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62화 (162/206)

162. 마지막 비명

처음부터 왕실의 협조를 받아 진행한 일이었다. 애초에 변방도 아니라 왕도에서 멀지 않은 곳이고 가주가 죽고 성세를 잃어가는 곳이라고 해도 대귀족의 영지에 파벌이 연합해서 거는 영지전이다.

왕실의 허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그쪽은 자신들의 정치력이나 알게 모르게 요직에 있는 인물들에게 바친 뇌물의 효과로 영지전 허가를 받았다고 믿고 있겠지만, 모두 나와 왕실의 계획하에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영지전에 한 다리 걸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본래 오페르 후작가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거나 적대하는 쪽의 귀족들이 참전을 선언하면서 영지전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세를린 백작은 일을 확실히 하기 위해 다른 귀족의 참전을 받아들였다. 동생이 죽었다고 하나 상업을 중시하는 가문으로서 여전히 대귀족인 오페르 후작가에 덤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아직 오페르 후작가가 멀쩡할 때 그곳을 쳐서 노른자를 차지하려는 마음이 훨씬 컸다.

그러나 세를린 후작가 단독으로는 오페르 후작가의 남아있는 전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조금 먹을 것을 나눠주더라도 전력을 강화해서 확실히 일을 처리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른 귀족들의 참전 역시 왕실에서 쉽게 허가를 내주었다. 왕실에서 쓸모가 다한 오페르 후작가를 처리하고 다른 귀족들에게 인기를 얻으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왕실과 가깝고 요직에 있는 귀족이 말했다는 소문은 꽤 신빙성이 있었고 당사자나 귀족은 이를 해명하지 않았다.

그러자 애매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던 귀족들이 덩달아서 참여하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왕실이 무지성으로 영지전 신청을 받아준 이유를 알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오페르 후작가는 그만큼 매력적인 미끼였다.

영지에 미리 출진해있던 마그나 오페르가 이 영지전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겉으로 드러난 전력만 해도 스무배 정도 차이가 난다는 얘기도 있었다.

물론 연합한 귀족들이 모두 전력을 끌고 온다고 그 정도 차이가 날지도 모른다. 그런데 전력을 끌고 오는 귀족은 없을 것이기에 실제로는 세네배 정도 차이가 날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세를린 백작군 혹은 반 오페르 후작가 연합으로 불리는 귀족들이 대군이 집결하여 오페르 후작가의 영지로 진군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이 모였다네 오페르 후작가의 영지에 있는 병력의 일곱배 정도라고 해”

내 부탁으로 슬라이트가 정보를 구해왔다.

“오페르 후작가가 약한가?”

“아니 그렇게 약하진 않지.”

“그런데 귀족들이 모였다고 해도 잘도 그 정도 숫자를 모았네”

반 오페르 연합의 전력은 기사만 300명이 넘어간다고 했다. 거기에 대형은 아니지만 비공정도 동원했다던가.

“실제로 싸운다면 그렇게 차이가 나진 않을 거야. 훈련 상태 같은 것이 차이가 날 테니까.”

“그건 오페르 후작가도 마찬가지 아닌가? 가주가 죽고나서 사기가 바닥일 텐데”

“일단 기사단은 마그나가 수습을 잘 한 것 같은데 병사들은 아무래도 그렇겠지.”

기사 병력이 압도적으로 밀린다면 아무리 수성전이라고 해도 병사들의 전력은 큰 의미가 없다. 다행인 것은 영지전에서는 만골포 같은 대규모 살상 병기가 사용이 불가하다는 점과 마탑 소속의 마법사들은 참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보통 사람 입장에서는 초인이나 다름없는 기사들이다. 십미터가 넘는 성벽을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넘어와서 오러가 깃든 검을 휘둘러대는 기사들 앞에 병사들은 그저 시간 벌이 용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그 기사 전력이 열배가 차이 나면 답이 없다. 오페르 후작가의 기사 전력이 낮지 않다고 해도 저쪽도 그 정도의 준비는 해왔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도 갈까?”

슬라이트를 비롯한 최측근들에게도 내 계획을 설명한 상태다.

“아니 네가 끼어들면 전력 차이가 너무 벌어지니까. 재미가 없지.”

“그렇지?”

정확히는 슬라이트 개인의 전력이 아니라 에인프라흐 공작가의 전력이 참전했을 때의 얘기지만, 슬라이트는 자신이 편한 대로 알아들었다.

“그보다 이쪽은 어떻게 처리할 거야?”

“그러게 말이야. 내가 그쪽을 너무 고평가했나 봐. 계산이 어긋났어.”

슬라이트가 말하는 것은 영지 쪽이 아니라 왕도 쪽이었다. 마그나의 작은 아버지인 할만 오페르 자작과 친모인 페시아 오페르는 여전히 왕도를 떠나지 않고 여전히 둘이서 견제하고 있었다.

둘이 왕도에서 아무리 싸워봐야 영지가 점령되고 마그나가 죽어버리면 오페르 후작가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일인데 마치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마그나가 죽어버리면 할만 오페르가 상속자가 되어 후작가를 물려받을 수는 있겠지만, 영지도 없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줘야 하는 후작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거기에 그 정도 수준이 되면 왕실에서 후작가의 작위로 박탈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오페르 후작가에 앙심을 품고 있던 귀족들이 본격적으로 나서서 두 사람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둘은 영지전은 관심도 없다는 듯이 둘이 싸우는데 정신이 없었다. 내 계산으로는 지금쯤 싸움을 멈추고 두 사람도 힘을 모아 영지로 달려갔어야 하는 것이 맞다.

전생에 60년을 살고 이번 생에서도 벌써 17년을 살면서 수많은 인간 군상을 보았지만,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사람이다.

하지만 한가지 위안이라면 두 사람의 싸움도 슬슬 끝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마그나의 친모인 페시아 오페르는 가용할 수 있는 재산이나 전력이 많지 않았다.

평소 성격도 좋지 않아 따르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정의 도움을 받아 할만 오페르에게 대항하고 있었지만, 친정도 이겨봐야 남는 것이 없는 싸움에 손을 떼고 있었다.

그렇게 몰리다 보니 후처였던 마리 오페르를 대놓고 살해한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개인감정도 분명히 들어간 행동이었다.

아직 범인은 잡히지 않고 있지만, 슬라이트의 말로는 이미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지만 일부러 잡지 않고 있다고 했다. 왕실의 높으신 누군가가 힘을 쓴 결과다.

내 주위의 몇 명은 마리 오페르를 살해한 것이 내가 아니냐는 의심도 했지만, 이번에는 진짜 내가 아니었다.

할만 오페르도 사정이 좋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할만 오페르는 결국 페시아 오페르를 이기는 데 성공했다.

페시아 오페르를 붙잡아 항복을 받아내고 저택의 지하감옥에 잡아넣은 할만 오페르는 병력을 끌어모아 뒤늦게 영지로 급히 달려갔다.

개인적인 싸움을 끝내고 나니 겨우 판단이 되돌아온 모양이었다. 할만 오페르의 병력은 그래도 적은 편이 아니었다. 워낙 합법적이지 못한 사업을 많이 하고 있어서 그렇지 내가 죽여버렸던 사채업자들처럼 오페르 후작가의 어두운 곳에서 일하는 인간들이 많았다.

그것들을 모두 꺼내 모아놓자 제법 그럴듯한 전력이 모인 것이다. 머릿수로만 보면 마그나가 데려간 기사단보다 많은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연합의 군세를 생각하면 대세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병력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죽을 것이 뻔한 전장으로 달려가는 할만 오페르 자작의 표정은 죽을 곳으로 달려가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뭔가 다른 생각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할만 오페르가 왕도를 떠나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무대 위에 올라갈 배우가 간신히 모두 모였다.

연합군의 군세는 이제 오페르 후작가의 영지 근처에 집결하고 있었다. 워낙 참전한 귀족들이 많고 명령체계가 확실하지 않아서 혼선이 빚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다.

덕분에 주둔지를 내준 오페르 후작가의 옆 영지인 케스테르 자작가만 때아닌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대군세다. 그런데 나름대로 준비는 하지만 이들이 정규군처럼 모든 준비를 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워낙 많이 귀족들이 모이면서 발생하는 사고도 급증하고 있었다. 속된 말로 대환장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연합군 중에서 대표 자격의 귀족을 뽑는 데만 며칠이 걸렸다. 그러나 대표를 뽑았다고 바로 영지전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우습게도 이들은 벌써 영지전이 끝난 후의 전리품을 어떻게 나눌지에 대해 싸우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마그나는 연합군과 맞서 싸울 평야의 근처의 도시에서 할만 오페르 자작을 맞이했다.

“이렇게 마주하지 않기를 바랐네 조카님”

할만 오페르 자작은 꽤 여유로웠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할만 자작”

마그나의 호칭에 할 만 오페르의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후, 그래 이제 서로 존칭을 할 사이가 아니긴 하지.”

“그렇습니까? 저는 예법을 따른 것뿐입니다만.”

“넌 아직 오페르 후작가의 주인이 아니다.”

할만 자작이 말하는 것은 마그나의 작위였다. 정당하고 유일한 후계라고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왕실에서 승인을 받지 못했다.

죽은 나단 오페르 후작이 마그나를 총애했다면 봉신 자작이나 백작 정도를 미리 내렸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마그나는 아무 작위도 없는 그저 평민이나 다름없었다. 할만 자작은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닐걸?”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할만 자작이 주위를 둘러보니 마그나의 뒤에 누군가 서있었다.

“너는 누구냐!”

나는 마그나의 옆에 서며 자신을 소개했다.

“빅터 하네스라고 한다.”

“뭐, 뭣이?”

할만 자작은 내 등장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었던 모양이다. 이런 장면을 만들기 위해 내가 그동안 신경을 많이 쓰긴 했다.

“하네스 백작께선 이곳에 어떤 일이시오?”

할만 자작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그래도 내 이름을 들어본 적은 있는 모양이다. 하기야 며칠 암행을 해보니 왕도에 살면서 내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친구 좀 도와주려고 왔지”

할만 자작의 얼굴이 잘 구워진 가재처럼 붉게 변했다.

“연합 쪽에 마그나와 후작가를 바칠 테니 네 몫만 좀 남겨달라는 서신은 내가 잘 처리했다.”

가로챈 몇 장의 서신을 탁자 위에 던져 놓았다. 할만 자작의 인장까지 확실하게 찍혀있는 것이니 빼도 박도 못할 증거였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을 것이다. 후작가의 노른자를 넘길 테니 자신의 목숨을 보전해주고 약간의 재산을 남겨달라는 식의 협상을 벌이려고 했던 모양이다.

본인은 그 제안이 통하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내가 중간에 처리하지 않았더라도 그 제안이 통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그런데 이거 반역 아닌가?”

“흥!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네스 백작은 명백한 외부인이요. 나를 처벌할 권리가 없소. 그리고 오페르 후작가의 주인은 정해지지 않았소!”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니까?”

옆에서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던 마그나가 한장의 서류를 펼쳐 보였다. 국왕이 인장이 확실하게 찍힌 오페르 후작가의 주인임을 뜻하는 문서였다.

그것을 본 할만 자작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 어느 사이에? 그럴리가 없소. 저것은 가짜요! 어디서 감히 왕실의 문서를 위조하는 것이요!”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법이다. 그것은 궁지에 몰린 인간일수록 더 심하다. 할만 자작은 침을 튀기면서 허가증이 위조라면서 소리를 질렀다.

국왕의 인장까지 찍히는 문서를 위조하는 간 큰 인간은 별로 없다. 그런 짓을 하다가 걸리면 사형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확실한 위조 방지 장치가 있다. 마그나가 문서에 마나를 주입하자 문서에서 라이브러쉬 왕국의 엠블럼이 밝게 나타났다. 이것은 이 문서의 주인이 아니라면 동작하지 않는다.

“가짜다! 왕실의 문서를 위조한 대역죄인을 처벌하라!”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었음에도 할만 자작은 믿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할만 자작은 반쯤 정신이 나가 보였다.

할만 자작이 자신을 따라온 기사들에게 공격을 지시했다. 그러나 기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움직이지 못했다.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손을 쓸 것도 없었다. 정확히 기사들에게만 뿜어낸 기세에 기사들이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9성 기사가 내뿜는 압도적인 위압감에 기사들은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 무슨!”

기사들이 쓰러지자 할만 자작은 무슨 용기인지 자신도 검을 뽑아 들었지만, 할만 자작은 오러를 깨우치지도 못한 보통 사람이었다.

“다 끝났습니다. 할만 자작”

마그나가 앞으로 나서 할만 자작을 가볍게 제압했다. 마그나도 4성의 기사다. 싸움이 성립되지 않았다.

“놔, 놔라!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내가 몇십년간 더러운 일을 마다하지 않고 키운 오페르 가문이다! 내가 바로 오페르의 계승자다!”

“할만 자작, 아니 작은 아버지. 당신을 가문에 대한 반역죄로 처벌하겠습니다.”

재판관이 선고하듯이 감정 없는 어조로 말하는 마그나의 음성은 그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마그나가 속으로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 안돼! 마그나! 삼촌이다. 네가 어렸을 때 그토록 예뻐해 주던 할만 삼촌이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마그나의 표정은 어두웠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망설이지도 않았다.

작은 비명과 함께 할만 자작이 꾸민 계략은 그의 마지막 비명처럼 조용히 처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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