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76화 (176/206)

175. 감각의 영역

변이체의 대형종을 상대하기 까다로운 이유는 무시무시한 질량의 위력도 있지만, 크기였다. 인간이 들고 있는 검이라는 작은 꼬챙이로는 대형종에게 큰 상처를 입히기 어렵기 때문이다.

심장과 머리가 터지고 잘려도 죽지 않은 변이체에게 손가락 한두 개 정도 날아가는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생존자들이 대형종 변이체와 싸울 때 가장 중요시했던 것이 바로 순간적인 큰 화력이었다. 검이나 창 같은 무기로는 절대로 대형종을 죽일 수 없다.

미국의 어떤 변이체는 핵을 맞고도 살아났다고 하지만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기에 믿을 수 없지만, 전성기의 변이체라면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전성기의 변이체는 그랬다.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검을 들었지만, 엄청난 화력의 폭발물이나 광역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이능력 못지않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오러를 10m 정도 뽑아내어 휘두르면 충분히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9성의 경지에 오른 후로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를 해본 적이 없다.

만났던 변이체들이 상대적으로 너무 약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위험 감지가 그렇게 알려주고 있으니까.

고장 난 고속열차처럼 맹렬히 달려들고 있는 아울베어를 향해 길게 오러가 솟아 있는 검을 휘둘렀다.

“어?”

나는 입으로 소리를 낼만큼 놀랐다. 검이 빗나갔다. 아울베어는 마치 고양이처럼 민첩하게 뛰어올라 검을 피해냈다.

30m짜리 곰이 화난 멧돼지처럼 달려오다가 고양이처럼 뛰어올랐다. 그럴 수는 있다. 변이체라는 것은 언제나 내 상상을 뛰어넘는 존재였으니까.

검을 피해 나를 훌쩍 뛰어넘은 아울베어가 착지하자마자 민첩하게 방향을 틀어 앞발을 휘둘러왔다.

나 역시 그 앞발을 잘라낼 생각으로 검을 다시 휘둘렀다.

쾅!

그런데 이번에도 빗나갔다. 빗나간 오러가 땅을 후려치며 사방으로 파편을 뿌렸다. 아울베어는 1m는 넘을 것 같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나를 찢어 죽일 것처럼 휘둘렀던 앞발을 마지막 순간에 거둬들였다.

역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대도시의 변이체라고 해야 할까. 대단한 전투 감각이었다. 아니 이걸 전투 감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성장을 다른 방향으로 발전시킨 녀석일까?

“신기한 놈이구나.”

크르르르르!

아울베어가 낮은 울음을 터트렸다. 워낙 덩치가 있고 가깝다 보니 나에게는 굉장히 크게 들렸다. 그리고 소리가 들리는 순간 무언가가 상실되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내 능력 중에 뭔가 하나가 지금 사라졌다.

비행 능력이 사라진 것도 이 울음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울베어의 능력은 상대방의 능력 중 하나를 울음소리로 사라지게 만들거나 혹은 사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능력인 것 같았다.

이것은 위험하다. 다른 것은 상관없지만, 통로를 여는 능력이 영원히 사라진다고 하면?

나는 바로 통로를 열고 하셀브링크 영지에서 제공한 내 방으로 돌아왔다. 통로 저편으로 갑자기 사라진 나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아울베어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통로를 닫았다.

확실히 감지 능력이 경고한 만큼 위험한 녀석이었다. 내가 가진 능력을 하나씩 확인해보다가 무엇이 사라져서 상실감을 느꼈는지 알아냈다.

사이코 메트리가 사용되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럴 때 비행 능력과 함께 가장 쓸모있는 능력 둘이 사라졌다. 어쩌면 일시적으로 봉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나는 평범하게 하셀브링크 영지에서 기사들과 영식들의 검을 봐주며 하루를 보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속으로는 꽤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었을 때 두 가지 능력이 모두 돌아온 것을 확인했다.

“다행이네”

정말 다행이었다. 능력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아니고 24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능력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능력인 모양이었다.

연속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듯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용할 수 있는 텀이 아주 짧았다. 이것을 어떻게 막아내야 할지 고민했다. 단순히 귀를 막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가진 능력 중에 의외로 전투에 실제 사용하는 능력은 많지 않다. 재생력이나 위기 감지가 포함된 초감각 능력은 매우 유용한 능력이지만, 나머지는 사라져도 전투에 영향을 끼치진 않는다.

그렇다면 다음에 아울베어를 상대할 때는 지난번처럼 중간에 돌아오지 않고 한 번에 끝을 보면 된다. 통로 능력이 잠시 봉인된다 하더라도 하루만 지구에서 시간을 보내면 되니까.

통로를 열자 바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는 아울베어가 보였다. 그러나 지난번과 달리 머리를 숨기고 있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불쌍한 놈들이다. 인류가 멸망하고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저렇게 인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약한 변이체들이 그랬던 것처럼 저런 강대한 변이체들도 언젠가는 하나씩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면 지구에는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여기서 작은 의문이 생겼다. 그렇게 세계를 파괴하는 게 마왕 피체둘라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누군가의 예상처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아있는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말이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손을 쓴다면 기간이 훨씬 단축되었을 텐데 그러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창조물이라고 할 수 있는 변이체까지 포함시켜서 서서히 말려 죽이는 것이다.

나 역시 지구상의 변이체를 모두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마왕을 돕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할수록 복잡해지는 느낌이 들어 머리를 털어 잡념을 지웠다.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의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것들은 모두 아노더스에 있다.

지구의 변이체들을 죽이고 힘을 흡수한다. 그리고 그 힘으로 아노더스를 지킨다.

통로를 빠져나가자마자 빠르게 웅크리고 있는 아울베어에게 오러를 날렸다. 그런데 아울베어는 그것을 예측이라고 했던 것처럼 몸을 뒹굴면서 피했다.

그러나 30m짜리 곰탱이가 몸을 뒹굴어 피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내가 느리지도 않다.

챠아아악!

채찍으로 때리는듯한 소리와 함께 길게 뽑힌 오러가 아울베어의 몸에 처음으로 긴 상처를 입혔다.

키에에엑!

놈이 고통스러운 소리를 질렀다. 그와 함께 내 안에서 무언가가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초감각이 살아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아니다. 그럼 됐다.

상처를 입었지만, 놈이 몸을 빠르게 뒤로 빼내며 두 번째 검격을 피해냈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지 않다. 비록 오러를 사용해 베어낸 것이지만 손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질긴 가죽도 가죽이지만 빼곡하게 몸에서 자라난 송곳처럼 뻣뻣한 털들이 방어 역할을 한 것 같았다. 참 까다로운 녀석이다.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생존자들을 모았다면 전성기의 이 녀석을 이길 수 있었을까? 내가 알고 있는 강한 생존자들을 모두 떠올려보았다. 김경식을 포함한 많은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아울베어의 전성기를 생각하면 그 사람들이 모두 모인다고 해도 저 괴물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세종시만 해도 이런 괴물이 있는데 대도시에는 얼마나 엄청난 괴물이 있는 것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한 칼 먹였으니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나는 빠르게 달라붙어 공격을 퍼부었다. 아울베어는 마치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거대한 몸으로 공격을 피해냈다.

그래도 내가 적극적으로 공격에 들어가자 완전히 피해내지 못하는 것이 늘어났다. 아울베어의 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싸우는 방식을 바꾸기로 했는지 반격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크헝!

포효와 함께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면서 녀석이 거대한 몸집으로 밀고 들어왔다.

노련미가 느껴지는 공격이었다. 아울베어가 여태까지 상대했던 생존자나 다른 변이체라고 한다면 이런 공격에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포효로 이능력을 막아놓고 공격한다. 사실상 반칙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는 여태까지 놈이 상대했던 상대와는 다르다.

또 무언가가 능력이 또 하나 봉인되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나는 여태까지 아울베어가 상대했던 적들처럼 능력 하나 봉인됐다고 전투력이 급감하지 않는다.

땅을 박차며 녀석이 마음먹고 휘두른 앞발 공격을 피해냈다.

콰앙!

전봇대 두어개는 합쳐놓은 듯한 굵기와 질량의 앞발 공격이 땅에 박히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땅에 박힌 녀석의 발 하나를 잘라내려고 검을 휘두르려고 했다. 그러자 귀신같이 눈치채고 녀석이 앞발을 재빨리 오므렸다.

역시 아울베어가 회피하는 동작은 거의 예지에 가까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도 그와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아울베어는 여러 개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능력 중 하나는 바로 초감각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강화된 초감각이다. 그랬다면 여태까지 공격을 피해냈던 것이 설명된다.

밑천이 드러나고 아울베어는 일방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기본 능력이 이쪽이 훨씬 위다.

내가 공격에 허초를 섞기 시작하자 아울베어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보통 변이체의 상대라면 허초는 아무 의미 없겠지만, 아울베어는 반대였다.

그러다 뒤를 잡혀서 내가 등에 올라타서 슈바르거트를 박아넣자 녀석은 미친듯이 발버둥쳤지만, 내가 다시 슈바르거트를 뽑아내기 전에 상당한 양의 생명력을 빼앗겨야만 했다.

그래도 쉽진 않았다. 아울베어와 나는 꽤 오랜 시간을 싸웠다. 끝까지 방심하진 않았다. 내가 아무리 9성 기사라고 해도 엄청난 힘과 질량으로 후려치는 공격을 한 번이라도 허용한다면 어떻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치명상을 입히진 못했으나 아울베어의 몸에는 계속 상처가 늘어갔고 슈바르거트는 틈만 나면 흡혈귀처럼 생명력을 빨아들였다.

쿠웅!

오랜 전투 끝에 마침내 아울베어가 그 거대한 몸체를 땅에 뉘었다. 경지가 오른 후에 가장 격렬한 전투라고 해야 할까.

특별히 위험한 순간까지는 없었지만, 몇 차례 아슬아슬했던 장면은 있었다. 역시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쓰러져 있는 어지간한 빌딩 크기의 아울베어를 보니 내가 성장했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대형종을 혼자서 처치하다니 전생에는 그야말로 꿈만 꾸었던 일이다. 다른 지구의 나인 광검제처럼 나에게 미리 그런 힘이 주어졌다면 나는 인류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까?

내가 살아왔던 그 모든 장면을 떠올리며 그때마다 내가 조금씩 성장하는 그림을 그려보았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 의미 없는 가정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번 생에서는 힘없이 마왕과 변이체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진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적어도 죽을 때까지 싸워볼 수는 있을것 같았다.

쓰러진 거대한 털북숭이에게 손을 대자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굉장히 뭔가 큰 것이 빨려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 포효로 이능력을 봉인시키는 능력이 전승되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과는 생각 이상이었다.

‘한 번에 두 개?’

여태까지 상대가 여러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여러 개의 능력을 흡수한 경우는 없었는데 이번에는 두 개의 능력이 생겼다.

내가 원했던 대로 능력을 봉인시키는 포효를 얻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이었다.

“윽!”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 들면서 잠시 비틀거렸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소주를 4~5병쯤 원샷을 때린 느낌이라고 할까.

반강제로 수십년간 술을 끊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취한 느낌을 받았다. 어지러워서 서있지 못하고 잠시 아울베어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두 개로 나뉘었던 세상이 점점 하나로 합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포효와 함께 초감각을 흡수하면서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초감각이 두배 이상 강화되었다.

감각이 순간적으로 증폭되다 보니 몸이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증폭되었던 감각에 적응하면서 현기증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넓은 범위가 감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초감각이라고 해야 할까. 멀리 떨어져 있는 물의 온도와 바위의 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울베어의 포효로 통로 능력이 봉인된 것은 아니지만 이 감각에 적응이 끝날 때까지 쉽게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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