수도 없다.
그저 기다려야 한다. 마그나의 일도 그렇고 지구의 일도 그렇고 지금은 나에게 기다림을 강요하고 있었다.
팔라시오스 백작이 다녀간 이후로 여러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강력한 수장을 원하는 중소 파벌의 수장이 대부분이었지만, 제법 규모가 있는 귀족파나 에인프라흐 공작과 다른 국왕파의 귀족들도 있었다.
공통점이라면 비교적 젊은 귀족들이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젊은 귀족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또 다른 공통점이라면 개혁을 원하는 이들이라는 것이었다. 무슨 근거로 내가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스승님을 만나러 오는 부류도 많았다. 이쪽도 마찬가지로 기존 대형파벌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온건파라고 해야 할까. 보수적인 집단들이었다.
스승님도 나도 찾아오는 이들을 박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과 동조하는 척을 하며 오히려 끌어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큰 사건이 터졌다.
오페르 후작의 후처였던 마릴 세를린이 암살당했다. 의문사도 아닌 측근들과 함께 자신의 처소에서 모두 살해당한 명백한 암살이었다.
세를린 백작가의 여식이었던 마릴 세를린이 살해당하자 현 세를린 백작인 마릴 세를린의 오빠가 오페르 후작가에 영지전을 신청했다.
예전 같았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나단 오페르가 파벌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지금의 오페르 후작가와는 해볼만하다는 평이 주류였다.
더구나 세를린 백작은 과격한 귀족파의 일원이었다. 전쟁 한번 겪어본 적 없으면서 전쟁을 원하는 멍청이들이 잔뜩 뭉쳐있는 곳이었다.
세를린 백작가는 무력보다는 상업으로 일어선 가문이기에 무력이 약하지만, 파벌의 힘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반면에 오페르 후작가는 마땅한 대비를 하지 못하고 비상이 걸렸다. 할만 오페르 자작은 자기 형수를 맹비난했고 본처인 페시아 오페르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며 할만 오페르 자작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 나는 아무도 모르게 왕궁에 도착해 있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국왕이 장난스럽게 물어왔다. 내가 왕궁에 온 것은 최근 처음이 아니다. 이미 일을 시작하기 전에 국왕의 허가를 받기 위해 왔던 적이 있었고 마그나와 함께 다시 왔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다. 모두 극비로 이뤄진 일이었다.
“폐하께서도 허가하신 일이 아닙니까?”
“그래도 너무 일이 커지는 것 같은데?”
“제 생각에는 이것이 오히려 가장 피를 덜 흘리는 길입니다.”
“그건 내 생각도 그렇긴 하네만”
국왕이 뭔가를 원하는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원하시는 것이 있으신지요?”
국왕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자네, 나하고 일 하나 하지 않겠나?”
뭔가 익숙한 대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