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68화 (168/206)

167. 폭풍이 끝난 후

기존 1개의 대형 파벌과 10개의 중소 파벌이 모여 무려 71개의 가문이 하나가 된 일명 하네스 파벌이 정식으로 발족하며 연회를 열었다.

연회에는 각 가문의 대표와 후계자들이 전원 참석했는데 가문의 가주보다도 후계자들에게 힘이 실렸다. 왜냐하면 파벌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내가 후계자들과 또래의 나이였기 때문이다.

가문의 대표야 길어야 20년 정도면 후계자들에게 가문을 물려주겠지만, 그 후계자들은 나와 40~50년 정도는 봐야 할 사이가 아니던가.

사실 그것으로도 모자라다. 10년 후에 내가 마왕에게 죽지 않는다면 경지로 볼 때 100살은 훨씬 넘게 살 것이니 앞으로 100년간은 파벌의 수장이 바뀌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만큼 든든한 것도 없다. 당장 오페르 후작 파벌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파벌의 수장이 죽거나 무너지면 그 파벌에 속한 이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거나 공격당하게 된다.

그런데 왕국 최강의 무인이 파벌의 수장인 곳인데 앞으로 100년간 걱정 없다고? 주식이었다면 무조건 사야 하는 종목인 거다.

그래서 그런지 후계자들도 필수적으로 데려왔지만, 딸이 있는 가문들은 나와 비슷한 또래의 딸을 모두 데리고 오는 바람에 난리가 벌어졌다.

정작 나는 전혀 관심이 없는데 영애들 사이에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정보전과 신경전이 벌어졌다. 머리채를 붙잡고 싸우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허허! 그냥 한 분 골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스승님은 이렇게 속 편한 말씀을 하기도 하셨고

“나도 죽겠다.”

“으, 응 나도 힘들어”

정작 내 파벌도 아니면서 같은 집에 산다는 이유로 강제 참가가 된 슬라이트와 자칼에게도 영애들의 엄청나게 몰려갔기 때문에 때아닌 여난을 겪어야만 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슬라이트와 자칼 정도면 보통 닭이 아니라 황금 닭 정도는 된다.

물론 두 사람은 나름 즐기는지 아주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는 게 다행이랄까.

스테이시는 현명한 마법사답게 영식들의 관심과 영애들의 견제를 피해 연회 초기에 마법까지 사용해가며 몸을 피했다.

그리고 영애들의 보이지 않는 전투를 끝낸 것은 한 사람의 등장이었다.

“아이브 라이브러쉬 공주님 입장하십니다.”

옆집에 사는 이웃, 아이브 공주가 등장하면서 영애들의 전쟁은 끝났다. 감히 공주에게 견제를 날릴 정도의 간이 큰 영애는 없었던 모양이다.

오히려 아이브 공주에게 달라붙어 공주를 칭송하는 영애들의 무리가 생겼다. 영애들의 입장에서 볼 때 아이브 공주는 충분히 그럴만한 사람이었다.

외모도 상당한 미인이지만, 자신의 힘으로 경제적 자립을 이룬 사람이지 않은가. 그것은 귀족 영애들의 꿈과 같은 일이었다.

대부분 가문의 정략에 의해 결혼을 해야 하는 귀족 집안의 영애들은 자립이라는 것이 꿈과 같은 일이었다.

물론 내 도움이 거의 절대적이었고 왕실의 도움도 있었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공주가 대단한 수완을 가지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공주는 자신들을 따르는 영애들을 다루는 것이 매우 능수능란했다. 왕실의 혈통답게 어느 정도 타고난 것도 있었지만, 그 이상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평화적으로 하네스 파의 결성이 이루어지고 다음 날 나는 다시 왕실을 찾아야 했다. 전에 국왕과 거래했던 조건 때문이었다.

오페르 후작가와 관련한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국왕은 나에게 한 가지 일을 맡아 달라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당시에 물어보았지만, 일을 끝내고 오면 알려준다고 했었다.

굳이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아직 지구에는 폭풍이 계속되고 있었고 그것이 끝나기 전에 일을 마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시게 백작.”

전과 다른 점이라면 스승님을 대동하지 않고 혼자 왕실에 오더라도 국왕을 거의 대기 없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은 국왕이 혼자가 아니라 왕세자가 함께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왕세자 전하도 안녕하신지요.”

“살짝 등을 밀어줬더니 엄청난 일을 벌였더군.”

“폐하의 덕분입니다.”

살짝 돌려깐 것이다. 원래 이렇게까지 큰 파벌을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국왕이 이상하게 손을 쓰는 바람에 그야말로 거대파벌이 되어버렸다.

파벌의 정체성도 애매했다. 귀족파와 국왕파가 섞이고 그 안에서도 과격파과 온건파가 섞인 혼돈의 카오스 같은 상태의 파벌이 만들어져 버렸다.

“불만이 많을 테니?”

국왕은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전에도 느낀 것이지만, 속 마음을 읽는 아티팩트 같은 것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한들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자네라면 그것을 유지할 수 있을 테니 다른 누구도 하지 못 할 일이네.”

맞는 말이다. 내 밑에 들어온 이들은 성향을 떠나 대부분 강력한 우산을 기대하고 모인 이들이다. 물론 영지전에서 패배해 반강제로 들어온 이들도 있지만, 그들에게 과한 배상금을 요구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도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국왕에게 적대적이었던 거대 귀족 파벌과 다루기 어려웠던 소규모 파벌들을 한군데로 뭉쳐놓은 것이다.

“물론 파벌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꼭 폐하에게 유리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내가 한 번도 국왕파라고 말한 적이 없다. 비교적 국왕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지글러 후작이나 에인프라흐 공작처럼 완전한 국왕파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상관없네만.”

국왕의 시선이 왕세자에게 향했다.

“크리스탄은 불만이 많은 것 같더군. 하하하!”

마치 남의 일인 양 말하고 대소를 터트리는 국왕을 바라보는 왕세자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잘 부탁하오. 하네스 백작”

앞으로 몇십년은 좋으나 싫으나 얼굴을 봐야 하는 사이가 된 왕세자가 새삼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전하”

어차피 나도 크게 왕실과 대립 관계를 만들고 싶은 것은 아니다. 왕실일 좋은 정책을 제시한다면 나와 내 파벌은 기꺼이 그것을 지지해줄 것이다. 물론 잘못된 정책까지 지지해줄 생각까지는 없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전의 거래 때문에 온 것이겠지?”

“예, 빚은 오래 묵혀두는 것이 아니라고 했으니까요. 마침 요즘 조금 한가하기도 하고요.”

“자네에게 부탁할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는데, 마침 아르옌이 바쁘다고 하여 자네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군.”

내가 아니면 에인프라흐 공작이 가야 할만한 일이었던 건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하려면 명분이 필요할 테니 기왕 온 김에 직책도 하나 받아 가게.”

“관료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얼렁뚱땅 직책 하나 맡겨놓고 부려 먹으려 하는 것이라면 절대로 받아줄 생각이 없다.

“그런 것은 아니네. 순회감찰사라고 아는가?”

“예, 옛 제국 시절에 있던 직책으로 압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라진 직책 아닙니까?”

아주 예전 제국 시절에 존재했던 직책이다. 저 직책을 최초로 맡았던 사람이 바로 광검제다. 정확히는 광검제라는 이명을 얻게 만든 것이 바로 이 직책이다. 미친 사람에게 무소불위에 가까운 힘을 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역사서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맘대로 돌아다니면서 비리 저지르는 놈들 마음대로 목을 치고 다니는 직책으로 조선시대의 암행어사와 비슷한 것 같지만 오히려 신성 왕국의 이단 심판관과 더 흡사한 직책이다.

“그렇지. 자네를 위해 이번에 그것을 부활시키려고 하네”

딱히 나쁘지 않다. 어딘가 틀어박혀서 근무해야 하는 관료도 아니고 마음에 들지 않는 놈 마음대로 목을 날려도 된다는 것 아닌가. 실제로 광검제는 그렇게 활용했었다.

“저를 광검제로 만들고 싶으신 겁니까?”

“되고 싶나?”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광검제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국왕의 미간이 조금 좁혀졌다. 나에게서 무슨 대답을 원한 거지?

“재미있을 것 같긴 하군요.”

내 대답에 국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겠지. 이미 허가는 다 끝났고 자네가 수락하는 일만 남았네.”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직책이 필요 할만한 일입니까?”

“그렇지. 쉽지 않은 일이네. 자네 남부에 가본 적이 있나?”

왕국 남부에 가본 적은 없다.

“아니요. 없습니다.”

“남부에서 뭐가 유명한지는 알고 있겠지?”

“남부라... 일단 생각나는 것은 하얀 가루들이군요.”

“맞네. 그것일세”

내가 말한 하얀 가루는 마약이 아니다. 내가 말한 하얀 가루는 소금, 설탕, 밀가루다. 모두 남부에서 대량 생산되는 것으로 왕국에서 소비되는 양의 80% 이상이 남부에서 생산된다.

“그곳에 부정이 낀 것 같네. 아니 사실 부정은 항상 있어왔지. 다만 최근에 그것이 그냥 봐줄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진 것이야.”

“주체가 있습니까?”

“보통 귀족들의 연합으로 이뤄진 부정이었다면 꼭 자네를 보내지 않았겠지.”

그렇다. 겨우 그 정도였다면 굳이 에인프라흐 공작이나 나를 보내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아마도 마신교와 연관이 있는 것 같네.”

이어서 나온 국왕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가겠습니다.”

마신교와 관련된 일이라는데 내가 가지 않을 수가 있나.

“그리고 자네를 보좌하기 위해 크리스탄도 갈 것이네”

왕세자가 따라가려고 여기 있었던 건가?

“위험하시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않겠나? 그리고 자네와 비교할 순 없어도 내 호위들의 실력도 그리 처지진 않는다네”

그야 그렇겠지만, 던전 안에서 봤던 반마들을 생각한다면 왕세자의 호위대라고 해도 부족할 수 있다. 여차하면 내가 보호해야지 어쩌겠나.

“이것은 생각보다 꽤 중요한 임무일세. 설탕이야 사치품이니 그렇다 쳐도 소금과 밀가루는 백성들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품목이야.”

왕세자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국의 왕세자라면 당연히 저런 생각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당연한 것 같지만 역사를 뒤져보면 그렇지 못한 왕세자가 훨씬 많았다.

그리고 설탕도 매우 중요하다. 설탕의 유통이 망가지면 사탕 소비가 많은 나에게는 치명적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출발은 언제가 되겠습니까?”

“빠를수록 좋겠지”

“그럼 내일 바로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알겠네. 나도 그렇게 준비하도록 하지.”

국왕에게 바로 순회감찰사 임명장을 받고 나는 왕궁을 빠져나왔다. 원래라면 이렇게 간단하게 주어지는 직책이 아니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정작 그런 큰 행사를 싫어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국왕이나 왕세자도 마찬가지라고 이번에 아이브 공주에게 들었기 때문에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어지간히 생색을 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집으로 돌아와 잠시 남부로 임무를 받아 떠나게 되었다는 얘기를 스승님에게 하고 왕도로 돌아온 마그나에게도 들려 알려주었다.

부재 시 파벌의 운영을 마그나에게 맡겼기 때문이었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능력도 크게 모자란 것은 아니지만, 믿음의 문제인 것이다.

당장의 정치 능력이라면 팔라시오스 백작이 훨씬 뛰어날지도 모르지만, 사람이 너무 음침한 구석이 있다. 그래서 마그나를 파벌의 이인자로 삼고 그 보좌를 팔라시오스 백작과 프랑턴 자작에게 맡겼다.

약간의 반발이 있었지만, 애초에 내 일신의 무력만을 보고 만들어진 파벌이다.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 데 적극적으로 반대하진 못했다.

인사를 그렇게 처리한 것은 바른생활 사나이의 보조로 지나치게 수완이 좋은 사람과 우직하기 짝이 없는 사람을 붙여놓으면 균형을 이룰 것이란 생각이었다. 실제로 꽤 괜찮은 조합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아침 일찍 찾아온 왕세자를 만나 왕실의 비공정을 타고 다시 왕도를 떠났다.

그리고 떠나는 날 아침에 드디어 통로 너머의 지구에 폭풍이 멈춘 것을 확인했다.

비공정을 타고 바로 출발했기에 지구로 바로 들어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통로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지형이 크게 바뀔 정도의 폭풍이었던 것이다.

지구에도 들어가 보고 싶은데 지겨운 비공정 여행이 시작되니 차라리 내려서 직접 날아갈까 고민하고 있을 때 옆자리의 왕세자가 말을 걸었다.

“자네. 내가 왜 이번에 따라가는지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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