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69화 (169/206)

168. 진짜 목적

“저를 돕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아무리 내가 왕도 인근에서 유명하다고 해서 지방에서도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변두리에 살아봤기에 잘 알고 있다.

그나마 내가 살았던 크리스타 백작령은 변경치고는 번화한 편이고 영주인 크리스타 백작이 왕도의 소식에 관심이 있어 아주 소식이 늦게 오는 곳은 아니었다. 거기에 나는 행정관에게 가르침을 받았기에 변경에 살던 것치고는 여러 가지 최신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변경에는 그렇지 못한 귀족가가 훨씬 많다. 먼 곳의 소식을 빨리 접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평생 그런 소식 듣지 않고도 지방의 영주로 살아가는 사람이 허다하다.

내가 아무리 9성 기사에 오르고 왕도에서 유력 인사이며 순회감찰사로 임명되었다고 해도 지방에 가면 ‘그게 뭔데?’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순회감찰사의 막강한 권한을 사용한다면 그냥 다 썰어버리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은 예전 광검제와 용사들이 대륙을 쥐고 흔들던 혼돈의 시대이고 지금은 그렇게까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왕세자가 함께 한다면 어떨까? 어떤 간이 붓다 못해 간 부종에 걸린 귀족이라고 해도 왕세자를 무시할 수 있는 귀족은 없다.

“그건 맞지. 하지만 단순히 자네를 돕기 위한 것은 아닐세.”

“지방 영주들에게 존재감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까?”

왕세자를 대놓고 무시하는 귀족이야 없겠지만, 지방으로 갈수록 왕실의 권위가 약해지는 것은 맞다.

왕실의 직접적인 관리를 받는 몇 영지를 제외한다면 그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왕실에서는 지방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런 것도 없잖아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네.”

“그게 뭡니까?”

“자네와 친해지는 것”

“네?”

너무 의외의 답이 나와서 조금 당황했다. 이해를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놓고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이번 던전에서 제멜아크의 티에그린 왕세자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지?”

“예, 그런 임무였으니까요.”

“다른 나라의 왕세자가 자네와 더 친한 것 같다는 말이지.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네. 그래서 자네와 친해질 기회를 놓칠 수 없었지.”

왕세자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조금 장난기가 섞여 있긴 하지만 진심이다.

“제가 망명이라도 할 것 같으십니까?”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전혀 없다고 할 순 없겠지. 하지만 자네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네.”

“그럼 걱정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친해져서 나쁠 것은 없지 않겠는가?”

틀린 말은 아니다. 언젠가 왕이 될 사람과 친해져서 나에게 나쁠 것은 하나도 없다.

“그렇긴 하지요.”

“그럼 우리 친해지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할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왕세자와 친해지는 101가지 방법 같은 책이라도 읽었다면 모를까. 나는 그런 방법을 모른다.

“흠, 나도 방법은 잘 모르네. 나는 친구가 없거든”

“아···.”

하기야 누가 왕세자와 친구 하자고 덤비겠는가?

“그래도 슬레이프 백작과는 친하지 않으십니까?”

에인프라흐 공작의 장남이자 슬라이트의 큰형이다. 나이도 비슷하고 그 정도는 되어야 급이 맞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슬레이프 백작은 너무 딱딱해. 좋은 신하는 될 수 있지만, 친구가 될 수는 없는 사람이지. 아니 그쪽이 거부한다고 봐야 할까.”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공작가를 슬라이트에게 물려준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슬레이프 백작이라면 일부러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고 나를 친구로 삼자는 것도 좀 그렇지 않은가? 외모로는 구별하기 힘들지만, 일단 나와 왕세자는 나이 차이도 제법 많이 난다.

“저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아니지. 슬레이프 백작과는 이런 대화조차도 성립이 되지 않는다네”

“안타까운 일이군요.”

영혼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대답에도 왕세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평생 그런 대답을 들어오지 않았을까? 이렇게만 본다면 왕족도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러니 과거 용사들이 황제의 자리를 탐내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과거의 용사 누구 하나라도 마음만 먹었다면 황제의 자리를 충분히 빼앗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세자와의 친분도 좋지만, 나는 일을 빨리 끝내고 지구로 넘어가고 싶었다.

“그야 그렇지.”

왕세자가 손짓을 하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준비해두었던 두툼한 서류를 가져왔다.

“이게 우리가 파악한 정보라네”

나는 서류를 건네받았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전부 읽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분량이었다. 이럴 때 써먹을 수 있는 좋은 도구가 있다.

“아스트로퍼”

손목에서 아스트로퍼가 부름을 받고 튀어나왔다. 아무 일도 없었지만, 아스트로퍼는 예전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오지 않고 있었다.

-안녕!

“그래, 안녕하다. 여기 이 서류 좀 봐주지 않을래?”

-알았어.

서류를 같이 보긴 하겠지만, 내가 무슨 천재도 아니고 한번 본다고 그것을 전부 파악하거나 외우지는 못한다. 하지만 아스트로퍼의 도움을 받는다면?

나는 빠르게 중요할 것 같은 내용만 보면서 넘겼다. 아스트로퍼는 대충 보는 것 같았지만, 아마 전부 저장소에 저장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 서류의 내용에서 눈에 띄는 이름을 발견했다.

제이미 하셀브링크 자작

나도 천재가 아닐 뿐이지 머리가 바보인 것은 아니다.

“왜 아는 이름이라도 있는가? 자네가 딱히 남부에 접점은 없는 것으로 아네만”

내가 잠시 멈칫하자 옆에서 왕세자가 참견을 해왔다.

“아는 이름이 있군요.”

제이미 하셀브링크 자작, 내가 처음 마도기차를 에인프라흐 공작과 함께 왕도로 올라갈 당시 옆자리에 앉았던 귀족이다. 나에게 명함도 건네줬었고 영지의 특산품이 설탕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작은 인연이 이런 식으로 다시 이어질 줄은 몰랐다.

“그런데 마신교는 이 사건에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 겁니까?”

아직까지 서류를 살펴보는데 마신교와 연관된 것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남부에 새로운 세력이 생겼네 파벌이라고 해도 좋겠지. 남부에서 설탕, 소금, 밀가루를 대량으로 재배하는 영지끼리 동맹을 맺어 수량을 조절하기 시작했네.”

“그게 가능한 겁니까? 다른 것이야 그렇다 쳐도 소금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품목 아닙니까?”

“물론 왕실에서 손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니네. 관료들도 파견했었고 선을 넘은 귀족들에게 손을 쓰기도 했었네. 하지만 한계가 있었지.”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통제가 안 되는 겁니까?”

“지방 사업이 대부분 그렇지만, 비리는 늘 있었네 선을 넘지 않는다면 적당한 비리는 눈감아주는 경향도 있지. 그런데 너무 많은 귀족이 일시에 선을 넘어버리게 된 거야.”

-밀매구나?

갑자기 아스트로퍼가 끼어들었다. 왕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이다. 국가에 납품하는 수량을 줄인 것이 아니야. 그러니 쉽게 건드릴 수 없었지. 그런데 뒤로 밀매를 하는 양이 늘어난 것이지. 더구나 소금 말고 다른 품목은 통제를 하기도 힘들지. 그런데 작은 아가씨는 밀매가 문제가 된 것을 어떻게 안거지?”

-제국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거든.

“그래서 그때는 어떻게 해결했는가?”

아스트로퍼는 손으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33개 가문이 멸문당했어.

대륙의 주인이었고 초강대국이었던 제국이라고 해야 하나. 스케일이 크다.

“우리도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쉽지 않다네 그렇게 된다면 당장 소금 유통량이 턱없이 떨어질 테니까.”

과연 그럴까? 귀족들은 너무 항상 귀족의 시선에서만 세상을 보려고 한다.

“아스트로퍼 그래서 제국 때는 소금 유통량이 줄어들었나?”

-아주 조금?

조금 떨어지기는 하는구나. 소금을 만드는 것은 밑에서 일하는 일꾼들이지 귀족이 아니다. 영주가 바뀌든 안 바뀌든 그들이 하는 일은 그대로라는 말이다. 귀족의 시선으로 볼 땐 영주가 바뀌면 영지의 사업이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제국에서는 무슨 준비를 하고 일을 벌인 것인가?”

-영주 대리인을 빨리 파견하기는 했어.

왕세자가 뭔가 깊은 생각에 빠졌다. 대책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 나도 가서 마신교와 손을 잡은 귀족들은 전부 목을 날리면 되는 건가?

“그런데 밀매를 해서 돈을 모은다. 다른 설탕이나 밀가루의 상황도 마찬가지겠지요?”

“비슷하다네”

“그것을 뒤에서 마신교가 조종하고 있다는 것이고요.”

“그렇네. 마신교의 신도들은 꽤 많이 그리고 은밀하게 퍼져있네. 우리도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지. 이번에 눈에 띈 자는 ‘포교자’라고 불리는 자라네. 사제와 함께 마신교의 핵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마신교의 핵심 간부가 부교주와 사제만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포교자요?”

“자네가 사제를 처치한 후 왕실에서도 직접 처리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꼬리를 잡지 못했네. 마신교의 간부들은 대부분 이런 경향이 있지.”

확실히 변이체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잡기가 쉽지 않다. 영체화 하나만 가지고 있더라도 마음 먹고 도망치면 일반적인 기사들로는 잡는 것이 어렵고 부교주처럼 통로를 열 수 있다면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이다.

사제 역시 정신 교란을 사용한다면 추적을 따돌리는 것이야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번 일의 뒤에 그 포교자가 있는 거군요.”

“그렇지. 포교자는 숨는 것 외에도 사람을 설득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네. 그 능력으로 영주들의 연합을 만든 것이지.”

정신 교란의 능력도 가지고 있는 걸까?

“그래서 자원들을 밀매해서 뭘 한답니까? 적지 않은 돈일 텐데요.”

“자금 추적에도 실패했네. 왕실 정보부가 무능하다고 생각하진 말아주게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야. 아무래도 돈을 사용하지 않는 것 같아.”

귀족들의 연합을 만들어 전략 자원이라고 할 수 있는 물자들을 빼돌려 거금을 만들어놓고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거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물론 이상한 일이네.”

“아니 돈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마신교도 돈이 필요하기는 할 테니 그냥 모을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마신교의 목적 말입니다.”

왕세자가 조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지금 이 시점에 그런 행동을 해서 마신교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말이죠.”

나만 알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교주가 큰 부상을 입었다. 부교주는 일부러 부상을 입은 척 해서 활동을 중지했다. 그런 시점에서 이렇게 눈에 띄는 활동을 하는 것이 좀 수상했다.

“그리고 저라면 밀매를 통해 자금을 모을 것 같지 않은데요.”

완전히 영주들을 설득했다면 그냥 영주들에게 모금을 하는 것이 더 쉽지 않나? 그리고 마신교에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할 것 같지도 않다. 단지 돈은 핑계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마신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마왕의 강림입니다. 마왕이 이 세계를 침공하는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지배하려는 것 아닌가?”

아니다. 아직 이 세계의 사람들은 피체둘라라고 불리는 마왕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한다. 지난 두 번의 침공을 광검제가 큰 피해 없이 막아주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살았던 지구의 예를 들어 생각한다면 피체둘라가 원하는 것은 기존이 있는 모든 생명의 소멸이다.

그렇다면 그냥 설탕, 소금, 밀가루의 생산을 막아서 왕국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훨씬 목적에 부합하는 행동이다.

“아닙니다. 마왕은 지배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멸망을 원하는 것이죠.”

마신교의 교도들에게는 어떻게 세뇌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마왕이 강림해서 이 세계를 점령한다면 그들도 죽을 것이다.

“잠깐 시간을 좀 주겠나?”

왕세자가 다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어쩌면 광검제가 순회감찰관의 직책을 가지고 그랬던 것처럼 나도 많은 피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