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충성심이 바꾼 운명
한번 해보고 싶었던 멋진 대사를 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세상 일이 늘 그렇듯 내가 생각한 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나는 이 정도만 보여줘도 연합군이 퇴각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뭐하는가! 돌격! 돌격이다!”
한쪽 면을 맡은 연합군의 대표가 말 위에서 연신 어설프게 허공에 검을 휘두르며 군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인간은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건가? 아니면 너무 놀라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건가?
대표의 명령에 부관들이 어쩔 수 없이 소리를 지르며 병사들을 압박하기 시작했지만, 아무리 훈련된 병사들이라고 해도 목숨이 아까운 줄은 안다. 이 상황에서 상황 판단을 못하고 있는 것은 오직 대표 한명 뿐이었다.
병사들은 미적거리며 명령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지만, 기사들은 달랐다. 그들이라고 돌격하면 죽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지만, 입장이 달랐고 그 동안 받은 교육이 달랐다.
“돌격! 돌격!”
기사단장으로 보이는 기사가 먼저 말에서 내려 달리기 시작하자 다른 기사들도 뒤를 따랐다. 깊이 패인 고랑 덕분에 말을 끌고 들어갈 수 없기에 한 선택이었다. 기사들이 돌격하자 몇명의 병사들도 뒤를 따라 뛰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하늘 위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그나에게도 말했듯이 나는 살인을 좋아서 하는 사람이 아니다. 만약 그래야 할 상황이 온다면 망설이지 않을 뿐이다.
그저 주인의 명령을 따랐을 뿐인 충성스러운 기사와 아무 것도 모르는 병사들을 몰살시킬만큼 매정한 사람은 아니다.
내 시선이 돌격 명령을 내린 대표를 향했다. 놈은 여전히 허공에 검을 휘두르며 돌격을 외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자신이 타고 있는 말은 제자리에서 돌기만 하고 있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라고 해야할까. 지휘관이 선두에 서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자신은 안전한 곳에 있으면서 남에게 사지로 가라는 명령을 내리는 인간들을 혐오했다. 대격변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런 비겁하고 무능한 사람들 밑에서 죽어나갔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지금 저 정신나간 연합군 대표는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자신은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머지 두 방향은 군세는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였다. 일단 왼쪽은 선두에서 진격하던 5성 기사를 죽여버렸으니 사기가 꺾였고 중앙을 맡아 진격하던 쪽은 전에 보았던 6성 기사 둘이 중앙을 지휘하는 대표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하강하기 시작했다. 고랑을 타고 넘어와 달려오고 있는 기사들이 아니다. 그 정도는 마그나도 잠깐은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내 목표는 대표였다. 세상 대부분의 조직은 머리를 제거하면 힘을 잃게 된다. 전쟁 교본에 괜히 적장을 우선으로 공격하는 전술이 수십가지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급강하하며 다가오기 시작하자 몇개의 마법이 날아왔지만, 굳이 피할 필요도 없이 그냥 직진했다. 오러의 막에 부딪힌 마법들이 터져나갔다.
마법이 적중하자 적진영에서 작은 함성이 있었지만, 거침없이 마법을 뚫고 내리꽂히는 나를 보고 순식간에 얼굴색이 바뀌었다.
대표는 멍하니 내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도망가려 말고삐를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사실 처음부터 도망갔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잡히는 미래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막아라! 나를 지키란 말이다!”
대표가 발악하며 소리쳤지만, 그를 지켜줄 사람은 없었다. 호위 기사들과 부관이 있었지만 그들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두툼한 목덜미를 붙잡고 가볍게 하늘로 솟아 올랐다.
“으아아악!”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죽을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어대서 가볍게 뺨을 한대 후려쳤다.
쫙!
잘못해서 힘이 조금만 들어가도 진짜 죽을 것 같아서 정말 힘을 들이지 않고 살짝 쳤다.
“아악!”
그럼에도 얼굴을 부여잡으며 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엄살이 심하시군.”
겨우 뺨 한대 맞고 벌벌 떨면서 부하들에겐 사지로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인간이다. 그냥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주인이 붙잡히자 돌격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기사들의 앞으로 날아갔다.
붙잡혀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때는 벌벌 떨기만 하던 인간이 발이 땅에 닿고 눈앞에 자신의 기사들이 보이자 다시 기세가 살아났다.
“뭐하느냐! 나를 구해라!”
참으로 시끄러운 인간이다. 다리를 걷어차버렸다. 이번엔 힘을 조금 주었다. 다리 좀 부러졌다고 죽는 인간은 없으니까.
빠각!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대표가 땅에 쓰러졌다.
“으아악!”
조용히 시키려고 했던 것인데 더 시끄러워졌다. 그래서 등을 밟고 힘을 살짝 주었다.
“끄흑”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조용해졌다. 숨을 쉬지 못하게 되니 조용해지다니 영원히 숨을 못쉬게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지만 아직은 살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가까이 오면 죽인다.”
주인의 뒷목에 검을 들이대자 막 달려들려고 했던 기사들이 주춤하며 멈췄다. 사실 발밑에 있는 인간을 죽이는데는 검도 필요하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중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잘 들으시오. 숨을 쉴 수 있게 살짝 힘을 풀어줄 것인데 시끄럽게 하면 영원히 숨을 쉴 수 없게 만들어주겠소. 이해하시겠소?”
내가 속삭이듯이 말했는데 밭 밑에 깔린 대표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에서 살짝 힘을 빼주자 잠시 중지했던 숨쉬기 운동을 격렬하게 재개하기 시작했다.
“산소의 소중함을 좀 느끼셨나?”
“무슨 소리?”
발 밑에 깔려서 숨을 고르던 대표가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지구식 농담이 먹힐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니 그냥 해본 소리요. 그러고보니 우리 아직 통성명도 하지 못했군.”
“제이스 프랑턴 자작이요.”
분한 목소리였다. 무엇이 그렇게 분하고 억울한지는 모르겠지만, 프랑턴 자작은 오히려 오늘 억세게 운이 좋은 편이다. 아직까지 살아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통성명을 하게 되어 좀 이상하지만 양해를 부탁드리겠소. 알고 계시겠지만, 빅터 하네스 백작이오.”
프랑턴 자작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 다가오는 것을 멈췄던 기사들 중에 한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선두에서 다른 기사들을 이끌었던 기사단장이었다.
몰래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대놓고 걸어오는 것이 뭔가 수작을 부리려는 것은 아닌것 같았다.
다가오던 기사단장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다가와서 검을 풀어서 멀리 던지고는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빅터 하네스 백작께 청이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할 것인지는 뻔히 예상이 되지만 굳이 그것을 막을 생각은 없었다.
“말씀해보세요.”
“기사된 도리로 마땅히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군을 지키고 보호해야 하나 무능한 기사는 하네스 백작님에게 주군을 지킬 실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목숨을 바칠테니 제발 주군의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기사단장은 쿵 소리가 나도록 땅에 머리를 박았다.
“참으로 충성스러운 기사로군요. 어떻습니까? 프랑턴 자작. 저 기사의 목을 베고 당신을 살려줄까요?”
조금 감탄했다. 아무리 기사가 충성의 상징이라고 해도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 저 정도까지 하는 기사가 아직 남아있을 줄은 몰랐다. 마치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기사 같지 않은가?
프랑턴 자작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래도 부끄러움은 모르진 않은 모양이다. 사실 이 자작도 잘못된 선택을 연속해서 저질렀지만, 과거의 언젠가 혹은 최근까지도 좋은 주군이었을지 모른다.
“무슨 짓인가! 내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프랑턴 가문의 기사가 어찌 다른 이에게 고개를 숙인단 말인가! 어서 고개를 들라!”
여전히 바닥에 눌려있던 프랑턴 자작이 악을 쓰듯이 외쳤다.
조금 놀랐다. 나는 프랑턴 자작이 자신의 목숨을 선택할 줄 알았다. 이래서 세상이 재미있다는 것 아닐까? 예전에 노인네들이 자주 하던 말이 조금 이해되고 있었다.
“그럼 본인은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입니까?”
“패장에게 무슨 말이 필요하겠소. 베시오!”
무능하지만 비굴하지는 않겠다는 말인가? 그래도 기개는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저쪽 편을 쓸어보았다. 내가 이곳에 묶여 있음에도 중앙과 왼쪽을 노리고 진군했던 군세는 전진도 후퇴도 하지 않은 채 멈춰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이 상황에선 바른 선택이지만, 이렇게 비교해보니 너무 패기가 없는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한 번도 자작을 죽인다고 한 적은 없었는데?”
“그게 무슨 소리시오?”
“물론 살려주겠다고 한 적도 없소.”
“지금 나를 우롱하는 것이오? 그냥 죽이시오.”
“에헤이, 너무 극단적으로만 생각하시는군. 프랑턴 자작에게 선택지를 주겠소.”
사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
“항복하시오.”
프랑턴 자작이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무 당연한 일인데 왜 여태까지 그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항복하면 살려주시는거요?”
“내가 항복한 상대를 죽일 정도로 경우가 없는 사람으로 보이시오? 애초에 전부 죽일 생각이었다면 지금 살아있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을 것이오. 대체 9성 기사를 뭘로 보고 덤빈 것이오?”
“그, 그것이···.”
그 자세한 내막이야 이미 들었기 때문에 굳이 다시 한번 들어줄 필요는 없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이 영지전에 대한 항복이 아니오.”
“그럼 뭘 원하시오?”
“내와 스승님은 아직 작위를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 세력이 없소. 그래서 사람을 모으고 있는데 우리 세력으로 들어오시오.”
프랑턴 자작이 또 한번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안될건 뭐가 있소?”
나는 자작의 등을 밟고 있던 발을 떼어 주었다. 잠시 동안 그래도 몸에 무리가 갔는지 힘들게 몸을 일으킨 자작이 내 앞에 섰다.
“나 제이스 프랑턴 자작은 빅터 하네스 백작에게 항복하겠습니다.”
프랑턴 자작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마그나의 진영쪽에서 함성이 울려퍼졌다.
목을 베라고 머리를 박고 있던 기사단장이 재빨리 달려와 자신의 주인 옆에서 같이 무릎을 꿇고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경처럼 충직한 사람을 데리고 있을 정도면 프랑턴 자작이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소. 경이 자작을 살린거요.”
이용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죽일까말까 고민은 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기사단장의 충성심이 자작을 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프랑턴 자작 쪽에 있던 병력이 전부 자작의 병력은 아닐테지요? 나머지는 정리를 부탁합니다.”
수십의 귀족들이 모여있는 연합군이었다. 프랑턴 자작이 통솔하는 오른쪽 진영에도 다른 귀족이 꽤 많이 소속되어 있을터였다. 그들은 나에게 항복한 것이 아니다.
“알겠습니다.”
프랑턴 자작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나는 다시 날아올랐다. 그때 연합군쪽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뿌우우우우!
“퇴각! 퇴각!”
뿔나팔 소리가 울리며 왼쪽과 중앙 방면의 병력들이 일제히 따른 속도로 퇴각을 시작했다. 이대로 퇴각을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재정비를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쫓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프랑턴 자작쪽에 소속되어 있던 병력의 일부도 퇴각신호에 맞춰 빠르게 이탈했다. 그러나 남은 이들도 많았다.
나는 그들을 마그나의 진영으로 불러들여 프랑턴 자작과 같이 항복을 받아냈다.
오히려 그것을 반기는 이들도 있었다. 오페르 후작가의 재산을 손에 넣지 못한 것은 분명 손해였지만, 새롭게 떠오르는 하네스 백작의 파벌로 들어간다는 것이 좋았던 것이다.
항복한 귀족들에게는 영지전에 대한 배상금도 물리지 않겠다고 한 것도 귀족들이 기뻐한 이유였을 것이다.
귀족들과의 만남을 정리하고 마그나와 둘이서만 남았을 때 마그나가 물었다.
“남은 이들은 어쩔 셈이야?”
“그건 나에게 묻지 말고 저들에게 물어야 하는것 아닐까?”
퇴각한 연합군은 완전히 물러서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시 공격할 생각도 없어보였다. 저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나도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