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하셀브링크 영지
왕세자는 꽤 오랜 시간 동안 고심했다.
“사실 이번 일은 아버지께서 자네를 시험하는 의미도 있었네.”
“알고 있습니다.”
나도 국왕을 믿지 않지만, 국왕도 나를 믿지 않는다. 국왕의 성향일 수도 있지만, 국왕의 자리에 있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것으로 국왕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국왕을 탓하려면 망나니 왕자를 딸려 보낸 것부터 시작해서 망나니 왕자가 어떻게 순혈을 가지고 있었는지 따져야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어떤 것이 진짜인지 모르는 제국 황실의 순혈 상자 두 개를 국왕에게 돌려주었다.
그것을 돌려받는 국왕에게서는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아무리 무능한 자식이었다고 해도 자신의 피붙이가 죽은 일이다. 그러나 국왕은 아무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 국왕의 행동을 보면 냉혈한이라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국왕은 망나니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죽을 자리로 밀어 넣은 것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론 후자가 되어버렸지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해해주니 고맙네.”
“확실히 우리 생각은 안일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네. 왜 우리는 마왕의 이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과거 용사들이 너무 쉽게 마왕을 막아낸 탓일 겁니다.”
마왕의 군세가 적어도 세계의 절반쯤 아니 삼 분의 일 정도만 지배했더라도 마왕이 어떻게 바꾸는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첫 번째 침공에서는 인류의 연합군과 대격돌이 있었다고 하나 마왕군이 인간이 사는 영토를 제대로 점령하지 못했고 두 번째 침공에서는 아예 등장하자마자 광검제가 홀로 막아내었다.
그러니 마왕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아마 용사들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광검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막이 후세에 전해지진 않았다.
“이것은 돌아가서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군. 한가지 말해두자면 왕실도 그냥 놀고 있는 것은 아니네.”
“그보다 당장 눈앞의 일부터 처리해야겠지요.”
“그래야지 계획이라도 있는가?”
“일단 일면식이라도 있는 사람을 먼저 만나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내 뜻에 따라 왕실 소속의 비공정은 제이미 하셀브링크 자작의 영지로 향했다.
왕세자의 비공정은 공작가의 비공정과 비교해서 편의 시설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다른 설비가 꽤 많이 달려있었다.
비공정 안에서 업무를 볼 수 있도록 마법 통신을 비롯해 여러 기능이 탑재해 있었는데, 이런 것을 보면 지구의 대통령이 타던 비행기인 1호기와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마법 통신을 이용해 미리 하셀브링크 자작가에 방문을 알리고 왕세자와 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은 정치적인 이야기였으나 개인적인 이야기도 있었다.
특히 왕세자는 아이브 공주에 관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많이 하고 있었다. 이것 역시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을 터였다. 혈맹처럼 효과적인 동맹 수단은 없으니까.
이미 그런 귀족들을 많이 겪어본지라 회피 기술을 제법 습득한 나는 능숙하게 왕세자의 작업을 벗어났다.
“쉽지 않군.”
“제가 그렇게 쉬운 사람 아닙니다.”
나중에는 아예 대놓고 아이브 공주와 연결을 시켜주려고 했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교주를 막아내기 전까지는 결혼 생각은 없으니까.
그때쯤 되면 아이브 공주는 이미 누군가에게 시집을 간 후일 것이다.
며칠의 비행 끝에 드디어 지겨운 비행이 끝나고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했다.
비공정에서 내리자 일가를 모두 데리고 나온 하셀브링크 자작이 우리를 환영했다.
“왕세자 전하를 모시게 된다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하셀브링크 자작의 모습은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기차에서 자작을 봤던 것이 엄청나게 오래전 가지만 사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왕세자를 맞이하는 하셀브링크 자작은 정말 왕세자를 기쁘게 맞이하고 있었다. 지방 귀족이 직계 왕족 그것도 왕세자를 만나는 일은 정말 드문 일이긴 하다.
그러나 하셀브링크 자작은 엄연히 왕실에서 뽑아놓은 파벌의 명단에 들어있는 가문이다. 마신교인줄 모르고 가담했겠지만, 분명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을 했을 터였다. 그런데 저렇게 진심으로 반갑게 왕세자를 맞이한다는 것이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셀브링크 자작님”
왕세자에게 자작과 그의 가족들이 인사를 올리고 다음에 내 차례가 왔다.
“자네는?”
“2년이 좀 안 됐나요? 에인프라흐 공작님과 함께 왕도로 올라가는 기차에서 뵈었지요.”
“아! 그때 그 공자로군?”
내가 소개하자. 하셀브링크 자작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럼 자네가 방문 명단에 있던 빅터 하네스 백작인가?”
“예, 그렇습니다.”
“허어!”
하셀브링크 자작이 중앙의 소식에 민감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역시 내 소식이 이곳까지 전해지진 않은 모양이다. 사실 지방 귀족의 반응으로는 이것이 정상일 것이다.
“백작이 되셨다고?”
“운이 좋았습니다.”
“그것이 운으로 가능한 일이던가? 대단하군. 그때 그 공자가 백작이 되셨어.”
하셀브링크 자작은 나를 여전히 그때의 공자로 인식하고 있던 것인지 존대와 평대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큰 실례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내 파벌에 있는 귀족도 아니고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하네스 백작이 어리다고 무시하면 안될 것이야. 하네스 백작은 7성 기사인 노엘 브라스 후작의 수제자이자 9성의 경지에 오른 기사라네. 그리고 폐하께 정식으로 임명받은 순회감찰사이기도 하지.”
왕세자가 조금 짓궂은 표정으로 한마디를 보탰다.
“예에?”
그런데 하셀브링크 자작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 그런 것인지 고장 난 인형처럼 입만 벌리고 있었다. 하기야 아직 소년의 테를 벗지 못한 젊은이가 9성 기사라니 왕세자가 한 말이 아니었다면 믿지도 않았을 것이다.
“장난이 지나치십니다.”
“장난은 무슨 나는 사실만을 말했을 뿐이네”
너무 놀라서 말문이 막혀버린 자작이 원상태로 돌아오기 전에 눈치 빠른 하셀브링크 가문의 집사가 재빨리 끼어들어 우리를 안으로 안내했다.
하루 전에 연락했는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화려한 만찬과 깨끗하게 청소가 된 방이 우리를 맞이했다.
시설을 둘러보건대 확실히 남부가 왕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는 해도 다른 지방에 비해 부유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살았던 동부 끝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었다.
하셀브링크 영지만 하더라도 고가의 상품인 설탕이 특산품인 영지니 꽤 부유한 영지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왕도의 최신 유행과는 거리가 좀 있었지만, 음식과 장식 같은 것이 제법 수준이 높았다.
왕세자와 하셀브링크 자작은 따로 자리를 만들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왕세자와 나는 이미 서로 나누어져 정보를 수집하기로 의견을 맞춘 상태였다.
왕세자는 하셀브링크 자작을 맡아 정보를 뽑아내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하셀브링크 자작의 자제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셀브링크 자작의 자제들은 2남 1녀였는데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장남이 29살이었고 차남이 25살 그리고 막내딸이 18살이었다.
왕도의 영애들과는 다르게 의외로 자작의 딸은 나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처음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후 방으로 돌아가서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두 아들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하셀브링크 자작의 두 아들은 모두 기사였다. 둘 다 3성에 머물러있었는데 영지의 부유함과 나이를 생각해보면 평범한 재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에인프라흐 공작과 연이 있으시다지요?”
“예, 자주 만나뵙곤 하지요.”
“그럼 다른 분들과도 만나보셨습니까?”
“물론이지요. 지글러 후작님과 올라프 후작님도 만난 적이 있지요.”
“그분들은 정말 소문처럼 대단하신 분들인가요?”
이게 바로 명성에서 밀린다는 것일까? 9성 기사를 앞에 앉혀놓고 7성 기사들을 왜 물어보고 있었다.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지글러 후작님은 무척 빠른 쾌검을 사용하시고 올라프 후작님은 엄청난 힘을 이용한 전투술을 사용하십니다.”
나는 적당히 그들의 바람을 충족시켜주면서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을 던졌다.
“주변의 영주님들과는 교류가 얼마나 있습니까?”
“타 영지에서 자주 찾아오는 손님은 있습니까?”
어떻게 보면 노골적인 질문이었지만, 자제들은 별 의심없이 솔직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그래서 점점 더 이상했다.
별로 의심할 구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신교란으로 조종을 받는다고 해도 그들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럼 영지를 좀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아직 자작가의 내부를 제대로 뒤져본 것은 아니지만, 핵심 인물이라고 할만한 자작과 후계자들에게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한 나는 외부에서 문제를 찾아보기로 했다.
“물론이지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허락해주어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안내를 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방식대로 둘러볼 것이라서요.”
나는 베란다로 다가가 훌쩍 뛰어올라 비행을 시작했다. 뒤따라 나온 두 아들이 하늘을 날아가는 나를 보고 경악하는 것이 보였지만, 나는 유유히 하늘을 날아갔다. 영주성이 있는 도시부터 한번 둘러볼 생각이었다.
우선은 공장과 창고다. 수확한 사탕수수를 설탕으로 만드는 공장과 그것을 쌓아두는 창고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워낙 큰 건물들이기에 그것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도시 외곽에 지어져 있는 창고는 얼핏 보기에도 아주 튼튼하게 지어져 있었고 군기가 바짝 든 병사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영지의 자금줄이나 다름없는 곳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정예 병사들도 하늘을 날아서 내려오는 사람을 처음 보면 놀라서 잠시 바보가 된다.
“누, 누구십니까!”
창고를 지키는 경비대의 조장쯤으로 보이는 병사가 검에 손을 올리며 앞으로 나섰다. 말을 좀 더듬긴 했어도 이 정도면 잘 대응한 것이다. 암테일 영지의 병사들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수고하는군. 나는 왕실에서 파견된 순회감찰사 빅터 하네스 백작이라고 한다. 왕세자 전하와 함께 하셀브링크 자작의 영지를 방문한 김에 이곳 견학을 하기로 했다.”
왕실의 문장이 양각된 순회감찰사의 표식을 꺼내 보여주자. 조장이 바로 무릎을 꿇었다.
“실례했습니다! 부디 용서를!”
영주가 자작인데 이 젊은 사람이 백작이란다. 순회감찰사가 뭔지는 몰라도 왕실의 인장을 보여주니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왕도에서는 덜하지만, 지방일수록 귀족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좀 심한 곳은 여전히 귀족능멸죄 같은 얼토당토않은 죄목을 붙여서 평민들의 목을 치는 곳도 있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크리스타 영지의 소영주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 않은가. 반항해봐야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신경 쓰지 않네 일어나도록 하게. 그저 유명한 하셀브링크 자작가의 설탕 창고를 견학하려는 것뿐일세.”
“감사합니다.”
경비 조장은 허리를 굽실거리면서 일어섰다.
“그럼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조장을 따라 창고 안으로 안내를 받으려고 할 때 신경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처음부터 안에 설탕이 얼마나 쌓여있나 그런 것을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설탕의 저장량도 확인하려고 했지만, 자작가 내부에서 찾지 못한 마신교의 흔적을 찾아보려는 것이었다.
마신교에서 사람을 파견했다면 어디에 붙여놨을까? 자작가 내부에 두는 것이 가장 확실하겠지만 그곳이 아니라면 설탕과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해서 이곳으로 온 것이다.
내가 신경쓴 부분은 바로 사람이었다. 창고 주위를 지키는 경비병 대부분은 나를 보고 겁을 먹고 조장과 함께 무릎을 꿇었지만, 일부 경비병들은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분명히 나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귀족에게 적개심을 품는 평민이야 보기 드문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늘을 날아온 사람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적개심을 품는 평민은 꽤 드물지 않을까?
“잠시 멈춰보게”
나는 조장을 멈추게 한 후 나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는 병사 셋을 지목했다. 공교롭게도 셋은 한군데에 뭉쳐있었다.
“거기 병사 셋, 이리 나와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