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아울베어
부교주를 만나게 된 것은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다. 나는 부교주에게 덤벼들지 못했고 부교주 역시 예전에 선언했던 대로 나를 죽이지 못했다.
나는 솔직히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지만, 부교주는 왜 나와 싸우는 것을 피했을까.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부교주의 변이 후 모습이 대형종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도 이득이라면 이득이었다. 여태까지 대형종으로 변이하는 반마를 본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교주도 대형종일까? 대형종은 그 덩치만으로도 상대하기가 무척 어렵다. 거기에 대형종은 대부분 강하다. 내가 전생에 들었던 정보에 의하면 문경이나 태백 같은 소도시 말고 서울이나 부산, 대구 같은 대도시를 차지한 변이체는 전부 대형종이라고 했었다.
물론 내가 전에 상대했던 아귀처럼 다소 약한 녀석도 있겠지만 그것은 녀석이 특성을 이상한 방향으로 발전시켜서 그랬을 뿐이다.
부교주에 의해 죽어버린 장로의 소지품을 찾아봤으나 이런 날을 대비하고 있었던 것인지 중요한 소지품이라고 할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건 몇개쯤은 있기 마련이라 그런 것들을 챙기고 위로 다시 올라가며 내가 처치했던 녀석들의 소지품 중에서도 좋은 기억이 나올법한 것들을 챙겼다. 그리고 포장을 잘 해둔 여성 반마를 들고 하셀브링크 영지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시간은 올 때보다 훨씬 빨랐다. 내 속도를 전부 낼 수 있었으니까. 다만 끈으로 묶어서 들고온 여성 반마가 거의 죽어가고 있었지만, 좀 먹이고 쉬게 해준다면 변이체의 특성상 그렇게 쉽게 죽진 않을 것이다.
하셀브링크 영지에는 비상사태가 선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숨어있는 마신교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전하께선 돌아가시죠.”
“그래야 하나?”
“네, 전하께선 왕도에서 움직여주시는게 더 도움이 됩니다. 안전하기도 할테고요.”
내가 잡아온 여성 반마를 마탑에 배달 해주기도 해야하고 왕실에 숨어있는 마신교를 발본색원해야 하기도 한다.
“자네는?”
“저는 혼자 움직이는 것이 편합니다. 보셨지 않습니까?”
“날아다닐 수 있는 것은 정말 부럽더군.”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반마 발견용 물약을 왕세자에게 건넸다.
“이곳에서도 필요할텐데?”
“저보다는 왕도에서 더 필요할것 같습니다.”
몇가지 논의 끝에 왕세자는 하셀브링크 영지를 떠났다. 혼자 남은 나를 건강을 조금 회복한 하셀브링크 자작이 찾아왔다.
“하네스 백작께서는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며칠만 더 신세를 지겠습니다.”
“며칠이라니요. 평생 계셔도 괜찮습니다.”
나를 무슨 데릴 사위로 삼을 생각인가? 그러고보니 영애는 그후로 얼굴도 보지 못했다.
“호의에 감사합니다. 다만 밀린 업무만 보고 며칠 후에 떠날 생각입니다.”
“아쉽군요. 최대한 오래 계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그것은 욕심이겠지요?”
직접 두 눈으로 반마를 확인한 자작이기에 그런 반마를 무 썰듯이 썰어버릴 수 있는 내가 함께있으면 든든할 터였다.
“머무는 동안 아드님들과 기사들의 검을 좀 봐드리도록 하지요.”
“이런 영광이! 참으로 좋아할 겁니다.”
이런 영업 기술은 아주 최근에 익힌 것이다. 하네스 파벌의 귀족들에게 이렇게 몇번 해주니 아주 껌벅 죽더라고.
며칠 가르친다고 그들의 검술이 극적으로 달라지거나 하진 않는다. 하지만 9성 기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명예는 이런 지방에선 평생 자랑할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셀브링크 영지의 기사들과 아들 둘을 며칠 봐주면서 나는 주워온 물건들에서 계속 기억을 읽었다. 뭔가 하나는 걸릴줄 알았는데 계속 꽝이어서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드디어 밤에 지구로 들어가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왕세자를 떠나보내고 첫날 밤에 나는 곧바로 지구로 들어왔다.
폐허, 원래도 폐허였지만, 오랜 시간동안 말도 안되는 위력의 폭풍이 몰아쳤던 지구는 인간이 살았던 흔적을 완전히 지우려고 했던 것처럼 망가져 있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모습과 너무 차이가 많았다. 아예 지형이 바뀌어있다고 해야할까.
예상했었지만, 이 정도면 그동안 살아남았던 중소형 변이체들도 버티지 못했을 것 같았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그나마 남아있는 오래된 나무들도 폭풍을 버티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멸망한 세계 속에서도 초록색 싹을 튀워 아직 생명이 남아있음을 보여주고 있던 나무들이 모두 쓰러져있었다.
“진짜 지구의 멸망인가?”
쓰러진 아름들이 나무들을 보며 가슴이 무척 쓰라렸다. 그래도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줬던 파장을 조절하는 아티팩트라면 다시 싹을 틔울 수 있다고 하니 스테이시를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폭풍의 범위가 얼마나 넓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는 하늘로 솟아올랐다. 좁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폭풍의 범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광범위했다.
땅을 완전히 갈아엎은 것만 같은 풍경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변이체도 보이지 않았다. 변이체라면 어딘가 땅을 파고 숨어들어가서 버텼을지도 모르지만, 악마 나침반에도 잡히지 않는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도 낮았다.
주변을 최대한 넓게 돌며 수색하다가 내가 내려앉은 곳은 세종시로 추정되는 곳의 인근이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인류의 흔적과 이정표 같은 것들이 모두 사라지며 지도가 있어도 정확히 이곳이 어디인지 특정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아스트로퍼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인위적인 흔적을 발견했다. 폭풍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전투의 흔적이었다. 그것도 거대한 전투의 흔적이다. 바람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날아가는 도중에 커다란 발자국이 보였다. 사람의 발자국과 같지만 그 크기가 2m가 넘어간다면 사람의 것이라고 볼 순 없을 것이다.
인간형의 대형종이다. 세종시를 차지했던 변이체였을까? 세종시는 전생에 가본적이 없었다. 물론 그쪽에서 도망쳐온 생존자를 만난 적은 없지만, 그때 들었던 정보가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대형종과 무언가가 전투를 벌인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대형종이 패배했다면 그 커다란 덩치가 어딘가에 쓰러져있을 것인데 일단 이 근방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형종과 싸운 누군가가 졌다는 이야기다. 용의 대상은 많았다. 다른 변이체와 영역다툼을 했을 수도 있다. 혹은 부교주를 생각해볼 수 있었다.
부교주는 둘 다에 해당된다. 부교주가 변이체와 싸우는 것을 기억으로 본 적이 있고 대형종으로 변이한 것도 이번에 보았다.
지금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는 일단 광검제가 생각난다. 하지만 광검제는 일찌감치 용의선상에서 지워버렸다.
광검제가 싸웠다면 이런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대형종의 시체만 덩그라니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기억 속에서 보았던 제3의 누군가다. 아마도 이것이 가장 확률이 높을 것이다.
전투 흔적을 찾아 사방을 돌았지만, 더 이상 눈에 띄는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시체도 보이지 않았다.
전투의 흔적에서 몇 가지 물건을 주워 챙겼다. 오늘은 이미 남부 연합의 뒤를 캐느라 기억을 읽을 수 있는 횟수를 모두 소진했고 시간이 좀 지나야 기억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서쪽으로 날았다. 그제야 문명이었던 것의 흔적이 조금 보이기 시작했다. 그 지독한 폭풍을 겪고도 아직 문명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이곳은 아마도 상당한 대도시였을 것이다.
“여기가 세종시인가?”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충청권에서 가장 대도시라고 하면 세종과 대전일텐데 여기가 대전은 아닐테니까.
그리고 다른 것도 보였다. 거의 사라진 문명의 흔적 가운데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윤기있는 검은털이 온 몸을 뒤덮고 있는 동물이라고 할까.
잔뜩 웅크리고 있어 아직 머리가 보이지 않지만, 마치 곰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때 갑자기 옛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세종시의 변이체는 애들이 아울베어라고 하더군.’
아울베어는 게임 안에서 많이 사냥했던 몬스터다. 올빼미 머리에 곰의 몸을 가진 그런 상상 속의 동물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크진 않다. 웅크리고 있지만, 얼핏봐도 크기가 수십미터는 되어보인다. 몸을 펴고 일어서면 훨씬 거대할 것이다.
내가 만났던 게임 속의 아울베어는 잡몹이지 결코 저런 보스몬스터가 아니었다.
하늘에서 천천히 지상으로 하강하자 위험감지가 경고를 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지상과 가까워질 수록 경고의 세기가 더 강해지고 있었다.
“하!”
저 아울베어라는 놈은 지금이니 이 정도지 과거였으면 감히 대적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괴물인 것이다.
스승님이라고 해도 저 괴물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저 상태가 인간이 멸망한 후 수십년이 지나 약화된 상태라는 것이다.
전성기때는 대체 얼마나 강했다는 말인가? 초월급 기사나 되어야 겨우 상대가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을까?
충청권에서 대도시라고 해도 전국권으로 보면 세종시가 그렇게 큰 도시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인천, 부산 같은 100만명이 넘게 사는 도시나 서울에는 대체 어떤 괴물이 남아있다는 말인가?
마침내 발에 땅이 닿는 순간 전신이 짜릿할 정도로 위험감지가 나에게 경고를 알렸다.
그 순간 저 멀리에서 웅크렸던 아울베어가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울베어와 나의 거리는 1km 정도 그 정도 거리에 있는데도 고개를 드는 녀석의 커다란 눈은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울베어라고 이름 붙인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된 작명은 아닌듯 하다. 올빼미의 얼굴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든 녀석의 머리는 올빼미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
오히려 독수리와 닮았다고 해야할까? 아울베어는 독수리의 머리에 곰의 몸을 하고 있는 변이체였다. 이것은 나도 처음 보는 종류다.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녀석의 몸에서 우둑우둑거리는 뼈소리가 내가 있는 곳까지 들리고 있었다.
두발로 완전히 몸을 일으킨 녀석은 키가 30m는 되어보였다. 마치 기지개를 켜듯 하늘 높이 팔을 들어올린 녀석은 잠시 그 자세로 있다가 포탄처럼 앞으로 튀어나왔다.
‘이게 대형종?’
땅을 박차며 네발로 달려오는 녀석은 대형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민첩했다. 30미터짜리 곰이 치타처럼 달린다고 해야할까.
무척 빠르지만 그렇다고 나에게 큰 위협이 될 속도는 아니다. 물론 슬라이트나 자칼 같은 6성 기사만 하더라도 이 정도 속도라면 벗어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굳이 저런 상대와 정면 승부를 해줄 필요는 없었다. 처음부터 내가 땅에 내려설 때 위험감지가 울렸지 하늘을 날고 있을 땐 위험감지가 경고를 보내지 않았었다.
내가 다시 몸을 하늘로 띄우려고 할 때 녀석이 입을 크게 벌리며 괴성을 질렀다.
끼애애애액!
독수리 머리 아니랄까봐 조류나 낸 법한 찢어지는 고음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괴성에 겁을 먹을만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위험감지가 아까보다 훨씬 강하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그 경고를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이것은 뭔가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궁금증은 바로 풀렸다.
“헛?”
괴성의 음파가 몸에 닿았다고 해야할까. 그런 느낌이 드는 순간, 비행 능력이 풀렸다. 몇미터 정도 상승했던 나는 땅에 착지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힘을 빼는 실수 같은 것은 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한가지다. 아울베어의 괴성에 그런 힘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건 또 신기한 능력을 쓰는구만.”
비행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싸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슈바르거트를 꺼내들고 싸울 준비를 했다.
원래 1km의 거리가 있었지만, 전력으로 달리는 아울베어의 속도 앞에서는 긴 시간을 벌어줄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겨우 몇십미터 앞으로 다가온 아울베어를 상대하기 위해 나는 자세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