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84화 (184/206)

183. 두번째 생존자

마침내 도착한 제주도였지만, 이곳의 풍경도 내륙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아무 것도 없는 끝없는 벌판 위에 세상을 뒤집어버린 폭풍 속에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고목들이 아직 지구는 완전히 생명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 초록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외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아마도 제주도를 지배했던 변이체는 조금 전 만났던 까치였을 것이다.

조금 막막하긴 했다. 제주도도 결코 좁은 땅이 아니다. 이곳에서 그 사람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기억을 읽고 단서를 얻자마자 제주로 곧바로 오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 사람이 아직 제주도에 남아있다는 확신이 없었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폭풍 속에서 흔적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곳을 중점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물이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탐색을 시작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삼타수라고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마셔봤을 그것이 솟아나오는 곳이 아니던가.

기왕 온 김에 수원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한번 마셔봤다. 인간이 사라진지 수십년, 청정자연 제주의 진짜 삼타수의 맛은 특별할것 없는 그냥 물이었다.

기대를 너무 했던 것일까. 솔직히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렇게 물길을 따라 탐색을 했지만, 역시 사람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려웠다.

기대는 했지만, 큰 실망은 없었다. 수십명도 아니고 사람 한명이 살았던 흔적을 그 지독했던 폭풍 뒤에 찾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제주도에 가봐야겠군.”

기억 속에서 그 사람이 했던 말은 이 한마디였다. 이곳에 그냥 들렀다가 떠났을 수도 있고 어쩌면 바다를 건너오는 중에 해양 변이체에게 당했을 지도 모른고 어쩌면 제주도에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제주도에 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제주도의 주인이었던 까치가 살아있었다. 까치의 눈을 피했을 가능성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까치가 나를 감지했던 거리를 생각하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물길을 따라 탐색하던 것을 멈추고 한라산 정상의 백록담에 들러 풍경을 감상했다. 내가 기억하는 그런 풍경은 아니지만 여전히 절경이기는 했다.

전생에 와보지 못한 곳을 이제와서 관광하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된 것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세계여행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구 어딘가에 있을 광검제도 그런 생각을 하고 세계여행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광검제는 또 다른 세상의 나이니 생각하는 것이 비슷하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백록담 주위를 느릿하게 걷다가 자리를 잡고 식사준비를 시작했다. 한라산 정상의 백록담에서 불을 피우고 밥을 차려먹는다니 예전 같았으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호사였다.

빠른 에너지 보충을 위해서 사탕을 먹긴 하지만 그것도 자주 먹다보니 질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먹는 것에 둔감한 나라고 해도 기왕이면 제대로 된 요리를 먹는 것이 좋다.

불을 피우고 각종 도구를 꺼내 요리를 시작했다. 요리라기 보다는 이미 준비가 다 된 재료를 넣고 끓이는 수준이다. 밀키트라고 해야할까. 나름 궁리 끝에 만들어낸 방법이다.

지금도 대전의 어딘가에서 열심히 수련하고 있을 슬라이트와 자칼도 이렇게 끼니를 떼우고 있을 터였다.

간단하게 완성된 스튜와 스프의 중간쯤 되는 무언가를 떠먹었다. 물 조절에 실패한 모양이다. 그래도 내가 직접 만들었다면 요리라고 부를 수 없는 영양소 덩어리가 되었을테니 그것보다는 훨씬 낫다.

섭식강화 덕분에 먹는 것이 에너지로 전환되는 비율이 훨씬 좋아져서 그런지 먹자마자 힘이 솟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천천히 배를 채우면서 백록담 구경을 하고 있을 때 뭔가 이상한 것이 감지되었다.

진화된 초감각은 내가 딱히 생각하지 않아도 광범위한 지역을 탐지하고 있었는데 백록담 수중 깊은 곳에서 자연적이지 않은 것이 느껴졌다.

변이체는 아니었고 살아있는 생명체도 당연히 아니었다. 그랬다면 근처에 있을 때 곧바로 느껴졌을 것이다.

대격변이 오기 전에 백록담에 뭔가 인공구조물 같은 것을 설치했던가? 기억에는 없다. 그런 사업이 있었다면 꽤 큰 화제가 되었을 것이다.

식사를 끝낸 나는 날아올라 무언가가 느껴졌던 백록담을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보니 백록담은 천지와 다르게 엄청나게 깊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은 적어도 수십미터 정도는 되는 느낌이다. 그래도 워낙 물이 맑다보니 바닥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그리고 내가 찾던 것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공중에서 백록담으로 다이빙 하듯이 뛰어들었다. 수중 호흡 능력이 있으니 물속에서 이동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백록담 중앙의 물속 깊은 곳에서 내가 찼던 그 사람을 찾았다. 기억 속에서 봤던 그 사람은 살아있지 않았다. 나는 유해를 수습해서 물 위로 올라왔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물에 불어있는 상태였지만, 이 유해가 다른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여러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알기로는 광검제와 부교주 그리고 이 사람 뿐이다. 외모는 확인할 수 없지만, 옷과 유품등으로 생각할 때 이 사람이 맞을 것이다.

“누구십니까?”

유해를 앞에 놓고 물었다. 공허한 질문이었다. 이름조차 모르는 이 사람은 어떻게 왜 지구에 와서 이렇게 죽었을까.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대답해줄 물건들은 있었다. 유해의 옆에 이 사람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물건들이 꽤 많이 나뒹굴고 있어서 모두 수습해왔다.

입고 있던 옷을 보면 아노더스에서 일반적으로 입는 옷은 아니다. 내가 모르는 지방의 어딘가에서 입는 옷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여태까지 이런 복식의 옷을 본적이 없다.

지난번 녹아버린 검 외에도 여분을 가지고 있었는지 검집에도 검이 두개나 꽂혀 있었는데 손잡이에 내가 모르는 문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이 사람이 온 곳은 다른 세계다.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지구로 넘어와서 죽었을까.

여러 개의 유품을 앞에 늘어 놓고 어떤 것의 기억을 읽을지를 고민했다. 늘어놓고 보니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꽤 많았다.

그중 내가 가장 먼저 고른 것은 원래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수첩으로 추정되는 것이었다. 이미 가운데 종이는 이미 다 녹아서 사라졌고 가죽으로 된 커버만이 남아있었다.

수첩 커버의 기억을 읽었다. 수첩에 무언가를 쓰고 있는 사내가 보인다. 지난 번 검의 기억에서 읽었던 것보다는 훨씬 젊다 못해 앳되어보였다.

“개같은 변이체 새끼들”

곱상한 외모였지만 입에선 거친 욕이 튀어나왔다. 지난번 검의 기억을 읽었을 때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그때는 이 사람이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그냥 넘어간 것인데 이 사람은 분명히 한국어를 하고 있었다.

사내가 수첩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을 때 바깥에서 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비명 그리고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나보고 이 X같은 일을 또 당하라고? 두번째로 오래 살아남은 생존자라며? 그럼 평화로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게 해줬어야지!”

사내는 거칠게 불평했지만, 손은 멈추지 않고 무언가를 계속 적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많은 정보를 얻었다.

나는 전생에 죽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궁금한 것이 있었다. 내가 마지막 생존자라면 두번째로 오래 살아남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사람은 언제까지 살았을까?

놀랍게도 두번째로 오래살아 남은 생존자도 한국인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다른 세계에서 태어났던 모양이다. 그리고 상황을 보니 저 세계에도 다시 대격변이 일어난것 같았다.

마왕이 참 필요 이상으로 열심히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몇개의 세계를 멸망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후로 말없이 사내가 급하게 무언가를 적고 있을 때 큰소리와 함께 문이 부숴지듯 열리며 흉측하게 생긴 변이체가 얼굴을 내밀었다.

기억은 거기서 끝났다. 다른 것을 더 볼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정보를 얻었다.

나는 이 사람이 광검제처럼 다른 세계의 나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그럼 세번째로 오래 살아남은 사람도 어딘가에서 다시 태어났을까?

물론 이 사람이 어떻게 다시 지구로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고 왜 백록담에서 시체가 되어있는지도 아직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남아있는 유품의 기억을 계속 읽어보면 실마리라도 알아낼 수 있을테니 일단 이곳에서 할 일은 끝났다.

나는 한라산 정상의 양지바른 곳에 이름 모를 사내를 묻어주고 날아올랐다. 제주에서 할 일은 이제 끝났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대전으로 돌아가 슬라이트와 자카를 조금 괴롭혀주고 보급도 챙겨준 뒤 위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사람이 많은 곳은 서울과 인근의 수도권이다. 대구, 부산 같은 지방대도시에도 사람이 많이 살았지만, 서울과 감히 비교할 수는 없다. 그리고 변이체는 사람이 많이 살았던 곳일 수록 강한 녀석이 자리를 잡았다.

어쩌면 서울에 남아있는 변이체는 나보다 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전에 도착하니 거지꼴이 되어있는 둘이 보였다. 물도 제법 많이 챙겨왔을텐데 왜 저런 꼴이 되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슬라이트와 자칼은 수십년만에 가족이라도 만난 것처럼 나를 반겼다.

“왜 이제 오는거냐!”

“기다렸다고 젠장!”

자칼이 큰소리로 욕을 할 정도로 반가웠던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둘의 분위기가 좀 바뀌었다.

“오? 승급했나?”

이 미친 천재놈들이 그 사이에 승급을 했다. 둘 다 7성 기사가 된 것이다. 이 정도면 앞으로 10년 후에는 진짜 초월급에도 오르는것 아닌가?

“승급했나? 겨우 그거냐?”

슬라이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고했다.”

“으아아악!”

슬라이트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승급하면서 뇌를 다친거냐? 간혹 그런 경우가 있다고 듣긴 했는데”

“아니야! 이 인간같지도 않은 놈!”

이 녀석은 나에게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깜짝 놀라면서 난리법석을 떨어주기를 원했던 것일까? 그보다 인간 같지 않은 놈이라니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을 했다.

“그럼 승급한 기념으로 한번 붙어보자.”

“아니 그건 좀···.”

“해보자.”

“잘못했다.”

“알았으니까, 해보자.”

금세 정신을 차린 것 같지만, 어차피 지구에 있는 한 나에게서 도망칠 방법은 없다.

“저기...슬라이트만 하면 되는거지?”

자칼도 원래 성격이 돌아왔는지 다시 소심해져서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아니 둘 다”

어림도 없지 어딜 혼자서 빠질려고.

나는 이미 슈바르거트를 꺼내고 있었다.

그렇게 반강제로 대련을 해서 7성의 경지에 오른 둘의 자만심을 치료해주었다. 나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으나 둘은 몸에 상처를 입었으니 이것으로 비겼다고 할까.

“어쨌든 한번 돌아가긴 해야겠군.”

원래는 다시 이곳에 방치 한 후에 수도권을 정리하려고 했었는데 둘이 7성 기사가 된 것은 나라의 경사에 가까운 일이라 아노더스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통로를 열고 둘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자. 난리가 났다. 누구보다 먼저 감지하고 달려온 것은 역시 스승님이었다.

제자는 아니었지만, 둘의 성장을 가까이서 지켜본 스승님이기 때문에 매우 기뻐하셨고 마법 통신과 전령으로 둘이 승급한 사실은 빠르게 알려졌다.

나는 곧바로 다시 지구로 돌아가려 했으나 생각보다 일이 커지는 바람에 당장은 수도권 정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9성의 경지에 오른 것은 조금 간소하게 넘어간 측면이 있었다. 승급을 한 곳이 타국이었고 그곳에 꽤 오래 체류하다가 넘어왔기에 라이브러쉬 왕국에서는 축하할 타이밍을 놓쳤다고 해야할까?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리고 둘의 신분도 그렇다. 왕국 최고의 명문가의 막내아들과 북방 사령관의 적자다.

에인프라흐 공작과 슬라이트의 큰형인 슬레이프 백작이 하루가 지나기 전에 찾아왔고 왕실에서도 왕세자가 찾아와 축하를 건넸다.

슬라이트가 원했던 축하를 질리도록 받을 일이 생긴 것이다. 자칼의 경우에도 큰누나인 비올라가 비행선을 끌고 날아와 자칼을 아기새처럼 품에 안고 다니며 물고 빨아주었다.

왕실에서는 대대적으로 이를 알리며 큰 축하연을 열었다. 그후로 공작가와 후작가에서도 연이어서 왕도에서 축하연을 열며 나도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따라다닐 수도 없었다.

물론 나는 주인공이 아니었기에 조금 뒤로 물러나 있었지만, 슬라이트와 자칼은 7성 기사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릴 정도로 시달리며 나를 찾아와 제발 다시 지구로 보내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축제가 끝나자 찾아온 것은 이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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