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과거의 망령
고트 백작의 입은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순간적이긴 했지만, 고트 백작의 입이 인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반마였나? 영주성을 감싸고 있는 기운이 내 초감각을 마비시키고 있는 걸까?
“포교자는 어디에 있지?”
굳이 감출 생각이 없다면 이쪽도 모른 척 해줄 필요가 없다.
“나는 어디에나 있다.”
대답한 것은 고트 백작이다. 고트 백작을 포교자가 조종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동안 나를 꽤 연구했나 보군.”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는 너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고트 백작 혹은 그 안에 들어있는 포교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백 명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온다. 모두 보통 사람, 감각을 속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느끼기에는 그렇다.
수백 명의 사람이 나와 고트 백작을 둥그렇게 둘러싼 채 바라본다. 눈도 한번 깜박이지 않는다. 무슨 공포영화의 한가운데 들어온 기분이다.
설마 이 사람들을 인질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에 대해서 잘 안다고? 아마 아닐걸?
“혹시 이거 알고 있나?”
고트 백작이 고개를 갸웃한다.
“커허허허허헝! 쿨럭!”
아, 사자후라는 것을 한번 실현해보려고 했는데 마지막에 사레가 들려서 기침을 해버렸다. 중요한 순간에서 멋있게 써먹으려면 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
그래도 오러를 가득 실은 사자후가 연회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것에는 아울베어에게서 얻은 능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무슨 방법을 쓴 것인지는 몰라도 결국은 변이체의 능력이다. 그렇다면 아울베어의 능력 봉인이 하드 카운터다.
고트 백작을 포함해 연회장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이 썩은 짚단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쓰러지면서 다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까지는 내가 어쩔 수 없지.
그러나 여전히 영주성을 휘감고 있는 묘한 기운은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묘한 기운이 가장 진한 곳을 찾아가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포교자는 한가지 실수를 더 했다. 9성 기사의 힘을 너무 우습게 봤다. 영주성 안 어딘가에 숨어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냥 다 부숴버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9성 기사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다.
슈바르거트가 손에 쥐어졌다. 뿜어진 오러가 연회장 바닥이 두부 썰듯이 갈랐다.
쿵!
바닥이 떨어지며 아래층으로 향하는 통로가 즉석에서 만들어졌다. 나는 그곳으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남부에서 가장 유복한 영지답게 영주성은 상당히 컸다. 크기로만 보면 어느 후작이나 공작가의 성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다.
층을 파괴하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미묘한 기운에 가까워질수록 초감각이 무뎌지는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영주성이 몇층으로 이루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창문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지하까지 내려온 모양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지금까지와 다르게 나를 환영하는 인파가 잔뜩 몰려 있었다. 그러나 환호와 박수는 없다. 갑자기 천정에 구멍을 뚫고 내려왔는데도 놀란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이 집 손님 대접이 엉망인데? 인사도 없어?”
크아아아!
수십 명, 아니 수십 마리의 반마들이 변이를 마친 채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대답 대신 일제히 포효했다.
아, 이 친구들은 말을 하지 못하지?
“사과할게 사람이 아닌 것들에게 사람 말을 하라고 했으니 내가 큰 잘못을 했어.”
변이체를 상대할 때는 말이 필요 없다. 반마들이 파도처럼 나를 덮쳐왔다.
슈바르거트가 오러를 잔뜩 머금고 변이체들을 맞이했다. 무언가가 잘리는 소리와 쓰러지는 소리가 제법 넓은 지하실을 가득 채웠다.
슈바르거트는 내 오러와 반마들의 생명을 돼지처럼 탐욕스럽게 먹어 치웠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지금까지와 다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창!
양팔이 사마귀의 앞발처럼 생긴 변이체가 내 슈바르거트를 막아냈다. 전력이 아니긴 했지만, 반마가 내 공격을 막아낸 것은 처음이었다.
“막았어?”
머리까지도 사마귀의 머리를 닮은 변이체의 입이 미묘하게 비틀어졌다. 아마 웃는 것이겠지?
잠깐의 전투로 바닥에 수십마리의 변이체가 시체가 되어 뒹굴고 있었지만, 사마귀를 닮은 녀석의 뒤에 몇 마리가 남아있었다.
초감각이 둔화하여 잘 느껴지지는 않지만 알 수 있었다. 저놈들도 사마귀와 비슷한 힘을 가진 놈들이다.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던 전투가 아닌 제대로 된 전투가 벌어졌다. 사마귀와 친구들의 숫자는 여섯, 모두 사마귀처럼 내 가벼운 공격쯤은 받아낼 수 있는 놈들이었다.
그리고 제법 치명적인 공격을 해온다. 물론 한 번도 공격을 허용하진 않았지만, 초감각이 둔해진 나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초감각에 의존해왔는지 실감하고 있었다.
변이체 여섯이 둘러싸고 나를 집중 공격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기꺼이 수련의 기회로 삼고 있었다.
보통 사람쯤은 한방에 가루로 만들거나 깔끔하게 반으로 갈라버릴 수 있는 공격이 1초에 수십번이 쏟아졌다. 초감각의 도움 없이 그것을 받아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생을 포함해 수십 년을 사용했던 초감각이 둔해진 것은 마치 팔 한 짝이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보통이다. 보통 기사들 그러니까 슬라이트나 스승님 혹은 에인프라흐 공작 같은 실력자들도 이런 감각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기분이었다. 그렇게 십여분 정도를 내 성장을 위해 투자했다. 나를 가운데 놓고 신나게 내리치고 있던 놈들도 이쯤 되니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낀 것인지 놈들의 공격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놈들이 진짜 변이체였다면 이런 행동을 보일리 없지만, 이놈들은 반마니까.
감각에 의존하지 않은 실전 학습 시간을 종료할 시간이다. 붉은색의 슈바르거트가 탐욕스러운 괴물의 혓바닥처럼 놈들의 몸을 흝고 지나갔다.
꽤 강했던 여섯 마리의 반마가 차가운 지하의 돌바닥에 입을 맞추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놈들이 약한 것이 아니다.
이놈들을 상대하려면 최소한 7성 기사는 필요했을 것이다. 이런 반마를 많이 모아놨다면 마신교의 전력도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반마들의 시체를 넘어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도중에 몇 개인가 함정이 있었다. 그중에는 꽤 위력적인 마법을 이용한 것도 있었지만, 그것도 나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한층을 더 내려갔다. 이놈의 마신교 놈들은 왜 그렇게 지하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숨어있는 곳들이 대부분 지하 아니면 광산이다.
한층 아래는 지하감옥으로 사용되던 곳 같았다. 기묘한 기운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지하 감옥은 다른 지하감옥이 그렇듯이 꽤 복잡한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초감각은 이제 거의 마비가 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가 되었다. 이곳 어딘가 포교자가 있을 것 같지만 찾는 것이 쉽지 않을 듯 하다. 이럴 땐 쉽고 빠른 방법이 있다.
슈바르거트에 둘러진 강대한 오러가 지하감옥을 휩쓸었다. 그것이 벽이든 쇠창살이든 가리지 않는다. 어디 있는지 잘 모르면 다 부수면 된다.
혹시 이곳에 붙잡혀 있을지도 모르는 인질? 포교자가 나를 어떻게 분석했는지는 몰라도 나는 결코 생명 존중론자나 박애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쪽에 속한다.
그리고 이것은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불난 집의 바퀴벌레들처럼 바퀴벌레보다 못한 것들이 마구 튀어나오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것들은 무식하게 휘둘러지는 폭력적인 오러의 힘 앞에 쓸려나갔다. 혹시 기초공사를 부실하게 했을지도 모르는 고트 백작령이 영주성이 무너지거나 말거나 그렇게 쓸어버리고 튀어나오는 바퀴벌레들도 뜸해졌을 때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러를 뚫고 나타난 것은 셋이었다. 놀랍게도 주변을 박살 내고 있던 오러를 막아내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심지어 변이체의 모습도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이룬 순수한 경지가 꽤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경호원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타난 것은 셋이지만, 내 시선은 한명에게 박혀있었다. 나는 포교자의 진짜 얼굴을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포교자, 나를 잘 안다고?”
검을 거두고 묻자 여유만만하던 포교자의 얼굴에 미세하게 균열이 생겼다.
“인정하지, 너는 우리의 예상을 벗어났다. 그러나 네가 오늘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 무슨 전형적인 삼류 악당 같은 대사지? 혹시 이 녀석도 나처럼 지구에서 건너온 건가?
“방법은 있고?”
내 질문에 대답하듯이 포교자의 양쪽에 붙어있던 두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둘 다 중년이 되지 못한 30대의 얼굴이다. 맡은 역할은 딱 봐도 알 것 같았다. 한 사람은 검을 들고 있었고 한 사람은 작은 완드를 들고 로브를 입고 있었으니까.
“자네가 새로운 검제라지?”
내 오러를 막아냈던 경호원이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별로 사람이 아닌 것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확실히 기세가 다르다. 포교자 덕분에 감각은 엉망이 되어있지만, 그냥 강자의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 느껴진다.
“나는 데카트 시즈리프라고 하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과 가문명이다. 하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스트로퍼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 라고 생각할 때 아스트로퍼가 먼저 튀어나왔다.
-시즈리프?
“아니, 그분은?”
아스트로퍼를 본 데카트 시즈리프라는 기사가 눈을 크게 떴다.
-맞네 시즈리프. 오랜만이야!
“멸악의 마법사님”
데카트가 아스트로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아스트로퍼를 보고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를 떠올렸다면 저 데카트라는 기사가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젊었을 적 모습을 알고 있다는 얘기다.
-난 주인님이 아니야. 난 아스트로퍼라고 해.
아스트로퍼의 말에 기사가 크게 당황했다.
“맞소. 저것은 탑주께서 당시에 만들었던 물건인 듯 하오. 기억이 나는구려. 아마 황제에게 넘어갔을 터인데?”
함께 있던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한마디를 거들었다. 저 마법사는 아스트로퍼의 탄생 비화까지 알고 있었다. 탑주라고 하는 것을 보면 당시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밑에 있던 마법사였던 것이 분명하다.
-주다프도 오랜만이야!
아스트로퍼가 마법사에게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마법사는 싸늘한 표정으로 무시했다.
“아스트로퍼. 저 사람들 알아?”
-응!
“그러니까. 설명을 해달라고.”
-옛날 사람!
아니 그것은 알겠는데... 됐다.
“알았어 다시 들어가”
일단 아스트로퍼가 알고 있고 그 시대의 사람인 것으로도 충분하다. 대체 그 오랜 시간 동안 어디에서 숨어있었는지는 몰라도 변절자의 삶 같은 것은 궁금하지도 않다.
포교자가 자신만만한 이유가 있었다. 대략 400년 전 사람인 것도 알겠고 그동안 놀고 있진 않았을 테니 내가 만난 상대 중 가장 강한 적일 것이다.
“굳이 내 소개를 필요 없겠지?”
변절자에게 경로우대 같은 것은 없다.
“자리를 옮기는 것은 어떻소?”
“이곳에서 싸우면 그쪽에 더 유리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많은 사람이 죽겠지”
“변절자 아니 반마 주제에 사람이 죽는 것을 걱정한다라 고양이가 쥐 생각을 해주는 건가?”
나는 대놓고 빈정거렸지만, 400살 먹은 기사는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좋아. 멀리 갈 필요는 없겠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몰라도 400살 먹은 기사와 마법사 그리고 내가 싸운다면 인근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무고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살리는 것이 나도 더 좋다.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며 속도로 이동했다. 그러나 성에서 빠져나오자 감각이 돌아왔다.
“아, 나 당한 건가?”
경계하며 이동하고 있으나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포교자와 두 노괴들이었다. 그런데 감각이 돌아온다. 그렇다면 저것이 진짜 포교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눈치챘나? 하지만 늦었다.”
입을 다물고 있던 가짜 포교자가 나를 비웃었다. 그 순간 옅었던 기운조차도 완전히 사라졌다. 진짜 포교자가 어딘가로 사라졌다는 뜻이다. 아마 이번에도 부교주가 뭔가를 했겠지.
“너무 아쉬워 할 것 없다. 여기 두 어르신을 네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감각이 완전히 돌아오면서 눈앞의 두 사람이 얼마나 강한지 확실히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