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참전
“괜찮냐?”
“물론 괜찮지 않네”
작은아버지 할만 오페르를 직접 처리한 마그나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생각보다 정신력이 약한 녀석이었던가? 이런 것까지는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어땠을지 모르겠네만, 나는 어머니나 작은아버지 그리고 작은어머니까지도 그리 싫어하지 않았네. 아니 꽤 좋아했지.”
마그나의 넋두리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적에는 참 자상한 분이셨네. 내가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그러셨지.”
나는 가만히 마그나가 하는 말을 들어주었다.
“작은아버지가 했던 말도 틀리지 않네. 항상 바쁜 아버지 대신이었던 분이네. 우리 형제에게는 사실상 진짜 아버지 같았던 분이었지.”
할만 자작의 시체는 마그나의 손길을 받아 마치 편안히 자는 사람처럼 정리되어 있었다. 마그나는 빠르게 일격으로 자작의 목숨을 끊었다. 고통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죽기 전의 공포 때문인지 자작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작은어머니도 그랬다네. 그녀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슬슬 모두에게 외면받고 있던 나를 유일하게 따뜻하게 대해준 사람이 작은 어머니였지.”
미워했어도 가족이라는 것일까. 전생에 가족에 대한 사랑을 받지 못한 나에게는 익숙하지 못한 감정이었다. 물론 이번 생에는 가족이 있지만, 전생의 영향 때문인지 애틋한 감정을 느끼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동생도 그랬다네 어렸을 적에는 나를 매우 따르던 아이였지. 그런데 이제 아무도 없군.”
친모는 아직 죽지 않은 상태이지만,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숨을 쉬고 있다고 살아있다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고 자네를 원망하는 것은 아닐세. 매우 감사하고 있다네. 애초에 자네가 없었다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었겠지.”
갑자기 마그나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오페르 영지의 백성들은 수탈당하고 살기 힘들어졌겠지.”
영지전에서 패배했을 때 직접적으로 약탈하지 않더라도 전후 보상을 만들기 위해 영지의 백성들을 쥐어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록 오늘은 슬프더라도 오페르 후작가의 주인으로서 그것을 두고 볼 수는 없지.”
마그나는 맹세하듯이 말했다. 눈빛이 결연한 것이다.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대귀족의 경우 승계 과정에서 피를 보는 것이야 드문 일이 아니다. 지구에 못지않게 문명이 발달했다고 하나 그런 것이 당연시 되고있는 세계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마그나는 생각보다 빠르게 기운을 회복하며 할만 자작이 데려왔던 병력들을 수습했다. 물론 암중에 내 도움이 있기는 했지만, 할만 자작을 따라 들어왔던 기사 몇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내가 이곳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물론 나를 본 기사들은 내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할만 자작이 끌고 온 병력이 마그나의 병력보다 많다 보니 그것을 수습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마그나는 일을 생각보다 잘 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따르지 않겠다면 죽이는 것이 맞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본래 오페르 후작가에 오래 근무했던 기사단처럼 충성심이 높은 사람들이 아니라 할만 자작이 데려온 기사들은 대부분 뒷골목 잡배와 다르지 않은 인간들이다.
질 것이 뻔한 편에서 싸울 생각이 조금도 없는 인간들이었다. 물론 그것은 충성심 높은 기사단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지만, 정치력만으로 가문을 일으켜 세웠던 오페르 후작의 아들답게 나와 있을 때와는 달리 혀가 아주 잘 돌아갔다.
물론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진 못했다. 그중에는 몰래 마그나를 죽여서 반대 진영으로 가져가려고 했던 놈들도 있었고 자작이 죽었다고 하자 떠나려는 놈들이 훨씬 많았다.
일단 마그나를 암살하려고 했던 놈들은 내가 처리해주었다. 아직도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 지구에 던져넣기만 하면 되니 일 처리도 쉬웠다.
9성 기사도 버티기 힘든 폭풍인데 4성 기사가 폭풍 안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만약 폭풍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는 놈이 있다면, 모든 것을 용서하고 살려줄 것이다. 그 정도라면 거의 살려두라는 신의 뜻이 분명하니까.
떠나려는 놈들은 그냥 보내주었다. 물론 이곳을 나가 저쪽 편에 붙지 않아야 한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그것이 지켜지리란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그렇게 죽이고 떠나보내고 남은 수가 2할가량이나 되었다.
내가 보기엔 기적에 가까운 수치였다. 물론 이겼을 때 아주 많은 보상을 약속했지만, 이 닳고 닳은 놈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단순히 그것 때문에 남은 것은 아닐 것이다.
예상대로 오페르 후작가의 진영을 벗어난 녀석 중 상당수가 연합 쪽으로 들어갔다. 정보를 건네주고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을 생각이었겠지만, 귀족이란 사람들이 그렇게 물렁하지가 않다.
마그나 쪽의 군 편성과 할만 자작이 마그나에게 당하고 병력 일부가 흡수되었다는 정보를 나불거리고 난 후에 모두 목이 잘렸다. 주인을 배신하는 용병이나 뒷골목 불량배들? 귀족들의 시선으로 보면 벌레나 다를 바가 없다.
그래도 놈들에게 얻은 정보에서 힘을 얻은 것인지 연합군의 진격이 시작되었다. 진군해오는 대군은 그 숫자만큼은 확실히 위협적이었으나 군의 대형이 엉망이었다.
아직도 전체 군의 명령권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탓이었다. 이런 대형 전투의 실전은 내가 보기에도 진군해오는 연합군의 엉망진창이었다.
‘우두머리가 몇 명인 거야?’
서로 자기가 대장인 것을 나타내려는 듯이 대열 이곳저곳에서 삐죽 튀어나온 부분이 많았다.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지만, 사실 이 정도 병력 차이라면 저렇게 해도 된다.
아무리 마그나쪽의 훈련이 잘 되어있더라고 하더라도 절망적인 병력 차이를 극복한 무언가가 없었다. 전술적인 무언가를 시도해보기에도 어려운 것이 이곳은 평야다.
원래라면 방어의 이점을 안고 수성전을 하는 것이 훨씬 나았겠지만, 마그나는 이런 말을 했다.
“자네가 곧 성이 아닌가? 굳이 깊숙이 끌어들여서 백성들에게 고통을 줄 필요는 없지.”
물론 나도 동감하는 얘기지만, 너무 대놓고 허술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식적으로 누가 이런 상황에서 대회전을 선택하겠는가? 연합 쪽에 머리가 조금이라도 돌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의심을 할 것이다.
라는 내 예상과 다르게 연합군은 전혀 의심하지 않고 진군을 해서 마그나의 진영과 약 1km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그리고 한참을 또 자기들끼리 실랑이하더니 무려 다섯 명이나 되는 대표와 호위들이 앞으로 나왔다.
이쪽에서는 마그나가 대표로 나갔고 오페르 후작가의 기사단장이 뒤를 따랐다.
대표로 싸우자는 것은 아니고 일종의 요식 행위였다.
“마그나 오페르 공자, 각오는 되었소?”
양쪽 대표가 중앙에서 마주했을 때 연합군 대표 중의 하나가 비웃듯이 말했다. 승리를 확신한 말투였다.
“이제 오페르 후작입니다. 정식으로 승인을 받았지요.”
마그나는 차분하게 대응했다. 마그나가 정식으로 승인을 받았다는 말에 귀족들은 조금 놀란 듯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달라질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오늘이 오페르 후작가의 마지막 날이 되겠구려.”
유일한 후계인 마그나가 죽는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사촌의 팔촌까지 해서 누군가에게 작위가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망한 가문을 이어받으려는 사람이 많진 않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의외로 차분하군. 모든 것을 내려놓은겐가?”
마그나가 삶을 포기한 것으로 보였나 보다.
“아니요. 전혀요.”
마그나의 눈을 보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지금 마그나의 눈에서는 두려움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을 확인한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쐐애애액!
“누구요? 누가 고속 비공정을 불렀소?”
모두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지만, 맑은 하늘엔 그 어떤 비공정도 보이지 않았다.
소문과 다르게 연합은 비공정을 몰고 오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비싸고 유지비가 많이 드는 비공정까지 투입할 정도의 전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늘 저편에서 날아오고 있는 것은 비공정이 아니었다. 점으로 보이던 것이 점차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것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검을 타고 있는 사람이었다.
굉음과 함께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사람은 가볍게 마그나의 곁에 내려섰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
나는 지금 막 도착한 것처럼 마그나의 옆에 착륙해서 어깨를 두드렸다.
경악을 감추지 못한 연합군의 대표 중의 하나가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당신은 누구요?”
“설마 저를 모르십니까? 나름 유명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만한 생각이었군요. 빅터 하네스 백작이라고 합니다.”
나는 나름대로 예의 바르게 귀족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연합군 대표들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왕도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꽤 유명해졌지만, 그렇다고 지방 귀족들까지 모두 나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왕도의 소식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지방 귀족이 훨씬 많다.
그리고 왕도에 있는 사람도 발표와 다르게 나를 의심하고 있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17살에 9성 기사라니 나 같아도 쉽게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그러나 검을 타고 하늘을 날아온 것을 보고 마냥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날아다닌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지구에서도 비행기가 발명되어 보급되기까지 몇 년의 시간이 걸렸나.
이곳에서도 비공정이 있긴 하지만 맨몸의 인간이 날아다니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위 마법사들이 비행 마법으로 날아다니기는 하지만 그들도 방금 내가 했던 것처럼 고속으로 비행하지는 못한다.
거기에 검을 타고 날아다닌다? 아마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을 것이다. 이 퍼포먼스는 내가 꼭 한번 해보고 싶어서 꾸민 일이었다. 무협지에서는 어검비행이라고 했던가?
“하네스 백작께서 영지전에 참가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소.”
“물론 그러시겠지요. 제가 결정한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자격이 없단 말이요.”
“왜 그렇습니까?”
“하네스 백작가는 정식으로 영지전에 참가한 것이 아니잖소.”
내 진짜 실력을 본 것은 아니지만, 연합군의 대표들은 내가 이번 영지전에 참가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지요. 그런데 저는 가문과 상관없이 개인의 자격으로 친구를 돕기 위해 온 겁니다. 그러니 영지전에 참가하지 않았어도 상관이 없지요.”
나도 다 알아보고 왔다. 사실 원래의 내 계획을 더 그럴듯하게 꾸며준 것이 왕실이다.
“그, 그런!”
“가문까지 참전하게 된다면 제 스승님도 오시게 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대표들의 얼굴이 더욱 썩어들어갔다. 오히려 내가 참전을 선언했을 때보다 반응이 더욱 격했다. 나보다 스승님이 더 무서운 모양이다.
9성 기사가 눈앞에 있지만 멀리 있는 7성 기사를 더 무서워하다니 어이가 없는 일이다. 어쨌든 나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어린아이라는 편견을 벗어나지 못했나 보다.
“일단··· 알겠소.”
대표들은 서둘러 자신들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원래라면 이곳에서 정식으로 개전을 알리고 양쪽 진영이 맞붙어 이 평야에 많은 사람이 피를 뿌려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 존재가 영지전의 시작을 막아버렸다. 도망가듯이 진영으로 돌아가는 대표들을 보며 마그나가 말했다.
“영지전이 이대로 끝났으면 좋겠네”
“그렇게 되진 않을걸?”
나는 부정했다.
“왜?”
“사람이라는 동물은 때에 따라선 멍청할 정도로 탐욕스럽거든. 오히려 동물보다 못할 때가 있지.”
“그렇지.”
이번 기회에 그것을 뼈저리게 체험한 마그나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개전 선포는 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영지전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도 나란히 진영으로 돌아가는데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어검비행술을 보여줬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럼 군의 사기를 좀 올려볼까?”
전쟁이라는 것은 보급과 사기가 최우선이다. 몇 년간 훈련받은 정예? 굶고 사기가 떨어지면 징집병보다 못하다.
오글거려서 내 성격엔 맞지 않지만, 친구를 위한 특별 서비스로 생각하도록 하자.
나는 아스트로퍼를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리며 오페르 후작가의 기사와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오페르 가문의 아들들아! 나 빅터 하네스가 참전했다!”
와아아아아!
나를 아는 기사와 병사들이 따라서 창과 검을 들어 올리며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우오아아아아!
함성이 변했다. 하늘을 향한 아스트로퍼를 따라서 오러가 끝없이 솟아오르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