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완성
그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다시 진영을 벗어나 연합군 쪽으로 숨어들었다. 처음도 아니고 이미 여러 번 숨어들었지만, 굳이 영체화 같은 것을 쓰지 않더라도 몰래 숨어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은신 능력 같은 것이 없더라도 워낙 격차가 많이 나다 보니 발생하는 일이었다. 연합군 내부에 7성 정도 되는 실력자가 한명이라도 있었다면 조금 어려웠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나에겐 이 정도는 아주 어려운 것은 아니다.
스승님에게 배우긴 했지만, 예전에는 잘되지 않았던 것들이 지금은 조금만 연습해도 어렵지 않게 사용이 된다. 그래도 여전히 미숙하긴 하다. 보통은 기술을 배우고 경지가 올라가는 데 반해 나는 반대의 경우를 겪고 있다.
프랑턴 자작이 빠지고 난 나머지 대표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예전 지구나 이곳이나 잘 굴러가지 않는 조직일수록 쓸데없는 회의가 많다. 정작 우두머리들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밑에 있는 사람들은 무한 회의 지옥의 고통을 느껴야 한다.
연합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듯이 저쪽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회의는 예전처럼 격렬한 논쟁이 아니었다. 힘이 빠져 있다고 해야 할까. 이제는 이권을 차지하려고 목소리를 높이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 무언가를 하긴 해야 하는데 누군가 미끼가 되거나 혹은 대표로서 앞으로 나가 협상하자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하루 전만 해도 발언권을 얻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던 자들이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럴 때는 누군가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조용히 있는 것이 상책이기 때문이다.
미끼 역할을 맡아줄 사람은 당연히 없었고 대표로 나서려는 사람도 당연히 없었다.
“세를린 백작 당신이 이곳의 대표가 아닙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던 것이 가터필드 백작 당신이 아니요? 가터필드 백작께서 대표로 협상장에 나서시면 될 것 같소만”
“저도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저는 명분이 없지 않습니까?”
서로 총대장을 하겠다고 싸우던 사람들이 이제 서로 그 자리를 피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그럼 두 분이 공동대표를 하시면 어떻습니까?”
“푸아레 자작, 당신도 같이 가야 하지 않겠소?”
“제가 왜 대표가 되어야 합니까?”
“좌군 진영에서 돌아온 사람 중 당신이 최고 지휘관 아니오?”
이렇게 떠넘기기나 물귀신 작전이 사용되기도 했다. 더 이상 듣고 있어 봐야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본진으로 돌아왔다.
“무슨 생각이라고 하던가?”
나를 기다리고 있던 마그나가 물어왔다.
“그냥 아무 생각 없는 것 같더라고”
“안타까운 일이군.”
마그나는 진심으로 그들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괜히 힘 뺄 것 없이 그냥 기다리면 될 것 같다.”
돌아가는 꼴을 보니 도망칠 생각은 아닌 것 같고 자기들끼리 머리가 터지도록 싸우다가 결국 누구 하나를 정해서 항복하러 오면 느긋하게 충성맹세나 받으면 끝날 일이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늘 그렇듯이 세상은 예상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었다. 밤사이에 일부 귀족들이 이탈하여 도망쳤다. 알고 있었지만, 굳이 쫓아가서 잡진 않았다. 어차피 누군지 다 알게 될 것인데 그럴 이유가 없었다.
도망친 이들에게는 충성 맹세 대신 돈으로 받으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냥 내버려 두었더니 바가지에서 물이 새듯이 도망치는 숫자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데리고 온 병사와 기사들을 버리고 홀몸으로 빠져나가는 귀족들이 늘어났다.
그런 정작 병사와 기사들은 도망치는 이들이 없었다. 내가 실력행사를 하긴 했지만, 실제로 죽은 사람은 한명 밖에 없던 전투였다.
병사들도 바보가 아니다. 특히 이곳에 데리고 온 병사들은 징집병도 아니고 정규 병사들이다. 군대 짬밥이 그렇듯이 몇 년 구르다 보면 군대가 돌아가는 꼴을 대충 알게 된다.
더 이상 전투는 없을 것 같고 시간이나 때우다 돌아가면 되는데 굳이 도망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도망가다 잡히면 치도곤을 치를 테니 그것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기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만 주군으로 모신 귀족이 도망치고 홀로 남은 기사들은 계약을 해지할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어쨌든 한 번의 전투 같지 않은 전투가 벌어진 이후 이틀이 지났는데도 연합 쪽에서 대표를 정하지 못했는지 사람이 찾아오지 않았다.
괜히 시간을 끄는 것 같아 슬슬 내가 직접 찾아가 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변수가 생겼다.
“새로운 병력이 나타났습니다!”
혹시 몰라 근처에 멀리 정찰을 보내놨던 병사들이 일제히 같은 소식을 가지고 마그나와 내가 있는 사령부를 찾아오고 있었다.
“어디더냐?”
“푸른색 방패에 까마귀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마케이 자작가문이로군.”
알고 있는 가문이다. 얼마 전에 집을 찾아와 만났던 가문 중의 하나이니까. 보고를 마친 병사가 나가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보고가 들어온 것만 해도 십여개 가문이다.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닌 것 같다. 공통점이라면 모두 내가 만나봤던 귀족들이라는 것이다.
일단 우리 쪽을 공격하러 온 것이 아닌 것은 확실한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직접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내 생각이 맞는지 나가서 확인 좀 하고 올게”
“짚이는 것이 있는가?”
“있긴 한데”
국왕과의 거래로 영지전을 만들고 약간의 정보 조작의 도움을 얻은 것은 맞는데 내가 원하지 않은 덤까지 얹어준 것 같다.
“일단 다녀와서 보자고.”
밖으로 나가자마자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제는 굳이 아스트로퍼를 꺼내서 밟고 다니지도 않았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누구도 내가 날아다니는 원리는 궁금해하거나 검을 타고 다니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어검비행에 대한 로망이 없는 모양이다.
하늘을 날아 도착한 곳은 가장 가까이 접근한 가문이었다. 연합군의 진영을 넘어 반대쪽에서 다가오고 있는 가문은 다름 아닌 팔라시오스 백작 가문이었다.
멀리서 보니 생각보다 병력이 제법 많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보니 전부 팔라시오스 백작 가문의 병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근처에서 땅으로 내려와 가까이 가니 선두에 있던 기사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나를 보고 행군을 멈추고 재빨리 뒤에 소식을 전했다.
“팔라시오스 가문의 기사 발트랑이라고 합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하네스 백작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명령을 내린 기사가 말에서 내려 앞으로 다가와 예식을 갖춰 내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발트랑 경.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자세한 것은 주군께서 설명해드릴 겁니다.”
“일단 저와 오페르 후작가를 노리고 온 것은 아니겠지요?”
일단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팔라시오스 백작은 같은 파벌이긴 했지만, 이제는 오페르 후작가와 척을 진 사이여서 물어봤다.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
발트랑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오페르 후작가를 도우러 온 것은 맞는 모양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잠시 후 행군의 중앙에 있던 팔라시오스 백작이 달려와 내 앞에 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네스 백작”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는 인사도 생략하고 팔라시오스 백작에게 물었다. 다소 예의가 없는 행동이었지만, 팔라시오스 백작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팔라시오스 백작가도 참전을 선언했습니다.”
“갑자기요?”
“하네스 백작께서 오페르 후작가를 도와 영지전에 참여하시기로 한 것이 이미 왕도에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국왕이다. 능력으로 보나 행동으로 보나 이런 짓을 할 사람은 국왕 말고는 없다.
“허가가 쉽게 나왔나 보군요.”
“하네스 백작을 도우러 간다고 하니 1시간 되지 않아서 왕실 허가를 받았습니다. 역시 하네스 백작이라고 할까요. 왕실이 이렇게 빨리 일을 하는 것을 처음 봅니다.”
역시 국왕의 만행이다. 나를 돕는다고 하는 행동이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가 아닐 것이다.
“그렇군요. 그래서 오페르 후작가를 도우려고 달려 오신 겁니까?”
“정확히는 하네스 백작께 잘 보이려는 것이지요.”
팔라시오스 백작은 조금 능글맞은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이 사람은 정치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행동력도 좋다. 그 재능이 좋게 쓰이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정치를 마그나의 아버지인 나단 오페르 후작에게 배워서 그런 것인지 조금 기회주의적이고 음습한 느낌이 있다.
“저는 딱히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러시겠지요. 그래도 두 손으로 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팔라시오스 백작이 손짓을 하자 조금 늦게 따라왔던 기사가 여러 개의 깃발을 눕혀서 들고 있었다.
영지전에 함께 참여한 귀족의 깃발이라면 저렇게 들 리가 없고 누군가에게 빼앗은 것이다.
“도망자들을 처리하면서 왔습니다.”
조금씩 도망가던 귀족들이 중간에 팔라시오스 백작에게 모두 잡혔던 모양이다.
“일부러 내버려 둔 것입니다만.”
역시 이 사람도 내 진짜 힘을 알지 못한다. 사실 나도 내 진짜 힘이 얼마나 되는지 써본 적이 없는데 누가 알겠는가.
“물론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번거로움이 조금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태세 전환도 빠르다. 보아하니 내가 일부러 놔줬다는 것을 믿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럼 다른 귀족들도 팔라시오스 백작과 뜻을 함께한 겁니까?”
“다른 귀족 말입니까?”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팔라시오스 백작과 같은 생각을 한 귀족들이 꽤 많은 모양입니다.”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는 귀족들이 모두 왕실의 허가를 받았다는 얘기다. 누군가 뒤에서 조종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수준이다.
“이런 저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군요. 하기야 누가 이런 기회를 놓치겠습니까.”
“그렇게 좋은 기회입니까?”
“하네스 백작과 같은 분과 아군이 되어 친분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평생 다시 오겠습니까?”
10년 후에 온다. 만약 그때 도망치기만 해봐라 목을 쳐줄 테다.
“그럼 저는 다른 귀족들에게도 인사를 하러 가봐야겠군요.”
“저는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조금만 더 진군하시면 연합군 진영이 보일 겁니다. 굳이 피흘리지 마시고 그냥 대치만 하고 계시면 됩니다.”
나는 사방으로 날아다니며 나와 한번 같은 편이 되어보겠다고 병력을 이끌고 달려온 14개 가문의 귀족들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좀 더 세분화해서 살펴보면 팔라시오스 백작이 이끄는 예전 오페르 후작의 파벌을 제외하고 8개의 중소파벌이었다.
소문을 듣자마자 달려온 사람들이라 그런지 대군을 끌고 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기사 혹은 기마병으로 이뤄진 병력으로 속도만을 위한 구성이었다. 물론 군을 쓸 일이 없다는 것도 계산을 했던 일일 것이다.
그나마도 영지가 이곳에서 먼 곳에 있는 이들은 달려오지도 못했을 테니 이들은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귀족들이 끌고 온 병력이 각 방향에서 모이다 보니 본의 아니게 연합군의 병력을 14개 가문이 포위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병력은 별것 없어서 대단한 것이 아닌데도 포위당한 입장에서는 무척 압박을 느꼈던 모양이다.
포위진이라고 할 수도 없는 엉성한 것이 완성되자마자 연합군의 군영에서 백기가 올라왔다.
그리고 두 명의 귀족이 말에도 타지 않고 걸어오기 시작했다. 결국 끝까지 대표를 하나로 줄이는 것에는 실패했던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날아 그들 앞으로 내려섰다. 두 귀족이 잠시 서로의 눈치를 보더니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 테세이라 세를린은 패배를 인정합니다.”
“기스 가터필드 역시 패배를 인정합니다.”
“오페르 후작가의 대리인 빅터 하네스가 항복을 받았습니다.”
굳이 나이도 많은 양반들을 오래 무릎 꿇릴 생각은 없었다. 손도 대지 않고 오러를 이용해 둘을 일으켜 세우자. 둘은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이내 안색이 좋아졌다.
보아하니 자신들에게 과한 요구를 할것 같진 않을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하네스 백작”
“왜 항복하시는데 그리 오래 걸린 겁니까? 설마 제가 죽이기라도 할 줄 아셨습니까?”
“아니 그게 내부에 사정이 있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두 귀족의 얼굴이 붉어졌다. 항복하러 가는 대표를 뽑기 싫어 싸웠다고 말하기 부끄러웠겠지. 그러면 뭐 하나 이미 나는 다 알고 있는걸.
“오페르 후작의 조건은 따로 있지만, 과한 요구는 아닐 겁니다. 제 조건은 단 하나입니다. 항복하신 김에 제 파벌에 들어오시죠?”
오페르 후작가를 노리고 벌어진 영지전이 끝났다. 왕실에서 참전 허가를 남발한 덕분에 수십 개의 가문이 참전했던 다소 복잡했던 영지전은 기묘한 결과를 낳으면서 끝이 났다.
결과적으로 총 11개의 파벌이 하나로 통일이 되어 순식간에 거대 파벌이 완성되었다. 그 수장은 라이브러쉬 왕국의 새로운 검제로 불리는 빅터 하네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