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78화 (178/206)

177. 검의 주인

왕도에 있는 왕세자에게 저지른 일을 보고하자 왕세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알아서 처리해주겠다고 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원래의 예상에 비해선 훨씬 덜 죽은 것 아닌가. 그리고 순회감찰사라는 직책을 부활시킨 건 어디까지나 내가 아니다. 그 자리를 나에게 달라고 한 적도 없다.

그리고 내가 아니었으면 수십 개 영지에 박혀있는 반마들을 찾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 정도 편의는 봐줘야 하는 것이 맞다.

왕세자는 바로 사람을 보내주기로 했다. 사태를 수습할 사람이 오기 전까지 며칠 동안은 베어맥 영지에 머물러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가 직접 영지를 운영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자작을 죽여버리자마자 병사를 시켜서 영지의 대리인을 불러오라고 한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베어맥 자작의 빈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나를 찾아온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리, 린첼 스미어스라고 합니다.”

나보다도 어려 보이는 10대 중반의 소년이 하얗게 못해 푸르게 질린 얼굴로 벌벌 떨면서 찾아왔다. 소년의 시선은 집무실에 낭자한 베어맥 자작의 핏자국에서 떨어질 줄 모르고 있었다. 시신은 이미 치웠지만, 핏자국까지 닦아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베어맥이 아니야?”

“사, 사생아 입니다.”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로 벌벌 떨고 있는 소년 린첼이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어쩐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했다.

소년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도 이곳의 나이로는 17살의 비슷한 또래다.

“성도 이어받지 못했군. 스미어스는 어머니의 성인가?”

“예, 옙!”

사생아에 대한 대우가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도 왕도 인근의 이야기다. 지방에서는 아직 사생아에게 성을 물려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본처의 힘이 강한 집이라면 더욱 그랬다.

“어머니는 살아계시고?”

“아, 아니요. 돌아가셨습니다.”

귀족 세계에서는 아주 흔한 이야기다.

“베어맥 자작은 아들이 없는가?”

“공자님들이 세 분 계십니다.”

형도 아니고 공자님이라고 한다. 린첼의 입고 있는 옷이나 분위기로 볼 때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자랐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네가 왔지?”

“그, 그건···.”

대답하지 못한다. 당연히 죽을 자리인 줄 알고 형제들이 힘없는 사생아를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쩐다? 나는 분명히 영주의 대리인을 보내라고 했을 텐데.

“린첼 스미어스 네가 지금부터 베어맥 영지의 대표다.”

“예, 예?”

“나는 두 번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영지의 가신들을 모두 불러라.”

린첼은 열심히 뛰어다니며 꼭꼭 숨어있는 영지의 중요 관직을 맡은 자들을 불러왔다. 불러 모은 관리들은 눈알을 뒤룩거리며 눈치를 보기 바빴다.

영주와 기사도 서슴없이 목을 날려버린 미친놈이 혹시 자기들도 죽이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을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린첼이 대표로 나를 찾아오기 전 밑에서 희생양을 고르고 있을 때 그곳에 이놈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몰라도 관리 중에는 반마가 없었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나는 분명히 영지를 맡을 차기 대표를 불러오라 말했고 린첼 스미어스가 나를 찾아왔다. 거기엔 네놈들도 동의했다. 그렇지?”

“예···.”

내가 날카롭게 쓸어보며 묻는 말에 녀석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니 지금부터 베어맥 영지의 대표는 린첼 스미어스다. 베어맥 자작의 미망인과 자식들이 재산을 빼돌려 영지를 떠나는 것을 막아라. 다시 말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영지의 모든 결정권은 린첼 스미어스에게 있다.”

“아, 아니 그것이···.”

그중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이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내 서늘한 시선에 말을 잇진 못했다. 한마디라도 더 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눈치챘을 것이다.

“나는 왕실에서 내려온 관리가 도착할 때까지 린첼 스미어스의 곁에 있겠다.”

관리들이 물러가고 머리가 상황을 따라잡지 못하는 린첼 스미어스와 나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기분으로 저지른 일이다. 그러나 린첼 스미어스가 영지 관리를 잘 할 수 있을까? 처음부터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전임자인 베어맥 자작이 아주 좋은 영주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게 나쁜 영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영지를 가로질러 날아오면서 본 마을과 도시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정도라면 린첼 스미어스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영지라는 것이 관리에게 맡겨두기만 해도 그럭저럭 굴러가는 법이다. 중앙 귀족 중에서는 왕도에만 머물며 십몇년씩 영지에 방문하지 않는 영주들도 허다했다.

둘만 남은 상태에서 나는 린첼 스미어스에게 용기를 잔뜩 북돋아 주었고 린첼 스미어스는 벌벌 떨던 모습과는 달리 굉장히 의욕적으로 영지에서 숙청을 시작했다.

물론 내가 머무는 동안 뒤를 봐주겠다는 약속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린첼 스미어스는 첫인상과 달리 굉장히 과감한 인물이었다.

당장 다음 날부터 기존의 베어맥의 수족들을 정리하고 자신이 다루기 쉬운 인물들로 요직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더욱 도와준 것은 나였다. 원래 하려던 대로 나는 영지에 숨어있는 반마를 찾아다녔고 영주성에서 일곱 마리가 발각되었는데 그중에 베어맥 자작의 미망인과 소영주가 있었다.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반마가 없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반마들은 내 손에 목이 달아났고 나머지 어머니와 큰 형이 악마였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베어맥 자작의 자식 둘은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어보였다.

베어맥 영지의 반마들을 모두 정리한 나는 집무실 근처의 방 하나를 얻어 머물렀다. 물론 방에 계속 있지는 않았다.

지구에서 할 일이 많았다. 세종시를 정리한 나는 아스트로퍼와 함께 새로운 지도의 작성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수도권의 대도시를 향하기 전에 지방을 정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지도를 만들며 남아있는 변이체가 보이면 처리도 하려 했으나. 반경 수십킬로는 샅샅이 뒤져봐도 폭풍의 영향인지 변이체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대한민국을 좌우로 몇번이나 횡단하며 남쪽으로 향했다. 대격변 당시 남쪽은 수도권 못지않게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고 여겨졌다.

남부지방에서 위로 피난을 온 사람이 많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핵발전소였다. 군경과 대형 생존자 모임이 어떻게든 사수하려고 했던 것이 원자력발전소였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시한폭탄이 장착된 핵폭탄이나 다름없는 원자력발전소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도망치기 위해 피난민들이 줄을 이었고 몇 개는 실제로 폭발했다는 소식도 들렸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마지막에 태백 쪽으로 방향을 잡았던 것도 원자력 발전소 때문이었다. 초기에 원자력 발전소 근방에 있던 인원들은 모두 대피했기 때문에 그쪽에 사람이 없을 것이기에 역으로 그 방향을 선택했던 것이다.

사람이 적으면 변이체도 적고 약하다. 그것을 노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생각해보면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태백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울진 원자력 발전소는 방사능을 얼마나 뿜었는지 몰라도 적어도 내가 죽는 날까지 폭발하진 않았다.

어쨌든 방사능이 무서워서 내려가지 않았던 남부지방을 수색하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당연히도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대전이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남아있는 변이체가 없었다. 이유는 당연히 모른다. 대형종이라고 해서 모두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낙동강에서 보았던 메기처럼 아무리 강했던 녀석이라도 죽을 수 있다.

하지만 개체로는 약체인 돌개미나 피라니아처럼 능력에 따라 살아남을 수도 있는 것이다.

대전의 변이체는 오래전에 죽은 것인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조금 심심한 여행은 대전을 지나 김천 구미를 지날 때까지 이어졌다.

변이체를 찾을 수 없었다. 문경시 인근에서 잠자리를 만날 때만 해도 꽤 많은 변이체가 남아있는 것 같았는데 폭풍의 영향이 얼마나 강력했던 것인지 단 한 마리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구미를 지나 또 다른 대도시인 대구에 도착했을 때 마침내 다른 변이체를 찾을 수 있었다.

그르르르!

대형종이다. 전성기 때는 정말 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은 낮은 울음소리로 위협을 겨우 하고 있는 다 죽어가는 변이체일 뿐이었다.

인간형 변이체로 거인처럼 거대한 몸집을 하고 있는 이 녀석은 그 거대한 몸에 입은 상처들을 재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먹이가 눈앞에 있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이 녀석은 그냥 내버려 둬도 곧 죽을 것이다. 그렇게 느껴졌다.

문제는 누가 이렇게 만들었냐는 것이다. 거인의 몸에 남아있는 커다란 상처들은 절대 폭풍에 의한 것이 아니다. 거인의 몸에는 산 채로 갈기갈기 찢어놓은 듯한 상처가 가득했다.

의문은 한 가지 더 있었다. 왜 반죽음으로 만들어놓고 숨을 끊어놓지는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거인의 숨은 내가 끊어주었다.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친절을 베푼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물론 기분 나쁜 승리라고 해서 수확하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거인의 몸에 손을 대자 지난번 아울베어 때처럼 거대한 힘이 느껴졌다.

그러나 새로 생긴 능력은 아울베어처럼 두 개가 아닌 하나였다. 누가 대구의 변이체 아니랄까 봐 불을 다루는 능력이었다.

이 거대한 변이체가 온몸에 불을 휘감고 불의 거인이 되어 대구를 활보했을 것을 생각하니 끔찍한 상상이 들었다.

전생의 나로서는 감히 근처에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멀리서 보는 순간 대구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겠지.

거인의 주변을 탐색하다 보니 역시 유난히 불에 녹아있는 것들이 많았다. 그중 특이한 물건을 하나 찾아냈다.

“검?”

반쯤 녹아버린 검이 떨어져 있었다. 녹은 슬어있었지만, 그리 오래전 물건으로 보이지 않았다. 검의 품질이나 형식을 봤을 때 절대 지구의 물건은 아니다. 오히려 아노더스에 가까웠다.

광검제가 이곳에 왔던 것일까? 광검제의 힘이라면 불의 거인을 가지고 놀듯이 상대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겠지만, 굳이 살려두었을까?

그리고 이런 품질 낮은 검을 광검제가 사용했을 것 같지 않았다. 광검제에게는 지금 나에게 있는 슈바르거트 말고도 두 자루의 신검이 더 있었다.

아마도 상주시에서 부교주와 맞섰던 바로 그 사람일 것이다. 검의 기억을 바로 읽기 시작했다.

거대한 불의 거인이 보였다. 예상대로 조금 전에 생을 끝낸 대구의 변이체는 직접 몸에 불을 두르고 싸우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빨랐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아울베어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민첩한 몸놀림을 자랑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인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가고 있었다.

불에 가려져 상처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온몸의 상처에서 쏟아내고 있는 검은색 피에도 불이 붙어 떨어지고 있었다.

불의 거인이 광전사처럼 작은 상대방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역시 변이체는 이것이 정상이다. 자신의 목숨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할 힘이 있다면 마지막까지 달려드는 것이 바로 변이체다.

전투는 길지 않았다. 수많은 상처를 입은 거인이 마침내 쓰러졌다. 이제 몸에서 화염도 거의 뿜어져 나오지 않고 있었다.

거인이 쓰러진 후에도 검의 주인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멀리서 쏘아내는 검풍과 같은 것은 착실하게 거인의 몸에 깊은 상처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치명상이라고도 하기는 힘들다.

대형종을 상대하기 까다로운 점이 바로 드러나고 있었다. 치명상을 입히기 힘들다. 하지만 그런 대형종을 원거리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쓰러뜨렸다는 것은 검의 주인이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와는 사용하는 힘의 종류가 다른 것 같지만 나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이 아닐까.

쓰러진 채로 난도질당하고 있던 거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입에서 거대한 화염을 뿜어냈다.

기억이 끝났다. 아마 거인의 마지막 공격을 받아내며 검이 녹아버렸던 모양이다. 검의 주인이 누군지는 확인했다. 그리고 전투 중에 검의 주인이 중얼거리듯이 한 말도 들었다.

잘하면 검의 주인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실마리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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