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그들은 우리와 다릅니다.
“건방진 변이체 찌꺼기 같은 것들”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게 중얼거리며 검에서 오러를 길게 뽑아내며 앞으로 나섰다.
이미 무대는 준비됐고 별로 적성에는 안 맞지만 손발이 오그라드는 연기도 했다. 이제 마지막 연출만이 남았다.
호기롭게 반마로 변이한 녀석들이 기괴한 외모와 소리로 나를 위협하며 녀석들은 조금씩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오오오!”
길게 뻗어나가는 오러를 보고 뒤에서 병사들이 탄성을 질렀다. 영지의 정규 병사들이니 하셀브링크 영지의 기사들이 쓰는 오러를 보긴 했을 것이다.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을 보았으니 저런 반응이 당연하다. 그리고 자신들이 안전하다는 확신을 얻었을 것이다.
어설픈 반마 세 마리 정도는 이제 나와 싸움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 수준이다. 녀석들이 뒤로 물러나는 것을 멈췄다.
최후의 용기인지 변이체로서 호전성이 살아난 것인지 모르겠지만, 놈들이 앞으로 튀어나올 때 검을 두 번 휘둘렀다.
세 마리가 삼등분되어 바닥을 구르자 또 한 번 병사들의 함성이 이어졌다. 보통의 전투라면 여기서 끝이 난다. 하지만 반푼이라고 해도 상대는 변이체다.
세 토막이 되었다고 해도 놈들은 쉽게 죽지 않는다. 놈들은 기괴한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서 피를 쏟아내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살아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내버려 두진 않는다.
승리의 함성을 지르던 병사들이 그 기괴한 모습에 질려서 다시 조용해졌다.
“대체 저것이 뭡니까. 백작님”
그나마 정신이 있는 경비 조장이 다가와서 물었다.
“악마다. 정확히는 악마의 하수인이지 반마라고 불리는 녀석들이다.”
여태까지 라이브러쉬 왕국과 제멜아크 왕국은 고의적으로 마신교의 존재를 은폐해왔었다. 물론 마신교도 대외적으로 눈에 띄게 활동하지 않았었지만, 이제는 다르다.
마신교가 제국의 유산을 손에 넣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이미 선을 넘었고 제멜아크의 왕세자까지 노렸을 때 이미 그런 암묵적인 동의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라이브러쉬 왕국을 휘청거리게 만들 수도 있는 이런 수작을 부렸으니 이제 무작정 덮어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나를 이곳에 파견한 것에는 그런 뜻도 있을 것이다.
악마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경비 조장을 비롯한 경비병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바뀌었다. 조금 전에 누군가가 악마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이지 저것이 진짜 악마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저, 저희는 괜찮겠지요?”
“괜찮을 것이다. 자네들은 나를 도와 악마와 싸우지 않았는가?”
잔뜩 긴장했던 경비 조장과 경비병들의 표정이 한순간에 풀렸다. 이들은 악마와 연관되어 고초를 겪을 것을 걱정했었던 것이다. 과거의 악몽을 경험한 세대는 모두 사라지고 수백 년이 흘러 이제는 악마보다 사람이 내리는 처벌이 더욱 무서운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들에겐 잘못이 없다. 오히려 경비 조장 정도면 꽤 훌륭하게 대처한 편이다. 나머지 경비병들도 그렇다. 적어도 도망간 사람은 한명도 없었으니까.
“자네들의 공로는 하셀브링크 자작에게 꼭 말해주지”
“가, 감사합니다!”
“자네는 어서 달려가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자작에게 알리게”
“알겠습니다!”
경비 조장이 바람처럼 영주성을 향해 달리는 것을 보고 나는 여전히 바닥에서 피를 콸콸 쏟으며 뒹굴고 있는 놈들에게 다가가 숨을 끊어놓은 뒤 나는 곧바로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다음 목적지였던 설탕 공장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나는 세 마리의 반마를 또 처리했다. 마신교가 과연 중요시설에만 침투해 있었을까?
영지 곳곳에 숨어들어 있는 반마가 아닌 일반 마신교도들은 나로서도 쉽게 찾아낼 방법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중요 시설에 숨어있는 반마 정도는 찾아서 제거해야 한다.
그럼 가장 중요한 시설이 남았다. 바로 영주성이다. 그리고 영주가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영지를 운영하는 것은 영주 본인이 아니다.
물론 적극적이고 유능하면서 사람을 쓰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한 영주라면 직접 하는 일이 많겠지만,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대부분 그렇지 않다. 실제 일을 하는 것은 실무진이다.
설탕 공장에서 마치고 다시 영주성으로 돌아왔을 때 영주성은 그야말로 완전히 뒤집어져 있었다.
완전한 혼란 상태라고 해야 할까. 갑자기 너무 큰 일이 터지자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왕세자는 한쪽에서 그것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하셀브링크 자작 입장에서는 자살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지옥 같은 시간일 것이다.
왕세자를 영접하고 있는데 영지에서 악마가 나타났다? 수백 년 전 용사들의 시대 같았으면 가문 전체가 목이 베여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사건이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것이다.
내가 하늘을 날아 영주성으로 돌아오자 기다리고 있었는지 하셀브링크 자작과 두 아들이 나에게 매달렸다.
“아이고! 하네스 백작! 이,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오!”
“경비 조장에게 이야기를 듣지 못하셨습니까?”
“들었습니다. 그런데 들었어도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하네스 백작께서 악마를 처단하셨다니요.”
“말 그대로입니다. 창고를 견학하러 갔더니 악마들이 인간으로 모습을 숨기고 있더군요. 그래서 제가 처치했습니다. 아직 연락이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설탕 공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악마 세 마리를 처치했습니다.”
“어엌!”
“아버지!”
하셀브링크 자작이 뒷목을 붙잡고 뒤로 넘어가자 아들들이 깜짝 놀라 자작을 부축했다.
“창고에 경비 조장이 참 유능하더군요. 중하게 쓰일 일이 있을 겁니다.”
그 와중에도 약속대로 마음에 들었던 경비 조장을 언급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둘째 아들이 자작을 부축해서 사라지자 소영주인 큰아들이 저 멀리 앉아서 사태를 주시하고 있는 왕세자의 눈치를 보며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저희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내가 나이가 어리기도 하지만, 아까 조금 말 상대를 해줬다고 친밀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현장에 사람은 파견하셨습니까?”
“물론입니다. 가문의 기사들이 모두 달려갔습니다.”
“그것은 잘하셨군요.”
“제발, 저희가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철없는 청년 같았던 소영주는 위기가 닥치자 오히려 자작보다 침착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숨어있는 악마를 잡아야지요. 적극적인 협조를 바랍니다.”
아직 완전히 하셀브링크 자작에 대한 의심을 거둔 것은 아니다. 남부 연합에 가입이 되어있고 설탕을 빼돌리는 것이 확인된 이상 누군가는 깊게 연관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물론입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협조해드리겠습니다.”
소영주의 약속을 받은 뒤 적당히 안심시키고 돌려보내고 나자 왕세자가 나를 불렀다.
“자네 사람 다루는 솜씨가 생각보다 좋군? 그런 보고는 없었는데 말이야.”
내가 대인관계가 좁은 것은 사실이지만, 대놓고 말하면 조금 상처받는다.
“성과가 조금 있으셨습니까?”
왕세자는 자작을 맡아서 그에게 의심스러운 점은 없는지 혹은 영지에 수상한 점은 없는지를 캐내기로 했었다.
“작은 수확이 조금 있었지만, 자네가 그렇게 대놓고 반마들을 찾아버리니 내가 너무 허탈하군.”
“운이 좋았습니다.”
마탑에서 별 생각없이 받아온 물건이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다.
“행운의 신이 있다면 자네만을 보는것 같군. 얼마나 운이 좋아야 자네 나이에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건가? 전생에 나라라도 구한 건가?”
나라를 구한 것은 아니지만,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이기는 했다.
“그래서 하셀브링크 자작은 어땠습니까?”
“내가 사람 보는 눈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네만, 자작은 이 일과 연관이 없는 것 같네.”
“그렇다면 역시”
“아마도 자작이 모르는 사이에 가신 중의 누군가가 일을 꾸민 것이겠지.”
“그래도 연합에 가입하는 것은 자작이 직접 결정한 일 아닙니까?”
“그것도 직접 말을 들어보니 조금 이상하다는 말이야.”
왕세자가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왕실 정보부에 문제가 있는 것 같네.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아.”
“그곳도 마신교의 손이 닿았다고 보시는 겁니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렇네. 등잔 밑이 어두웠던 것이지. 이미 아버지께 연락을 드렸다네”
왕실에도 한차례 피바람이 몰아칠 것 같다.
“그래서 뭔가 이상한 점을 찾으신 겁니까?”
“자네도 서류에서 봤겠지만, 남부 연합의 대표는 요엘 고트 백작이네”
“그렇지요.”
“그런데 하셀브링크 자작은 정작 요엘 고트 백작을 만난 적도 없더군.”
“직접 만나지 않더라도 연합에 가입은 할 수 있는것 아닙니까?”
물론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리고 나라를 뒤흔들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이권이 걸린 일이다.
“그런 생각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네. 대신 고트 백작의 가신이 이곳에 자주 방문했다고 하더군.”
“그럼 남부 연합이라는 것이 실제론 없는 겁니까?”
“아니 그건 있네. 하셀브링크 자작도 자신이 남부 연합의 소속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로군. 나도 처음에 설명을 들을 때는 그랬다네”
“그렇습니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남부 연합은 존재하네 그런데 그들이 이권단체가 아니라는 말이야.”
“하얀 가루들을 통제하기 위한 연합이 아니라는 뜻이군요.”
“맞네. 친목에 가까운 백성들을 생각하는 귀족들의 모임일세.”
여기서 정보부가 잘못된 정보를 전달한 것이 되는 건가? 그렇다면 정보부에 침투한 마신교의 첩자는 왜 그런 잘못된 정보를 흘렸을까?
“누가 될진 모르겠으나 이 사태를 해결하러 파견되는 이를 노린 것이군요.”
“나도 거기까진 생각했는데 누가 파견될 줄 알고 이런 커다란 함정을 만들었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네.”
나와 왕세자가 파견될 것을 예상했다? 그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몰라도 적어도 보통 때라면 왕세자가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행차할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결국 나를 노린 것이 되는 건가?
“그렇군요. 왕세자 전하를 노린 계획 같지는 않고 저를 노렸다고 하기에는 그들의 전력을 집중하는 것이 너무 어려울 겁니다.”
물론 기동성이 좋은 막강한 전력인 부교주가 있지만, 교주가 없는 지금 그들이 그렇게까지 무리를 할 이유가 있을까? 설령 부교주가 직접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지금이라면 최소한 지지는 않을 것 같다.
부교주가 직접 나서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남부 연합의 어디에 나타날 줄 알고 반마들을 모아놓을 것인가?
사제가 없는 지금도 반마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숨겨놓은 전력이 그렇게 많을 것 같지 않았다. 이미 제멜아크의 던전에서 수백의 반마를 잃지 않았던가.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싶네. 광인들의 생각을 보통 사람인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왕세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에도 비슷한 말이 있지 않았던가?
“일단 하셀브링크 영지부터 정리를 하기 시작해보지요. 치다 보면 몸통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반마들을 확인해서 척살했다는데 그것은 또 뭔가?”
마탑에서 가져온 악마용 물약에 대해서 왕세자에게 설명을 해주자. 왕세자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농담을 할 여유가 있는 것을 보니 대단하군. 간만에 크게 웃었네”
“진짠데요?”
“응?”
“농담 아닙니다. 진짜 그런 물약이 있습니다.”
왕실에서 좋은 것만 보고 들으면서 자란 왕세자로서는 악마의 중요한 곳을 부풀게 하는 물약이 농담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 걸 왜 만들었지?”
“마법사들의 생각을 제가 알겠습니까?”
물론 나도 마법사지만,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마신교의 작전처럼 미친 마법사들의 생각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보통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