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남부 정리
“크흐흐”
기사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지?”
“결국 자네도 인간을 버린 것이 아닌가? 그분들도 역시 그랬겠지. 그것은 처음부터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힘이 아니었어.”
자신의 아집에 먹혀버린 것일까. 스스로 생각하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어차피 오늘 죽을 사람인데 그렇게 정신 승리를 하며 행복하게 죽게 내버려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일 때 얘기 아닐까?
“웃기고 있군. 나도 광검제도 용사들도 어느 누구도 인간을 버리지 않았다. 인간을 버린 것은 너같이 멍청하고 나약한 놈들뿐이지.”
“너···.”
기사가 내 말에 반박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말싸움에서 이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말을 하지 못하게 하면 된다. 기사의 목이 날리고 곧바로 심장에 슈바르거트를 꽂아 완전히 숨통을 끊어주었다.
그리고 마나가 고갈되고 생명력을 잔뜩 빨려 바닥을 구르고 있는 마법사도 친구 곁으로 보내줬다. 주변을 둘러보니 생각 이상으로 난장판이었다.
원래 도착했을 때 지형이 어떤 상태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싸움이었지만, 전투의 흔적은 마치 핵폭탄이 떨어진 느낌이었다.
원래 근처에 작은 산도 있었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고 넓은 황무지가 되어있었다.
멀리서 많은 사람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이 난리를 쳤으니 관심을 끌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금방 다가오는 것을 보면 보통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만나서 사정 설명을 하려다가 귀찮아서 두 노괴들의 시체만 정리한 후 날아올랐다.
고트 백작령의 사건은 발 없는 말이 되어 빠르고 멀리 퍼져나갔다. 반나절도 되지 않아 마법 통신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가장 빨리 연락이 온 것은 왕실이었다. 왕세자를 시작으로 국왕이 따로 연락을 했고 스승님과 각종 거물들이 연락을 해왔다.
똑같은 설명을 여러 번 하기도 지쳐서 조금 쉬고 있을 때 마그나가 찾아와 여러 가지 불평을 늘어놨다. 결론은 자기 일이 늘어났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마그나가 고생하는 만큼 세력의 힘이 커질테니 행복한 고민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다음 날부터 쉬지 않고 남부 연합의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포교자가 후퇴 명령을 내린 것인지 각 영지에서 많은 사람이 실종되어 있었다.
반마들이 알아서 모두 사라진 이상 내가 할 일도 별로 없었는데 베어맥 자작가와 고트 백작가에서 있던 일이 소문이 나며 귀족들이 내가 나타나기만 해도 벌벌 떠는 바람에 더욱 일이 쉬워졌다.
베어맥 자작가에 파견되었던 왕실의 관리가 고트 백작령으로 급파되었고 마그나에게 전해 듣기로 포교자에게 몸을 빼앗겼던 고트 백작은 정신을 차렸지만, 사람 구실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그 외에 조종당했던 수백명의 사람들이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고트 백작의 자식들 중의 하나가 영지에 있지 않고 왕도의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왕실에서는 고트 백작을 회수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고 하지만 정신이 멀쩡한 후계자가 있으니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마그나는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고트 백작령의 후계자를 돕겠다면서 사라졌고 마침내 남부 연합의 일이 끝났다. 주범인 포교자는 끝내 잡을 수 없었지만, 만약 그대로 진행됐다면 왕국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던 사건을 처리했고 왕실에서는 여태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두 노괴를 처리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생각하는듯했다.
일을 끝낸 나는 마침내 왕도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완전히 일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두 노괴가 가지고 있던 소지품들은 감정을 해보니 엄청난 물건들이었다. 슈바르거트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검이다. 이름은 그리 알려지지 않은 검이었지만, 그 가치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머지 소지품도 왕실의 보고에 들어갈 만한 보물들이었다. 9 서클의 마법사가 사용하던 완드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스승님께 드리고 완드는 스테이시에게 넘겼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완드의 값은 마탑에서 충분히 보상하기로 했다.
나머지 물건들은 집사에게 맡겨 팔거나 보관하기로 했다. 왕실에서 욕심이 났는지 이런저런 제의를 했다고 했으나 그것은 이제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런 자질구레한 문제를 처리하고 가장 먼저 한 것은 슬라이트와 자칼을 지구로 집어넣은 것이다. 주변에 변이체가 전혀 없는 것을 확인한 대전에 둘을 던져놓았다.
이번에는 아주 오래 머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간이 숙소로 사용할 수 있는 텐트나 대량의 식량까지도 넣어줬다. 처음에는 둘도 좋아했다. 지구의 마나가 주는 효과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아주 오랫동안 준비해둔 지옥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단순히 대련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하네스 파벌에 속한 영지들을 돌며 강한 마수들을 잡아 지구에 넣어주었다.
일석이조라고 할까. 영지들은 마수가 사라지며 치안이 좋아져서 파벌의 충성도가 올라가고 슬라이트와 자칼은 훈련이 된다.
시도 때도 없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중급 이상의 마수들을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주 운 좋게 숨어있는 상급 마수를 찾아서 넣어줬을 때는 둘이 어찌나 기뻐하던지 비명을 마구 질러대었다.
결국 상급 마수를 처리한 것은 나였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실전 속에서 두 천재는 확실히 성장하고 있었다. 스승님도 둘의 고행에 동참하고 싶어 하시는 눈치였지만, 애들 노는 곳에 끼어드는 것이 눈치가 보이시는 것 같았고 스승님은 폴켄을 가르치는 것 말고도 요즘 꽤 바빴다.
하네스 파벌이긴 하지만, 나는 영지가 없는 몸이고 엄밀히 따지면 현재 가주는 스승님이다. 마그나가 동분서주하면서 일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중앙에서 무게를 잡아줘야 하는 것은 스승님이었다.
거기에 왕실을 오가며 하시는 일도 있어서 말년에 꽤나 바쁜 일정을 보내고 계셨다.
한동안 그렇게 슬라이트와 자칼을 굴리면서 나는 한국의 남부 탐험을 계속했다.
대구를 지나 포항과 울산 쪽으로 갔을 때는 아무것도 없는데도 위험감지가 강력히 경고했다. 이것이 뭔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그것이 방사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핵발전소가 폭발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었는데 역시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인류가 사라지고 이미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이 정도였다. 그쪽에 변이체가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방사능을 감수하며 갈 필요까진 느끼지 못해 그냥 지나쳤다.
그렇게 부산에 도착하니 역시 이곳에는 변이체가 남아있었다. 아마도 예전에는 해수욕장이었을 부산의 해변가에 거대한 변이체가 몸을 깔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기는 여태까지 내가 봤던 어떤 변이체보다 압도적이었다. 얼핏 봐도 200m는 훌쩍 넘어 보이는 압도적인 거체를 가진 부산의 변이체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다른 녀석들과 다르게 매우 느렸다.
그러나 굳이 빠를 필요가 없었는지 금방 알게 되었다. 놈은 마치 살찐 물개와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귀여움과는 아주 거리가 있었다. 단지 체형이 비슷할 뿐이었다.
녀석은 내가 근처에 다가가자 느릿하게 눈을 뜬 다음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진공청소기처럼 주위의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꽤 멀리서 비행을 하고 있었는데 그 흡입력으로 조금 빨려들어갈 정도였다. 이 녀석은 대량 살상에 특화된 녀석이었다.
크기가 작았을 때는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르겠으나 일단 저렇게 덩치가 커진 이후로는 적수가 없었을 것이다.
영역을 다투는 다른 변이체도 저 덩치로 깔아뭉개버리면 답이 없었을 테니까.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몇번의 시도에도 내가 빨려오지 않자. 녀석은 갑자기 꼬리로 바닥을 치며 뛰어올랐다.
상상 이상의 점프력이었다. 나도 깜짝 놀라서 급격히 회피 기동을 했다. 200m 가 넘는 살덩어리가 100m 이상 점프를 하면 어떻게 될까?
한번 뛰어올랐다가 땅에 떨어진 것만으로도 그 충격으로 작은 지진과 같은 진동이 일어났다. 정확히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수천톤이 넘어가는 질량 덩어리가 내는 힘은 이렇게 무서웠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놈은 대인전 그리고 나처럼 빠르게 날아다니는 상대로는 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다만 나로서도 원거리에서 치명상을 입힐 수단이 많지 않기에 조금 지루한 공방전이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결국은 내 승리였다.
흡입력이라는 별로 쓸모없을 것 같은 능력을 하나 추가하고 나는 다시 동쪽으로 이동해 전라남도 광주로 추정되는 곳에 도착했다. 이곳에도 변이체는 남아있었다.
내가 머물렀던 쉘터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사람이 많았지만, 유독 전라도 방면에서 오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들었던 정보도 많지 않았는데 들리는 말로는 전라도 쪽은 의외로 피해가 크지 않다고 했었다. 내가 만났던 전라도 방면의 생존자들은 변이체에게 쫓긴 것이 아니라 생존자끼리의 경쟁에서 밀려 올라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광주에 도착하니 그 흔적이 보였다. 이제는 정말 잔해만이 남아있었지만, 컨테이너와 시멘트 등으로 쌓아 올렸을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성채였을 것으로 보이는 쉘터의 흔적이 보였다.
전라도 최대 도시에 저런 대형쉘터가 존재했다면 생존자들이 멀리 도망칠 이유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결론적으로는 모두 죽었으니 실패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이 원흉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거대 쉘터를 부수고 생존자들을 죽였을 광주의 변이체가 그 대형 쉘터의 잔해 위에서 눈을 떴다.
광주의 변이체는 의외로 대형 종이 아니었다. 그리고 돌개미나 피라니아처럼 어딘가 숨어서 동면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사람과 비슷한 덩치와 신체 구조를 가진 녀석은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돌무더기 위에 앉아있다가 상공에서 비행하고 있는 나를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본 녀석의 얼굴은 아무것도 없었다. 눈코입이 없는 미끈한 얼굴에 내가 신기함을 느끼고 있을 때 녀석의 머리가 전구처럼 밝게 빛났다.
그리고 순간 강렬하게 느껴지는 위험신호에 몸을 비틀었지만 이미 늦었고 그런 나를 지켜준 것은 아스트로퍼였다.
파앙!
어느새 방패로 변한 아스트로퍼가 녀석이 쏘아낸 무언가를 막아내었다.
“고마워 아스트로퍼, 그런데 이게 뭐지? 레이저?”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녀석의 머리가 밝게 빛난다고 느낀 순간 그곳에서 마치 레이저와 같은 빛줄기가 쏘아졌다.
그 위력도 만만치 않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레이저를 막아낸 아스트로퍼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통으로 막았다면 나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이걸 생존자들이 어떻게 막겠는가? 컨테이너와 시멘트로 만든 성벽 따위 이런 레이저 몇발만 쐈어도 그냥 뚫려버렸을 것이다.
전투 능력이 높은 생존자들이라고 해도 이런 것을 막는 것은 어림도 없다. 비행 능력으로는 피하지 못한다. 나는 전속력으로 지상으로 낙하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몇발이 계속 쏘아졌고 정확하게 아스트로퍼를 강타했다.
아스트로퍼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공격을 막아낼 때마다 마나가 뭉텅이로 빨려 나간다. 그러나 그사이에 지상에 착지하는 것은 성공했다.
“아스트로퍼 수고했어.”
아스트로퍼는 말없이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시뻘겋게 달궈졌던 아스트로퍼가 손목으로 돌아가며 맞닿은 살이 고기 익는 소리와 냄새를 풍기기 시작하며 알싸한 고통도 함께 찾아왔다. 동시에 재생력이 발동해 열심히 일을 시작했다.
눈도 없는 놈이지만 녀석이 나에게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양손을 나에게 향했다.
‘아, 거기 계셨구만?’
양 손바닥에 흉측한 모양의 눈코입이 모여있었다. 놈도 변이체이니 당연히 사람을 잡아먹었을 터 다른 것은 몰라도 입이 없을 수는 없었다.
손바닥에 달린 코가 씰룩거리는 것을 보니 내 팔목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꽤 자극적이었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고기 냄새 맡으니 미칠 것 같냐?”
녀석은 동방예의지국의 변이체답게 예의 바르게도 밝은 레이저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