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79화 (179/206)

178. 포교자의 성

검의 주인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가기 전에 처리할 것이 있었다. 얼마나 빨리 준비했는지 내가 사고를 치고 3일 만에 왕세자가 약속했던 특사가 내려왔는데 거기에 의외의 인물로 끼어있었다.

“마그나 너는 왜 여기에 왔어?”

“뭐기는 자네가 친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닌가.”

엄밀히 따져서 사고를 친 것은 아니지만 큰 사건이라고 부를 수는 있었다. 아무리 왕이 임명한 순회감찰사라고 해도 영주의 목을 아무렇게나 날려버리는 것은 다른 문제다.

어디까지나 지금은 용사들의 시절이 아니니까. 내가 새로운 용사이기는 하지만

‘나도 선택받은 용사입니다!’

라고 주장해봐야 딱히 증거도 없는데 누가 그것을 믿어주겠는가?

“나는 내가 받은 권리를 사용했을 뿐이야.”

“그렇긴 하지 하지만 그것을 진짜 사용할 줄은 몰랐다고 해야 할까? 이곳에 오기 전에 왕세자 전하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일이 커졌나?”

“그래 커질 뻔했지.”

뻔했다는 것은 커지진 않았다는 얘기다.

“우리 파벌에서 최대한 여론을 누르는 데 집중하고 있다. 에인프라흐 공작가에서도 적극적으로 돕고 있지.”

두 거대 세력이 여론을 눌러버린 모양이다. 이래서 세력을 키우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도 여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네. 아무리 악마를 처단한다는 구실이 있어도 지방 영주를 개인적으로 처벌한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

“그건 그렇지.”

베어맥 자작의 목을 날리면서 이미 생각했던 일이다.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감정적으로 대처한 면도 있었다.

“그래서 왕세자 전하께서 생각하신 계획이 있는데 말인데.”

“뭔가 방법이 있나?”

“일을 더 키우는 것이지. 그렇다고 백정처럼 아무나 죽이고 다니라는 얘기는 아니야.”

“아···.”

대충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고 있었다.

“나보고 광검제가 되라는 말이군.”

“바로 그것일세”

광검제는 그 시대의 제국 귀족들에겐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황제조차 건드릴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광검제도 변절자와 부패한 귀족들을 썰고 다닌 것이지 학살을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일반 백성들에게는 구원자나 다름없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폭탄 그러나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절대자 그런 위치를 잡으라는 얘기인 것이다.

“나쁘지 않은데?”

“그런가? 전하께선 네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는데”

왜 그런 생각을 했지?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인 건지도 모른다. 광검제는 또 다른 세계의 나이니까.

“그런데 이 얘기를 하려고 따라온 건가?”

“그것도 있지만 나는 내 일하러 온 왔네”

“무슨?”

“남부 연합은 이제 사실상 해체가 아닌가? 그럼 그 사람들은 어딘가 의탁을 하고 싶겠지. 누구 덕분에 갑자기 영주가 된 사생아라던가 말이지”

“아하!”

하네스 파벌의 규모가 더 커질 것 같다. 이거 잘하면 왕국 내에서 가장 큰 파벌이 되는 것이 아닐까?

뒤처리를 할 사람도 생겼겠다. 마그나와 왕실 특사에게 뒤를 맡겨두고 나는 남부 연합과 주변 영지의 청소에 속도를 올렸다.

베어맥 영지에서 내가 친 사건에 대해 소문이 났는지 감히 베어맥 자작처럼 헛짓을 하려는 귀족은 나타나지 않았고 적극 협조를 해왔다.

물론 그렇다고 반마의 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소음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반마들은 대부분 영지의 요직 혹은 영주의 가족으로 변해서 숨어들어 있었기에 반마들을 처치할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갈렸다.

마신교에게 분노를 느끼거나 나에게 공포를 느끼거나였다. 혹은 반대로 나에게 적개심을 가지는 인물도 있었다.

그중 몇 명은 조사를 해보니 숨어있는 마신교로 밝혀져 목을 날리기도 했지만 의미 없는 학살을 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내 이명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완전히 정착된 이명은 아니었지만, 일부 사람들은 나를 검제라 부르고 있었다. 검으로 지고의 경지에 발을 들였을 때 받을 수 있는 이명이다.

검제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한 이들은 보통 그 시대의 최강자였다. 에인프라흐 공작은 명실공히 라이브러쉬 왕국의 최강자였지만 제멜아크 왕국의 쿼런틴 피어스 공작보다 반수 정도 아래로 평가되고 있었기에 검성의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나는 쿼런틴 피어스 공작보다 한 수 위의 경지를 가지고 있다고 발표되면 나를 검제라 부르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한 글자가 더 추가되었다. 광검제처럼 미친 짓을 자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영지를 돌며 반마들을 처치하는 것들이 두렵게 느껴졌는지 남부 귀족들이 사이에서 요즘 불리는 이명이 귀검제였다.

별로 마음에 드는 이명은 아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남부 연합 일을 끝내고 왕도로 돌아가면 사그라들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일은 빠르게 정리되어 남부 연합의 정리는 이미 절반 이상이 끝났다.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쯤 되면 꼬리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포교자를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잡히는 반마들의 물건에서 기억을 계속 뽑아내고 있었지만, 포교자의 정체를 찾을만한 기억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내가 도착해서 반마들을 구분하게 된 이상 이미 망가진 계획이고 포교자는 멀리 도망갔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추적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

반마의 물건에서 기억을 읽어내던 중에 포교자의 얼굴이 보인 것이다.

현재는 플라트나 베일리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는 포교자는 그 얼굴을 제대로 확인한 사람이 없었다. 플라트나 베일리라는 이름도 당연히 가명이었다.

왕실의 정보단체에 마신교가 손이 닿은 것 같지만, 그렇다고 오랫동안 마신교에 대해서 조사해왔던 누적된 정보를 모두 조작한 것은 아니다.

교주를 제외한 부교주와 사제 그리고 포교자 그 외에 중요 간부가 몇 명 더 있지만, 공통점이라면 그 행적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부교주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부교주의 통로를 이용한 이동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완전히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것을 어떻게 추적할 수 있겠는가.

사제의 경우에도 만났던 사람에게 정신 교란을 걸어 흔적을 지울 수 있으니 마찬가지였다. 다른 중요 간부들도 자기 능력을 이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포교자는 진짜 얼굴이나 이름조차도 알려지지 않은 인물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나는 포교자의 얼굴을 보았다. 정확히는 포교자가 진짜 얼굴에서 다른 얼굴로 얼굴을 변화시키는 것을 보았다.

신체 변형 능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었다. 진짜 얼굴을 보았다는 것도 크게 의미는 없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단서가 있었다.

“고트가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내가 처치했던 반마가 포교자에게 한 말이다. 그 한마디였다. 포교자가 고트 백작가에 있다는 말이다.

남부 연합의 수장이라고 알려진 고트 백작가는 아직 방문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다. 하셀브링크 자작 영지에서 가까운 곳부터 처리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다.

그곳에 아직 포교자가 있을까?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나는 몇 개의 영지를 가로질러 고트 백작가에 도착했다.

그리고 거대한 영주성에 내려서기 직전부터 이상한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감각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이곳에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수백명이 미리 나와서 나를 환영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수백명 중에 반마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어서 오시오. 하네스 백작. 요엘 고트라고 하오.”

선두에 선 사람 좋게 생긴 중년의 귀족이 나를 맞이했다. 요엘 고트 백작, 남부 연합의 수장이자 남부에서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귀족이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인다. 하지만 멀쩡하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기묘한 감각이 성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아마도 포교자가 아직 떠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하하! 고트 백작가의 정보력이 꽤 대단하지요?”

“그렇군요.”

“자~. 이럴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해둔 연회가 있으니 참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보다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만.”

“아, 악마를 처치하는 일 말이군요. 당연히 협조해야지요. 그래서 영주성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모두 이렇게 모아놨습니다.”

수백 명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나보다. 고트 백작 하나만 보면 이상하지 않지만, 이렇게 보니 확실히 정상이 아닌 것을 알았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미동조차 하지 않고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혼을 뺏긴 인간들을 보는 느낌이다.

이런 능력을 가진 변이체가 있었던가? 내가 만나보지 못한 변이체가 많은 줄을 알고 있지만, 이런 능력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이것을 뭐라고 해야 할까? 단순한 정신 조종 쪽은 아닌 것 같았다.

이들이 모두 반마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아니면 내 감각을 속일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가진 반마일 것이다.

“이들은 악마가 아니군요.”

“그렇지요? 제 성에 악마는 발을 들일 수 없습니다. 그럼 연회를···.”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상한 기운이 감각을 방해하고 있지만, 그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성 내부에 아직 사람이 꽤 많이 남아있었다.

“아, 연회를 준비하고 있는 이들이 있지요. 그럼 바로 가셔서 확인하고 연회를 즐기시면 되겠군요.”

고트 백작은 참 말을 잘했다. 하지만 영혼이 없이 대사를 읽는 느낌이다. 대체 포교자라는 놈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럼 가보지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 분명 무슨 수작이 있는 것 같지만, 회피할 수도 없다.

고트 백작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연회장에서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정말로 연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반마는 느껴지지 않는다. 모두 보통 사람이다. 안으로 들어오니 그 기묘한 기운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이것이 초감각의 능력을 상당히 상쇄시키고 있었다.

영주성 전체는커녕 연회장 안에 있는 인원들을 감지하기도 벅차다.

“굉장하지요? 하네스 백작이 온다고 해서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그렇군요.”

확실히 왕도에서도 이 정도 규모의 연회는 몇 번 보지 못했을 정도로 화려한 연회였다. 긴 연회 테이블 위에 화려한 요리가 가득하고 솜씨 좋은 악단이 적당한 음량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연회에 참가한 귀족이 나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귀족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오직 하네스 백작만을 위한 연회입니다.”

“그런 것 같군요.”

오직 나를 위해 만든 함정이라고 해석하면 될까?

“자! 그럼 즐기시지요. 여기 브랑필로네 26년산 와인이 있습니다.”

테이블 위에 있던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와인을 집어 든 고트 백작이 나에게 술을 권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 희귀하고 비싼 술 같지만, 그것을 넙죽 받아먹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괜찮습니다. 술을 즐기지 않습니다.”

“그것참 아쉽군요. 그럼 다른 것은 어떻습니까?”

고트 백작이 손짓을 하자 수십명의 반쯤 벌거벗은 여자들이 사뿐거리는 발걸음으로 쏟아져 나왔다.

기분이 나빠졌다. 예전에 던전 안에서 경험했던 인간의 욕망을 자극했던 시험이 생각났다. 그런데 그보다 기분이 나쁜 것은 저 여자들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기 전까지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자도 즐기지 않습니다.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니라서요.”

“저런 안타깝군요. 그럼 이것은 마음에 드실 겁니다.”

고트 백작이 손짓하자 여성들이 물러갔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기다렸던 것들이 나타났다.

“이것은 마음에 드는군요.”

“그렇지요? 신경 써서 준비했습니다. 멍청하게 당신에게 당한 사제와 다르게 말이지요.”

이제 숨길 생각도 없는 모양이다.

이미 변이까지 마친 괴물 수십마리가 연회장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아니, 내가 볼 때는 사제나 너나 비슷한 것 같군.”

“그렇습니까? 아닐 텐데요?”

고트 백작의 입이 인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쭉 찢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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