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근거 없는 자신감
원래 내가 세운 계획대로라면 마그나의 병력이 실제로 전쟁에 투입될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 일이 계획대로만 진행되던가?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내가 참전을 선언함 동시에 연합군은 항복하거나 해체하고 돌아가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당장 눈앞에 결과가 보이듯이 연합의 대표들은 항복하지 않았고 해체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것은 오히려 내가 원하던 결과 중에 하나였지만 말이다.
하늘 위로 끝없이 치솟은 거대한 오러의 검을 보며 사기가 뒤집혔다. 오페르 후작군의 사기는 오러처럼 하늘로 솟구쳤고 반대로 연합군의 사기는 바닥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어쩌면 소문뿐이라고 생각했거늘”
“저게 가능하긴 한 겁니까?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군요.”
100m는 족히 넘게 솟구치고 있는 오러의 검을 보며 연합군의 대표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힘의 격차를 확실히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연합군 내에서 가장 고수라고 할 수 있는 몇 명의 기사들을 불러들였다.
각 가문에서 많은 수를 데려온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정예이기도 했기에 통솔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뿐이지 연합군에는 제법 실력 있는 기사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가장 실력이 있다고 알려진 기사 셋이 연합군 대표들의 호출을 받았다. 6성 기사 둘과 5성 기사 한명이었다.
6성 기사 둘은 소속된 가문의 기사단장으로 제법 나이가 지긋한 이들이었으나 5성 기사는 아주 젊은 사람이었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5성의 경지에 오른 사람으로 슬라이트나 자칼 같은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까지는 아니라도 하더라도 충분히 천재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대들이 보기에 저 하네스 백작의 무력은 어떤 것 같은가? 우리 군으로 상대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연합군 대표의 질문을 받은 6성 기사 둘이 서로 눈치를 보다 한명이 마지못한 듯이 입을 열었다.
“불가합니다. 하네스 백작이 싸울 의지가 큰 것 같지 않으니 이때 군을 물리시지요.”
“허어!”
6성 기사의 답변에 대표들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 정도인가? 정녕 방법이 없겠는가?”
한번 욕심에 눈이 멀어버린 인간은 쉽게 시력을 되찾지 못한다.
“저희가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하네스 백작에게는 통하지 않을 겁니다.”
이것도 기사로서는 최대한 순화하여 말한 것이다. 빅터 하네스가 마음만 먹으면 우린 다 죽으니 닥치고 후퇴하자. 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없으니까.
“그게 기사단장으로서 할 소리인가! 아무리 하네스 백작이 고강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나 아직 어리지 않소! 무조건 안 된다고 하지 말고 해법을 찾으란 말이오!”
대표 중 하나가 호통을 치자. 6성 기사의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당장 다 때려치우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때 옆에 있던 젊은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맞습니다. 적이 강하다고 하나 고작 혼자일 뿐입니다.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저에게 군을 맡겨 주신다면 책임지고 오페르 후작의 목을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자네 지금 무슨?”
갑자기 튀어나온 5성 기사의 주장에 조금 전까지 대표들에게 퇴각을 권유하고 있던 6성 기사가 당황하며 뜯어말리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오오! 과연 나의 기사로다! 다른 기사와 다르게 용감하군!”
대표 중 한 명이 다른 귀족들을 돌아보며 자신의 기사를 칭송했다.
“경은 저 빅터 하네스를 상대할 자신이 있는가?”
“정면승부를 한다면 어려울 겁니다. 그렇다면 정면승부를 하지 않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과연!”
“또한 경지가 전부가 아닙니다. 제가 아직 나이가 어려 5성의 경지에 머물러 있지만, 몇 번이나 6성의 기사와 대련하여 승리한 경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9성의 경지라 하지 않소?”
“저 역시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들으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하지만 30세에 5성의 경지에 간신히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16살에 9성의 경지라니 가능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소. 하지만 검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저런 거대한 검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니 거짓말같이 않더군.”
“소문을 듣자니 빅터 하네스 백작은 마검사라고 하더군요. 마법을 사용해 눈속임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당장 저희를 공격하지, 저렇게 겁만 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군!”
너희들은 지금 9성 기사의 힘을 너무 얕보고 있다. 6성 기사 둘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이 어떻게 하기에는 대표들이 젊은 기사의 말에 홀딱 넘어가 있었다. 지금 나서서 후퇴나 항복을 얘기한다면 무능한 겁장이 취급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젊은 나이에 5성 기사가 된 천재. 분명 어디에 내놔도 떨어지지 않을 천재이지만, 어려서부터 떠받들어주는 것에 익숙해 자신감이 과했고 왕도가 아닌 지방에서만 살아왔기에 견문이 좁고 7성 이상의 기사를 한 번도 마주할 기회가 없었다. 그것이 지금 치명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기 직전이었다.
기사들을 돌려보내고 연합군의 대표들은 자신들끼리 한참을 의논한 후 연합군이 모인 후 처음으로 의견을 일치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참모들과 기사들을 불러들여 다시 회의를 시작했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잠시 군영을 이탈했었다. 결코 내가 했던 행동이 부끄러워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물론 생전 처음 해본 선동에 손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지만, 어쨌든, 성공적이었으니까.
나는 돌아와서 연합군 진영에서 보고 들었던 것을 마그나에게 알려주었다.
“하하”
마그나는 허탈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차라리 이게 나을 수도 있어.”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일이 진행되고 있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죄 없는 사람이 많이 죽지 않겠는가?”
“나도 살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야. 그래도 어쩔 수 없는 희생은 있겠지.”
“최대한 손에 사정을 두기를 바라네”
마그나는 오히려 연합군을 걱정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럴 생각이야. 하지만 저들은 너와 너를 따르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는 사람들이야. 쓸데없이 마음이 약해져선 안 돼.”
“물론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네, 자네에게 그만한 힘이 있으니 하는 말이지. 귀족들은 상관없다하더라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 나온 병사들은 불쌍하지 않은가.”
다행히도 마그나는 내가 걱정할 정도로 물렁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바른 생활 사나이 모드가 발동되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보면 마그나는 가장 귀족적이면서도 귀족과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이번 사건을 겪으며 마그나의 기질이 조금 변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좋은 쪽이다.
해가 지기 시작하고 저녁이 찾아올 무렵 연합군 쪽에서 달려 나온 기마에서 활이 쏘아졌다.
피유우우우!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효시는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와 진영의 앞에 꽂혔다. 효시에는 편지가 한 장 묶여 있었다.
그것을 뽑아온 병사가 마그나에게 편지를 넘겼다. 마그나는 그것을 읽어보더니 편지를 나에게 넘겼다.
“선전 포고로군.”
아까 하지 못한 선전포고를 이제 한 것이다. 미사여구를 잔뜩 사용한 문장으로 쓰여진 선전포고였다. 내일 아침에 공격을 시작한다고 한다.
“멍청하네”
나는 내 감상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자네 실력을 보여줘도 믿지 못하니 어쩔 수 없지.”
“아니,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야. 저들이 이길 생각이 정말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선전포고를 할 것이 아니라. 밤에 야습이라도 해야 했어.”
욕심이든 뭐든 간에 무언가에 사로잡혀 시야가 좁아진 이들을 보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대격변 이후에 내가 만났거나 소속되어 있었던 수많은 단체의 수장들이 그랬다. 그들도 처음에는 대부분 좋은 리더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다 보면 언제부터인가 오판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시야가 좁아진 것이다.
아침에 공격을 시작한다고 하니 우리는 병사와 기사들에게 밤에 걱정 없이 잠을 자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날이 밝고 아침 식사를 넉넉하게 한 시간이 되어서야 연합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긋하기 짝이 없는 것이 마치 지구의 세계 1차 대전 때의 어느 국가가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물론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고 영지전이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마왕이 다시 침공했을 때 저런 사람들이 과연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둥둥둥둥!
북소리가 울리고 연합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세 방향으로 나뉘어서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들었던 대로 나를 의식한 작전을 만든 모양이었다.
“우린 뭘 하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방어진 유지 정도만 하고 있어도 될 거야.”
말을 마치고 나는 아스트로퍼를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연합군의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세 방향으로 나뉘어 진격해서 내가 어느 한군데를 선택했을 때 나머지 두 방향이 군세가 본진을 공격해 끝내버리겠다는 작전인 모양인데 분명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내가 7성 기사이기만 했더라도 어쩌면 성공했을지도 모르는 작전이다. 그리고 나에겐 비행 능력이 있었다.
하늘에서 유유히 내려다보고 있는 나에게 마법 공격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마탑 소속의 마법사가 참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가문 소속이나 용병 마법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경지가 그리 높지 않다.
공중에서 가볍게 회피하는 것만으로도 마법은 내 근처에 닿지 못했다.
일단은 어제 겁 없이 나섰던 철부지 5성 기사가 선두에서 이끄는 군세가 첫 번째 목표였다. 분명 장래가 유망한 기사이지만, 저런 어중간한 녀석들이 지휘관이 되었을 때 밑에 사람들이 얼마나 죽어 나가는지 아는 나로서는 차라리 여기서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붙잡아 놓고 가르칠 수도 있겠지만, 그럴 시간도 없을뿐더러 사람은 쉽게 고쳐지는 것이 아니다.
쐐애애액!
내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기사를 포함한 선두의 기마들이 속도를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고공에서 낙하해서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고속으로 낙하했다.
“놈이 걸려들었다!”
젊은 기사가 선두에서 외치자 뒤를 따르던 기사들이 말 옆구리에서 준비해두었던 그물을 꺼내는 것이 보였다. 내가 무슨 참새도 아니고 그런 것에 걸릴 것이라고 생각한 건가?
그 외에도 여러가지 투척무기를 준비하는 기사들도 보였다. 혹시 마법이 부여된 물건들일 수도 있기는 해도 의미 없는 저항에 불과했다.
급강하하는 그물을 포함한 수십 개의 원거리 무기들이 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나는 공중에서 그대로 멈춰섰다. 그러자 던진 것들이 모두 빗나갔다. 잠자리 변이체에게 얻은 고속비행은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이었다. 오히려 아직 내가 비행 기술에 익숙해지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 능력을 십분 활용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였다.
“산개!”
원거리 무기로 나는 견제하는 것이 실패하자 젊은 기사는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확실히 유능한 사람이긴 하다. 그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했다고 할 수 있었다.
나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지는 기마들 사이에서 젊은 기사는 검을 뽑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을 희생한다기보다는 뭔가 알 수 없는 자신감이었다.
“빅터 하네스 백작 오시오!”
나를 홀로 상대해서 시간을 끌려는 것일까? 근거 없는 자신감이 넘치다 보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내가 왜?”
부앙!
나는 그저 검을 한번 휘둘렀고 중첩되어있던 오러 한겹이 빠르게 날아갔다. 기사는 놀랍게도 반응하여 그것을 자신의 검으로 막아내려고 했지만, 내가 날린 오러는 겨우 5성 기사가 막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젊은 기사는 기사였던 것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젊은 기사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조금은 성공했다. 젊은 기사가 잠깐이지만 시간을 끄는 것에는 분명 성공했으니까.
그렇다고 그들의 작전이 성공한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고 검에 거대한 오러가 맺히기 시작했다.
마치 빛으로 만들어진 꼬리처럼 수십미터의 오러를 달고 마그나의 진영 위로 솟아오른 나는 3면에서 돌격해오는 연합군을 향해 세 번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산이 울리고 땅이 흔들린다고 하던가. 그런 폭발음과 함께 땅이 뒤집어졌다. 흙과 돌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병사들은 머리를 감싸며 엎드렸고 말들이 미쳐날뛰었다. 돌격하는 방향 바로 앞에 일어난 재앙에 돌격하던 연합군의 군세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흙먼지가 걷히고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거대한 무언가가 할퀴고 지나간 듯한 세 줄기의 거대한 고랑이었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계곡이 생겨났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솔직히 내가 해놓고도 조금 놀랐다. 9성에 오른 후 이렇게 힘을 제대로 써본 적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이 정도 위력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그 선을 넘어오면 죽는다.”
이것도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대사다. 나는 조용히 한 말이지만, 오러가 실린 목소리는 평야 전체에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