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71화 (171/206)

170. 본 모습

“뭘 하느냐! 어서 앞으로 나오지 못할까!”

조장의 호통에 병사 셋이 꿈지럭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내 앞에 서서 눈을 내리깔고 있었으나 여전히 나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젊다 못해 어린놈이 갑자기 나타나서 귀족이랍시고 거들먹거리면 나라도 좋은 감정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이 병사들은 이곳에 근무한 지 오래된 병사들인가?”

“2년쯤 되었습니다.”

경비 조장이 대신 답을 해주었다. 마침 시기가 딱 맞는다.

“수고가 많군. 마침 이 병사들의 자세가 다른 병사들과 달리 눈에 띄어서 말이야. 물론 좋은 의미일세”

“아, 그렇습니까?”

조금 어두워졌던 경비조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혹시나 내가 깽판이라도 부리지 않을까 걱정했던 모양이다.

“내가 이 병사들에게 상을 내려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나는 금화를 꺼내 세 병사에게 몇 개씩 나눠주었다. 보통 병사들이라면 쉽게 만지지 못할 큰 금액이다. 그러나 세 병사는 돈을 받으면서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품고 있는 적개심이 커지고 있었다.

나는 따로 경비 조장에게도 작은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얼마 안 되지만, 병사들과 회식이라도 하게나.”

“감사합니다!”

“우아아아! 백작님 만세!”

이미 병사들에게 건넨 금화를 본 경비 조장은 허리를 직각으로 숙였다. 단순히 회식으로 끝날 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병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나를 칭송했다.

그래 이게 정상이다. 아무리 평민들이 기본적으로 귀족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어도 금융치료를 받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물론 영구적인 치료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일시적으로는 절대적인 효과를 보이는 것이 정상이다.

“너희들은 뭣들 하느냐! 어서 백작님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지 못할까!”

돈을 받고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는 세 명에게 경비 조장이 호통을 쳤다.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질투와 질책이 섞인 눈빛이 세 병사에게 쏟아졌다.

세 병사는 마지못해 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각자 감사하다는 말을 남겼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이놈들은 확실히 보통 병사가 아니다.

“자네는 자리를 지켜야 할 터이니 이 병사들에게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너희들 백작님을 제대로 모셔야 할 것이다.”

경비 조장의 서슬 퍼런 명령에 병사들이 찔끔하면 앞장을 섰다. 고위 귀족은 무서워하지 않아도 매일 봐야 하는 경비 조장은 무섭다는 건가?

사실 창고라는 것이 별것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세 병사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니 서늘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마법인가?”

“예, 설탕이 녹으면 안 되니 마법진을 설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병사 중 하나가 그래도 자기 맡은 일을 하려는 것인지 설명을 해주었다.

대단한 수준의 마법진은 아니어서 온도를 조금 내려주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마법을 유지하려면 꽤 비용이 들어갈 것이다. 그 정도로 설탕은 돈이 되는 물건인 것이다.

잘 정리된 창고는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설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곡식류도 이곳에 함께 보관하고 있었고 소금도 보였다. 설탕이 비싸다고 해서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곡식과 소금은 아니다.

“이곳에 불이라도 난다면 하셀브링크 영지가 큰 타격을 입겠군.”

혼잣말이었지만, 들으라고 한 소리다.

“그런데 하셀브링크 영지에서 외부로 수출하는 설탕의 양이 예전과 다르게 부족하다는 말이 있던데? 그 이유는 뭔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모르쇠인가?

“그런가? 사탕수수가 흉작이 들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고?”

“그런 말을 얼핏 들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훑어본 자료에는 흉년이란 말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자네들이 살아가는 영지에 흉작이 드는지 아닌지도 모른다는 것인가?”

“죄송합니다. 근무에만 충실하다 보니 외부 소식을 들을 기회가 없습니다.”

대화를 나눌수록 커져가는 적개심에 나는 미소 짓고 있었다.

“꼭 누가 설탕을 빼돌리는 것만 같다는 말이지. 나는 그것을 조사하기 위해 왕도에서 파견되었다네.”

대답이 없었다. 하기야 이 정도 도발에 걸릴 정도라면 첩자로 잠입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놈들이 반마라서 변신이라도 해준다면 일이 참 편해질 텐데 도발에 쉽게 당해줄 리도 없고 이놈들이 반마라는 확신도 없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싸움을 걸어서 확인하기도 애매하다. 순회감찰사라는 막강한 직책을 사용한다면 못 할 것도 없겠지만, 지금은 용사가 살던 그런 시대가 아니다.

그때 갑자기 생각나는 물건이 있었다.

나는 아공간에서 작은 시약병 하나를 꺼냈다. 예전에 마탑에서 구입했던 대 악마용 물품 중의 하나다. 그동안 마땅히 사용할 기회가 없었는데 마침내 사용할 기회를 찾은 것 같다.

“이것은 왕도에서 샀던 아주 비싼 향수인데 한 번씩 향을 맡아보게”

나는 뚜껑을 열며 앞으로 내밀었다.

“저희가 감히 그럴 수는 없습니다.”

병사들은 사양하려고 했다. 내가 향수라고 했지만, 내가 봐도 절대 향수병은 아니었으니까.

“아니 내가 이것을 선물하려고 하는데 마땅히 주위에서 솔직하게 감상평을 해줄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네. 내 하인들은 무조건 다 좋다고만 해서 말이야. 물론 자네들에게 거부할 권리는 없네”

이렇게까지 말하면 당연히 거절할 수 없다. 병사들이 차례로 나서서 내가 열어둔 시약병에 코를 들이대고 냄새를 맡았다. 효과는 아주 빨랐다.

“쿨럭! 이거 향수가 맞습니까?”

“우욱! 절대로 선물은 하지 마십시오. 썩은내가 납니다.”

“향수가 상한것 같습니다!”

병사들이 코를 붙잡고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냄새가 지독한가? 물론 내가 직접 맡아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일부러 고통을 당하는 취미 같은 것은 없으니까.

“그런가? 향수가 상했을 줄은 몰랐군. 미안하네”

마탑에서 대 악마용 으로 사온 물건이다. 당연히 향수가 아니다.

내가 꺼낸 것은 악마용 성적 흥분제였다. 이 물건을 받아왔을 때 설명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악마용 성적 흥분제 : 악마의 성기가 반응하는 것을 확인

참으로 간단명료한 설명이었다. 대체 이런 것을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물건들은 더 쓸모가 없어 보였고 전투 중에 사용하면 혹시 틈이라도 만들 수 있을까 해서 받아온 물건이었다.

병사들이 반마라면 효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효과가 빠르고 확실했다.

“어, 어?”

“이게 무슨!”

병사들이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민들이 제대로 된 신축성 있는 속옷을 입고 있는 경우가 거의 없고 병사들의 바지는 조금 펑퍼짐하게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니까. 덕분에 병사들의 중요한 곳이 발딱 서서 텐트를 만드는 것을 가리지 못하고 있었다.

자, 이제 판은 깔렸다. 왜 내가 이런 더러운 꼴을 눈으로 보면서까지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것인지 잠시 회의감이 들었지만, 쓸모없이 오래 묵혀두었던 물건을 써먹을 곳이 생겼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이것은 다른 곳에서도 반마 판별법으로 아주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여자는 어쩌지? 완전한 판별은 어려울 것 같다.

“여봐라!”

내가 크게 소리를 지르자 창고 안팎에 있던 병사들이 반응했다. 특히 밖에서 조금 전에 만났던 경비 조장이 마수라도 일격에 때려잡을 기세로 돌격하듯이 달려왔다.

“이놈들이 나를 능멸하려 하는구나!”

나는 소리치며 세 병사를 가리켰다. 상황은 명백했다. 세 병사가 모두 엉거주춤한 자세로 아랫도리를 붙잡고 서 있었으니까.

“이 미친놈들이!”

빛보다 빠른 판단력으로 상황을 확인한 경비 조장이 눈이 뒤집혀서 최소 6성 기사는 되는듯한 움직임으로 날아가듯이 달려가 날아 차기를 날렸다.

미처 피하지 못한 병사가 정통으로 그것에 얻어맞고 뒤로 넘어갔으나 경비 조장의 분노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검집째로 병사들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죽어라! 죽어! 그래야 우리가 산다!”

경비 조장의 손속은 굉장히 매서웠다. 보통 이런 중요한 시설의 경비 관리직을 아무나 시키지 않는다. 보통은 견습 기사로 수업을 받다가 재능이 없어서 낙오된 이들이 이런 업무를 맡게 되는데 지금 움직이는 것으로만 보면 경비 조장은 왜 정식 기사가 되지 못했는지 의문인 정도였다.

물론 실제 실력은 오러홀을 겨우 만든 1성 기사 수준이긴 하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경비 조장을 뒤따라온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구 하나 나서서 바닥에 쓰러져 일방적인 구타를 당하고 있는 병사들을 도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냥 죽어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일개 병사가 중앙에서 파견된 백작에게 성기를 세우고 능멸했다? 내가 봐준다고 해도 하셀브링크 자작이 이 자리에 있는 병사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슬슬 때가 됐는데?’

경비 조장은 매질은 검을 뽑지 않았다 뿐이지 정말 죽일 생각으로 때리는 것이었기에 맞고 있는 병사들이 반마라고 해도 쉽게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일 때는 이성을 잘 유지하는 것 같아도 반쯤은 변이체인 녀석들이다. 당장이라도 힘을 드러내고 경비 조장을 찢어 죽이고 싶을 것이다. 몸은 버텨도 정신이 버티지 못한다.

그것까지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 자리에서 맞아 죽지 않는다 해도 하셀브링크 자작이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크아아아!”

마침내 버티지 못한 한 녀석이 나왔다. 괴성과 함께 녀석이 벌떡 몸을 일으키자 정신없이 구타하고 있던 경비 조장이 깜짝 놀라 몸이 굳어버렸다.

“조장 뒤로 물러나도록!”

조장을 뒤로 밀어내며 내가 앞으로 나섰다. 이런 눈치 빠르고 충성스러운 경비 조장이 죽게 놔둘 수는 없으니까.

“키에에에!”

“끄아아아!”

하나가 변이를 시작하자 나머지 둘도 눈치를 보더니 괴성과 함께 몸을 변이시키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나에게 위협이 되는 수준은 아니지만, 이런 것을 처음 본 병사들은 아니었다.

“아, 악마다!”

물론 변이 하는 모습이 사람과 거리가 매우 멀기는 하지만 눈치가 빠른 병사가 있었다. 하셀브링크 영지에는 눈치가 빠른 병사들이 많은 것 같다.

누군가 한명이 그렇게 소리치자. 순식간에 병사들이 혼란에 빠졌다.

“닥쳐라! 대형을 짜라! 방어진! 방어진!”

그래도 혼란에 빠지지 않은 경비 조장이 소리치며 병사들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훨씬 유능한 사람이다. 우리 영지로 스카우트라도 해볼까?

경비조장의 빠른 조치로 얼마 되지 않는 병사들이 어설프게나마 방어진을 이뤘지만 그렇다고 혼란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고 공포는 빠르게 사람을 좀 먹는 법이다.

아무리 뒷동산에 마수가 뛰어노는 세계라고 해도 눈앞에서 이런 장면을 보는 일은 흔치 않으니까. 그래도 이 정도면 참 양반인 것이다. 변이체가 처음으로 나타났을 때 지구는 어땠는가? 이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생지옥이었지.

검과 창을 겨누고 있는 병사들이 얼굴이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괴물로 변해가는 반마를 보며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들고 있는 창을 눈에 띄게 벌벌 떨고 있는 어린 병사도 보였다.

경비조장도 용감하게 그런 병사들 앞에 나와 있지만, 크게 다르진 않았다. 그래도 나는 이 병사들은 높이 평가한다. 오래전의 누군가와 다르게 최소한 도망을 치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 내가 하늘을 날아서 이곳에 온 것을 전부 잊어버리고 있는 모양이다.

오랜만에 스승님에게 물려받은 반지를 뺐다. 반지로 감춰왔던 9성 기사의 강력한 기세가 뿜어져 나가며 병사들의 이목이 변이체에게서 나에게로 집중되었다.

“백, 백작님?”

경비 조장이 떨리는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아, 이 맛에 에인프라흐 공작이 지방을 다니면서 반지 빼기 놀이를 하는구나.’

좋은 가르침을 얻었다.

“걱정 마라 병사들이여, 지금부터 이 악마의 종들을 나 빅터 하네스가 처리하겠다.”

변이를 마친 반마들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지만, 기세를 느낀 것인지 감히 덤비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이것들은 반푼이다. 변이체라면 상대가 얼마나 강하더라도 덤벼들어서 물어뜯었을 것이다.

“악마 주제에 목숨이 아깝나?”

어느새 검으로 변한 아스트로퍼가 손에 들려있었다. 나는 반마들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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