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77화 (177/206)

176. 순회감찰사

긴 시간을 싸우면서도 봉인된 능력은 많았지만, 통로를 여는 능력은 그것을 피해 갔다. 하지만 쉽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결국 하루가 꼬박 지나서야 감각에 적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돌아왔다. 꼬박 하루 동안 내가 갑자기 사라지자 자작가에는 큰 소란이 있었지만, 어딜 잠시 다녀왔다고 대충 둘러대고 벗어날 수 있었다.

돌아온 후에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지구에서는 살아있는 생물이 없어서 느끼지 못했지만, 강화된 초감각은 여태까지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느끼게 해주었다.

굳이 말하자면 육감의 영역이라고 해야 할까. 강화되기 전에도 오감의 영역을 벗어난 부분이 있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오감을 벗어난 진짜 초감각의 세계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점점 인간을 벗어나는 느낌이야.’

나는 스스로를 경계했다. 7성 이상이 되면 인간을 한계를 넘어선 초인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따져본다면 4성 이상의 기사도 인간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그런데 나는 경지로도 이미 9성의 경지인데다 초감각의 영역에 들어서자 진짜로 인간을 벗어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아주 좋은 목표와 교본이 있었다. 지금도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의 내가 발끝에도 닿을 수 없는 경지에 닿았던 광검제도 마지막까지 인간성을 버리진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세계의 나였던 광검제가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셀브링크 자작의 양해를 얻어 다시 한번 영주성을 모든 사람을 모이게 했다. 이미 큰 사건을 몇번이나 겪은 영주성의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불안해하며 궁금해했지만, 이유가 있었다.

영지의 중요 직책을 담당하고 있던 핵심 인물 셋이 동시에 사라진 터라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했지만, 소영주와 둘째 아들이 나서서 활약하며 중심을 잘 잡아주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나서서 큰 소리로 설명했다.

“오늘 모두 모이라고 한 이유는!”

얻은 능력은 써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확인 작업에 불과했다.

내가 방금 큰소리로 외친 음성에는 아울베어에게서 얻은 능력이 사용됐다.

“아직도 위장을 한 채 숨어있는 악마의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녀장의 외모가 바뀌어있었다. 신체 변형으로 위장한 채 숨어있었으나 능력이 봉인되면서 원래 얼굴로 돌아온 것이었다.

지난번 암살과 탈출 소동 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끝까지 숨어있던 반마였다. 어쩌면 운 좋게 넘어갈 수도 있었으나 내가 새로운 능력을 얻는 바람에 운이 좋지 않았다.

“하녀장님 얼굴이!”

하녀장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사방으로 흩어지고 하녀장은 악독한 표정을 지으며 무언가를 하려 했지만, 나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 느끼기에는 뭔가 번쩍하는 섬광이 보였을 때 이미 하녀장은 산산이 분해가 되어 있었다.

“허어!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구려.”

“켈리가···. 어찌 저럴 수가 있나요.”

처음도 아니지만, 하셀브링크 자작 내외가 또다시 커다란 배신감에 충격을 받아 방으로 들어갔다.

“백작님은 하셀브링크의 은인이십니다.”

나름 며칠 검도 가르쳐주며 제법 친해진 소영주와 둘째 공자가 나에게 몇번이나 감사를 전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능력을 봉인하여 숨어있던 반마를 잡아냈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었다. 이건 단지 확인 작업에 불과했으니까.

중요한 것은 이제 초감각으로 반마를 구별해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에는 막연하게 나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반마라고 짐작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반마의 기운을 확실하게 구별해낼 수 있었다.

이제 마탑에서 새로운 물약을 개발해 보내는 것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남부 연합 사건을 빨리 해결하기 위해 빨리 떠나려고 했지만, 소영주와 자작이 적극적으로 붙잡은 것도 있었고 영지에 숨어든 또 다른 반마를 찾을 겸 아울베어와 전투를 하며 소모한 체력도 회복할 겸 해서 결국 하셀브링크 영지에 하루를 더 머물게 되었다.

하루 동안 영주성 뿐만이 아니라 도시와 주변의 마을을 탐색하며 다른 반마가 숨어있는 것을 찾았지만 수확이 없었다. 전에 만났던 장로처럼 반마가 되지 않은 마신교 신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영지 내에서 알아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다.

하루를 쉬고 왕도에 앞으로 계획에 대해 마법 통신을 통해 알려준 뒤 나는 하셀브링크 영지를 떠났다.

떠나기 전의 마지막 인사 때 두문불출하고 있던 영애가 나타나 나에게 직접 자수를 넣은 손수건을 선물하는 작은 사건이 있었지만 미안하게도 영애의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었다. 왕도의 집에 그런 손수건이 수십 개나 쌓여있었으니까.

가까운 곳부터 시작해서 내가 방문하는 남부 연합에 속한 영지들에 큰 소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암중으로만 활동했던 마신교라는 단체가 대외적으로 크게 달려진 것이다. 악마라면 치를 떠는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이것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영지마다 적게는 몇 사람 많게는 수십의 반마가 발각되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쩌다 운 좋게 힘을 얻어 출세한 어린놈이 사람을 마구 죽이고 다닌다는 나쁜 소문도 돌았다.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쓰진 않았다. 처음부터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었다. 사건을 멀리서 바라보는 일반 백성들의 시선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그래선 안 됐다.

문제는 그런 소문을 믿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지방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하셀브링크 자작처럼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는 귀족도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 방문한 유시 베어맥 자작이 그런 경우였다.

“업무를 보고 계십니다. 죄송하지만, 잠시 더 기다려주십시오.”

자작을 접견 요청을 다시 했더니 내려온 답이었다.

날아왔기 때문에 영주성에 들어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병사와 기사들이 하늘로 날아오는 사람까지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신분을 확인시켜줬고 영주성 안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런데 방의 상태가 허름한 것이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이 아니었다.

여기까지도 이해했다. 내가 아무리 자작보다 위인 백작이고 순회감찰사라는 막강한 지위를 가지고 있어도 갑자기 방문한 불청객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딱히 대접을 받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3시간이 넘었을 때 하인을 불러 자작에게 한 번 더 접견 요청을 했다. 그런데 들려온 대답이 저것이었다.

다른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내가 다시 접견 요청을 했을 때 내 요청받은 하인이 영주의 집무실에 가지 않았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미 영주성의 전체가 내 감각 안에 놓여있었으니까. 하인이 미친 것이 아니라면 이미 무슨 언질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베어맥 자작이 미쳤다고 봐야한다. 딱히 내가 권력을 휘두르며 갑질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신교과 관계된 일이 아닌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 무슨 불편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베어맥 자작을 만나야겠다.”

“업무 중이라 바쁘시다고···.”

“업무 보고 있지 않은것 알고 있다. 비켜라”

확실히 내 감각으로는 베어맥 자작은 딱히 업무를 보고 있지 않았다. 하인은 감히 내 앞을 막지 못했다.

처음 온 곳이지만, 이곳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처럼 성큼성큼 걸어서 나는 영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앞에는 기사가 지키고 있었다. 영주가 위험한 상태도 아니고 평소에 집무실 밖의 경비를 기사에게 시키는 영주는 많지 않다.

“자작에게 하네스 백작이 왔다고 알려라.”

기사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비틀렸다. 영주가 미친놈이니 그 밑의 기사도 미친 것이 분명하다. 내가 아무리 경지를 숨기는 반지를 끼고 있다고 하나 9성 기사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소식이 늦은 지방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주변 영지에서 반마들을 처치하며 난리를 치고 다녔으니까.

“영주님은 바쁘십니다. 나중에 다시 오시지요.”

“나는 국왕 폐하께서 임명한 순회감찰사다. 비켜라.”

“다시 오시지요.”

기사는 건방진 말투로 내 말을 무시했다.

“순회감찰사의 명령을 거부한 자는 반역으로 처벌한다. 마지막 경고다. 비켜라.”

기사의 안색이 조금 변했지만, 고집이 있는 것인지 끝내 비켜서지 않았다. 이 정도쯤 되면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다.

“아스트로퍼”

아스트로퍼가 검으로 변해 손안으로 들어왔고 기사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목이 잘렸다.

그리고 앞을 막고 있던 집무실의 문도 반으로 갈라져 바닥을 뒹굴었다.

당황한 베어맥 자작의 얼굴이 그 너머로 보였다.

“아무리 중앙귀족이라고 해도 무, 무슨 행패인가!”

밖에서 말한 것을 안에서 다 듣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베어맥 자작, 반역을 꿈꾸는가?”

“그게 무, 무슨?”

“그런데 어째서 순회감찰사인 나에게 협조하지 않는가?”

“갑자기 찾아와서 이게 무슨 행패요!”

중앙에서 내려온 이름 높은 귀족에게 가볍게 갑질이라도 한번 하며 우월감을 느끼고 싶었나 본데 상대를 잘못 골랐다.

“나는 국왕폐하의 명을 받아 마왕의 하수인들을 토벌하고 있다. 그런데 너는 나에게 협조하지 않았지. 마왕의 하수인이 도주할 시간을 벌고 있었는가?”

사실 이것은 거의 무적의 치트키나 다름없다. 하지만 여태까지 한번도 사용해 본 적은 없다. 마왕의 마만 보여도 무조건 목을 날리던 용사들의 시절도 아니고 굳이 갑질을 하고 싶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이 정신머리 없는 놈은 한번 확실하게 교육을 시켜야만 할 것 같다.

“저, 절대 아니오!”

“그럼 왜 그랬지?”

“바쁜 업무 중이었소!”

“무슨 업무를 하고 있었지?”

“영지의 기밀이오!”

“똑바로 해명하지 않으면 반역죄로 즉결 처형이 가능하다. 순회감찰사의 권한으로는 가능하다.”

법에 박식한 학자라면 모를까. 지방 귀족이 그런 것까지 알고 있을 리는 없다. 제국시절 잠깐 존재했던 관직이고 그 법 조항이 그대로 내려오고 있을 뿐 그 후에 누구도 순회감찰사에 임명된 적이 없다.

대신에 원래 순회감찰사가 가지고 있던 권한이 전혀 수정되지 않은 채 그대로이다. 순회감찰사의 권한은 막강하다.

애초에 모티브도 그렇고 멸망한 성국에나 존재했던 관직인 이단심문관에 가깝다. 스스로 판단해서 죄가 있다고 생각되면 도시 하나를 전부 이단으로 규정해서 대학살을 벌이던 미친 광신도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용사시절의 순회감찰사도 비슷한 짓을 하고는 했다. 정말로 그때는 마왕의 편에 붙은 변절자들이 많았으니까.

똑바로 해명하라는 압박에 베어맥 자작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업무 같은 것은 보지도 않았으니까.

“게, 게 아무도 없느냐!”

베어맥 자작은 결국 가장 좋지 않은 선택을 했다. 자작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이미 많은 사람이 이 소란을 눈치채고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빅터 하네스 백작이다.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나?”

“무, 물론이오.”

“영지의 기사 몇 명 부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 테니?”

“그렇다고 나를 해칠 수는 없을 것이오! 국법이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이 바보는 지금까지 뭘 들은 거지? 같은 사람이라고 모두 말이 통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 그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그 국법으로 너를 처벌하겠다.”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자 베어맥 자작은 경기를 일으키며 죽을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악!”

엄살이 심하기도 하다. 엄살에는 아주 특효인 처방이 있다.

서걱!

더 이상 엄살을 부릴 수 없는 몸으로 만들면 된다.

뒤늦게 도착한 기사와 병사들이 목이 잘려 죽어있는 기사와 베어맥 자작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순회감찰사인 하네스 백작인다. 베어맥 자작과 휘하 기사는 반역죄로 처벌했다. 너희는 공범인가?”

모두 격렬하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영주 대리인을 불러라.”

병사 하나가 어딘가로 급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무능한 인간은 마왕의 침공이 있기 전에 치워두는 것이 인류를 위해 더 나을 것이다. 대충 그런 생각으로 죽여버리긴 했는데 귀찮아진 것이 사실이었다.

병사가 누군가를 데려오기 전에 왕도에 마법 통신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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