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변절자의 끝
기사는 에인프라흐 공작 수준, 마법사는 마탑주보다 위다. 눈 앞에 몇 백년 동안 죽지도 않은 두명의 노괴물들은 그 정도 수준이었다.
반면에 가짜 포교자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다. 5성 기사 수준 정도? 하지만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니 완전히 방심할 수는 없었다.
“이미 당한 것은 어쩔 수 없고 그럼 가볼까? 알아서 따라오시던지.”
나는 비행능력으로 몸을 날렸다. 8성 이상의 경지를 가진 셋이 싸우려면 꽤나 넓은 곳이 필요할 것이다.
경지가 있으니 날아서 이동해도 어떻게든 따라올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의외로 간단하게 마법사가 나머지 둘까지 비행마법을 사용해서 따라붙고 있었다. 그래도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혹시 다른 곳으로 도망칠 수도 있으니 적당히 거리를 조절해가며 사람이 없는 넓은 지역을 찾아냈다.
“그쯤 가는 것이 어떻겠나?”
최대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지려고 했으나 따라오던 마법사가 멈춰섰다.
전투의 여파가 얼마나 미칠지는 모르겠으나 이 정도면 큰 피해는 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비행을 멈추고 바닥에 내려섰다. 이미 날아오면서 서로를 탐색할 시간은 충분했다.
넣어뒀던 슈바르거트를 꺼내들자 기사가 관심을 보였다.
“아까도 보았지만, 그 신검의 새로운 주인이 나올줄은 몰랐군.”
확실히 저 노괴물들은 용사들의 시대부터 살아왔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 시절의 용사들은 악마와 조금만 관련된 것이 보이더라도 주변을 박살내버리는 수준이었다. 대량의 민간인이 희생되는 것도 개의치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측근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이는 이들이 반마가 되어있는 것을 몰랐을까?
“당신들은 용사들에게서 어떻게 살아남은거지?”
“허허, 도망치고 숨었지.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그저 보이지 않고 손에 닿지 않은 곳으로 도망쳐서 숨어있었지.”
그러니까. 그게 가능하냐는 말이다. 제대로 대답해줄 생각은 없는것 같으니 원래 하려던 일을 하는 것이 나을것 같았다.
“그럼 시작해볼까?”
내가 오러를 끌어올리기 시작하자 기사가 갑자기 손을 들어올렸다.
“젊어서 그런지 성미가 급하군. 잠깐 기다리게”
기사의 검이 번쩍하는 순간 가짜 포교자의 목이 날아오르며 피가 솟구쳤다. 그리고 기다렸다는듯이 마법사의 마법이 아직 죽지 않은 가짜 포교자의 몸을 불태웠다.
“무슨 짓이지?”
갑자기 아군을 처치한 돌발행동이었다. 딱히 놀란 것은 아니었지만,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이제 필요없기도 하고 그동안 거슬리기도 했지.”
“감시역도 사라졌으니 이제 제대로 이야기를 해볼까?”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수백년을 살아온 두 노괴가 싸울 의사가 없다는 표시를 했다.
“당신들은 반마가 아닌가?”
“반마? 요즘은 그렇게 부르는가? 악마의 능력을 몸 안에 받아들인 것을 말하는거라면 맞네. 우리는 반마지.”
“그런데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지?”
“우리는 딱히 악마를 따르는 것이 아닐세. 저 치들이 말하는 신념이나 세계 멸망을 원하는 것도 아니지.”
너무 오래 살아서 머리가 이상해진건가? 지금 뭐라는거지?
“그럼 왜 반마가 되었나?”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 늙지 않고 아프지 않네 영원히 젊음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지.”
그렇게 말하면 딱히 할 말은 없다. 지구에서도 영생을 얻기 위해 수천년간 연구했으니까. 대격변이 있기 전에는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단지 인간의 육신을 버려야 했지만 말이다.
“그렇군. 그런데 단지 그것 뿐인가? 수백년간 도망치고 숨어 사는 것도 딱히 즐겁지는 않았을텐데?”
“그렇게 팍팍한 생활은 아니었다네. 나름 충실한 삶이었지.”
역겹다. 이런저런 말을 하고 있지만, 결국은 변절자 아닌가?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변이체 알러지가 있는 나에게는 그저 개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 충실했던 삶을 끝내려고 날 찾아오셨나?”
“음, 그것은 조금 다르군. 우리가 영생을 원했던 이유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네.”
“그럼 뭐지?”
“그 나이에 그런 경지에 오른 자넨 잘 모르겠지만, 재능의 벽을 본 적이 있는가?”
봤다. 전생에 아주 지겹도록 느꼈다. 타고난 재능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날 갑자기 주어진 특별한 능력에 의한 재능이었다.
도망치는데는 쓸모있었지만, 강한 적과 싸울 때는 아무 쓸모없는 능력을 가지고 수십년을 살아남았다. 변이체들은 나날이 강해지고 그에 맞서는 생존자들도 강한 자들만이 남았다. 그 사이에서 수없이 많은 벽을 보았다.
“봤다.”
“농담인가? 그럴리가 없지. 우린 아주 어린 나이에 용사들의 밑에서 그 벽이란 것을 실감했지. 용사님들은 나름대로 천재였다고 생각했던 우리들 앞에 나타난 거대한 벽이었어.”
이 노괴들은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것 같았다.
“마침 좋은 제의가 오기도 했지. 영생을 준다고 말이야. 그리고 안전도 보장한다고 했네 그래서 우린 생각했지 우리가 몇년을 수련하면 과연 그분들이 있었던 곳에 닿을 수 있는지 말이야.”
“실패했군.”
에인프라흐 공작과 비슷한 수준 즉 8성의 경지다. 대단한 노력이라고 해야할까. 그러나 4백년을 수련한 것치고는 보잘것 없는 결과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실패했네. 그분들의 근처에도 닿지 못했지. 우리 착각이었던 것이야. 한 백 년 정도만 수련한다면 그분들과 비슷한 수준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네. 하지만 어림도 없었지. 우리에겐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던 것이야.”
스승님이 비슷한 말을 하셨던 적이 있다. 수련만으로는 되지 않는다고 각자 타고난 한계가 있다고 하셨다. 그것을 뚫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지구의 마나였다.
“그래서 우리는 찾기로 했네. 이 타고난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을 말이야.”
“찾았나?”
“찾았지. 의외로 답은 간단했네.”
“뭐지?”
“인간을 포기하는 것이었어. 그렇지 않나? 그분들을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미 그분들은 인간을 포기했던 것이야. 그러니 그 경지에 닿을 수 있었던 것이었지.”
“미쳤군.”
이 노괴들은 너무 오래살다보니 미쳐버린 것이다.
“미쳤다고 해도 좋다.”
갑자기 마법사와 기사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급격히 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8성을 넘어 나와 비슷한 경지에 올라서고 있었다.
“우리는 그만큼 강해졌으니까.”
이것을 뭐라고 해야할까? 반의 반마? 인간의 이성을 남기면서 변이체의 몸을 빌려왔다고 해야할까? 두 노괴는 완전히 변이하는 것이 아닌 부분적으로 변이체의 신체를 빌려쓰고 있었다. 이런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괴물의 탈을 쓰고도 결국 초월급에는 닿지 못한건가? 400년 동안 수련하고 연구한 것 치고는 형편없네.”
가벼운 도발이었다. 그러나 역린을 건드렸을까. 두 노괴의 얼굴이 보기좋게 일그러졌다.
“그것이 유언인가?”
“모르는 것 같은데 하나 알려줄까?”
“뭐냐?”
“광검제님도 아직 살아계시다. 그분이 너희들을 보면 어떨까?”
두 노괴가 동요하는 것이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만나는 순간 죽는다. 두 노괴가 그것을 모를리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야 하는 싸움이다. 수백년을 단련한 노괴들이 이런 틈을 다시 보일 것 같지 않았다.
콰앙!
굉음과 함께 거대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눈앞이 시뻘겋게 보일 정도로 위험감지가 미친듯이 경고를 보냈다. 기사를 막아내면 마법이 날아오고 마법을 막아내면 기사가 파고 들어온다.
기술의 영역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비록 높은 경지에 오르진 못했다고 하나 400년 동안 수련한 완성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나는 처음부터 기술에 집중한 검술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술의 영역에서 보면 나는 슬라이트나 자칼에게도 한참 뒤쳐진다.
어디까지나 상대는 부분적으로 변이를 하며 임시로 올린 경지다. 그것이 언제까지고 유지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같은 경지의 상대 둘을 동시에 상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용했다.
아울베어의 능력봉인을 틈이 나는대로 날렸고 독을 뿜어냈으며 불거인에게서 얻은 화염술로 마법사를 견제했다.
“너도 인간을 버렸었군.”
전투 중에 기사가 그런 오해를 하기도 했지만, 대꾸하진 않았다. 8서클 마법사의 광역 마법으로 지형이 바뀌고 수십미터의 오러가 뱀처럼 춤을 추며 주변을 파괴했다.
때로는 오러끼리 충돌하며 강력한 충격파가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멀리 떨어지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 정도면 주변의 마을과 도시에도 영향이 미칠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1초 아니 10분의 1초만 방심해도 생명이 날아갈 수 있는 격렬한 전투였다.
빈 틈을 노려 한방 먹이고 시작했지만, 초반엔 일방적으로 수세였다면 지금은 팽팽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성장 능력이 급속도로 나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400년을 수련한 검술이나 마법 능력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기사는 나와 검을 맞대려하지 않고 있었다. 슈바르거트에서 뿜어지는 백색의 오러는 동급의 상대였지만, 기사의 붉은색 오러와 상극의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도 용사의 힘으로 추정되지만 이렇게 제대로 효과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이가 없군.”
기사는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물론 계속 주절대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투 중에도 한마디씩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기사의 얼굴은 질려있었다. 자신들의 400년이 부정당하는 기분일 것이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나라도 그런 기분이 들었을 테니까.
“한가지 궁금한것이 있다.”
“뭔가?”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몸을 움직이고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도 우리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당신들 같은 괴물들이 또 있나?”
마신교의 힘을 너무 우습게 봤었다. 이런 노괴들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이 두 괴물만 왕도에 풀어놔도 왕도는 초토화가 될 것이다. 물론 그곳에는 국왕과 에인프라흐 공작을 비롯한 실력자들이 많이 있지만, 이 둘을 막기에는 힘겨울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없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럼 당신들도 결국은 버림패군?”
“그럴지도 모르지.”
기사는 그것을 끝으로 입을 다물고 전투에 집중했다. 전투는 장기전으로 들어갔다. 변이체의 무한한 체력이 있다고 하나 오러나 마나도 그렇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처럼 무식하게 오러를 뽑아낼 수 없었고 마법이 날아오는 빈도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시만 방심해도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은 같았다.
인간이라면 지쳐서 나가 떨어져야 하지만 순수한 육체의 능력이라면 나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먼저 지친 쪽은 마법사였다. 마나가 떨어진 마법사는 참 애매한 존재다. 전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서 힘을 보충하려는 마법사의 움직임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비장의 한 수로 여태까지 사용하지 않고 있었던 영체화를 꺼내들었다. 수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큰 공격을 퍼부으려는 기사의 공격을 그대로 통과해 마법사에게 달려들었고 마법사는 피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내가 빨랐다.
갑자기 등 뒤에서 솟아나오는 일격에 마법사의 심장이 뚫렸고 슈바르거트는 굶주린 흡혈귀처럼 게걸스럽게 생명력을 빨아들였다.
“흐아아아!”
마법사의 비명이 울려퍼지기도 전에 기사가 빠르게 반응하여 다가왔지만 이미 나는 마법사에게서 멀리 떨어진 후였다.
마법사는 죽지 않았지만, 생명력을 왕창 빨린 터라 운신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것으로 승부의 추가 기울어졌다.
마법사의 생명을 잔뜩 빨아들인 슈바르거트가 그것을 오러로 전환하여 전투에 사용했고 갑자기 늘어난 힘에 기사가 속수무책으로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세에 몰리던 기사는 끝내 일격을 허용했다. 검을 든 팔이 잘려서 날아갔다. 전투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졌군.”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팔을 보며 기사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전투를 계속할 의지가 없는듯 했다.
“너와 나의 차이는 재능 같은 것이 아니야. 마음의 차이지.”
나라면 마지막까지 싸웠을 것이다. 팔이 한짝 떨어진다면 다른 팔로 싸우면 된다. 두 팔이 떨어졌다면 발로 걷어차기라고 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살아남았었고 그런 각오로 얼마나 강할지도 모르는 마왕과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단순히 벽을 마주했다고 변절자가 된 누구와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