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87화 (187/206)

186. 여왕과의 거래

“이렇게 먹어도 되는 겁니까?”

엘프에게 어머니의 나무라는 것은 그냥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다. 정말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화도 나누고 사람처럼 보여도 엄밀히 따지면 엘프는 동물이 아닌 식물이다. 어머니 나무에서 태어나는 열매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괜찮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분이니.”

나야 상관없지만, 엘프 입장에서 보면 부모님의 머리카락으로 차를 우려먹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 어쨌든 맛과 효과는 굉장했다.

“이런 귀한 것을 내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굉장한 차... 라고 해야 할까요?”

“귀하긴 하다. 50년에 한 잔쯤 나오는 것이니”

“쿨럭!”

마시던 차가 목에 걸렸다. 이것이 엘프의 화법? 인간과는 좀 다른 것 같다.

“그것을 마시면 정령과 좀 더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렇군요. 그렇지만 지금 저는 정령과 계약하지 않는 것이 정령에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건 무슨 말이냐?”

나는 간단하게 지구로 이어지는 통로와 뮤어 아이번이 지구에 머물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의 이야기에 엘프 여왕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정확히는 표정이 없으니 놀랐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흥미로운 이야기로구나. 나도 그곳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

그래도 아주 감정이 없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잠깐이라면 괜찮지 않겠느냐?”

나는 통로를 열었다. 여왕은 반응이 없었다. 아무리 초월자라고 해도 특별한 존재가 아니고선 통로를 볼 수는 없는 것 같았다.

“그럼 손을 잠깐 주시겠습니까?”

나는 일어나서 여왕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여왕이 다시 나를 바 선생 보듯이 한다.

“저와 닿아있어야. 통로를 지날 수 있습니다. 진짜입니다.”

“거짓은 아니군.”

하지만 여전히 바 선생을 보는듯한 눈빛은 바뀌지 않았다. 엘프는 전부 인간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여왕만 이런 것일까? 전자라면 인간과 엘프가 사이좋게 지내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이 아니라고 해도 사이좋게 지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엘프 여왕이 결계 아닌 결계를 만들고 엘프의 숲에 발을 들이는 인간을 모두 쳐 죽인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니까.

내가 내민 손 위에 엘프 여왕의 손이 살포시 포개졌다. 여왕의 표정이 변했다. 마치 바 선생을 눌러 죽인 휴지를 들어 올리는 스무살 여대생의 표정이다.

여왕의 손이라고 해서 뭐 엄청나게 부드럽거나 그런 느낌이 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손 위에 나뭇잎 한장이 올라간 느낌이랄까.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나는 그 상태로 엘프 여왕과 함께 지구로 들어섰다. 들어간 곳은 슬라이트와 자칼을 데리고 나왔던 대전이었다.

“큿!”

들어서자마자 여왕에게서 반응이 왔다. 뮤어 아이번처럼 거부반응이 온 것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이곳은 정말 지독한 곳이구나.”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여왕은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엘프의 눈으로 볼 때 황폐화된 지구는 지옥과 같을 것이다.

“마왕이 저지른 일입니다. 우리 세상도 용사님들이 마왕을 물리치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었겠지요.”

슬쩍 운을 띄웠다. 이런 식으로 유도해서 교주가 몸을 회복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때 여왕의 힘을 빌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지르크가 정말 대단한 일을 했지.”

광검제의 이름이다. 여왕의 얼굴에 한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어깨도 조금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마치 친구 자랑을 하면서 으쓱거리는 어린 아이의 느낌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급격히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이제는 그이가 없구나”

“음?”

설마 엘프 여왕도 광검제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그런 촉이 왔다.

“왜 그러느냐?”

“광검제···. 아니 지르크 폰 가이스트님은 이곳에 계십니다.”

“뭐라?”

그렇지 않아도 큰 여왕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지르크 폰 가이스트님은 살아계십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 계시지요. 저도 그분을 찾고 있습니다.”

“그게 정말이더냐?”

“제가 거짓을 말하는지 아닌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여왕의 동공이 격렬히 흔들렸다. 그리고 두 눈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엘프는 사람이 아니라 식물이니 저것은 눈물이 아니라 진짜 즙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녹즙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내 당장 그이를 찾으리라!”

여왕의 기세가 폭발하듯이 터져 나왔다. 가까이에 있던 나는 그것을 그대로 맞고 뒤로 나뒹굴었다. 그래도 순간적으로 막아낸 터라 피해가 크진 않았지만, 눌러왔던 기세를 풀어낸 것만으로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전에 던전 안에서 만난 광검제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게 진짜 초월자의 힘?’

힘을 풀어낸 여왕의 주위로 회색빛 지구에 초록이 찾아왔다. 아무것도 없던 땅에서 초록색의 작은 새싹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기적처럼 보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폭발적으로 뿜어내던 여왕의 힘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백옥 같았던 여왕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누렇게 변하기 시작했다.

뮤어 아이번이 그랬듯이 엘프 여왕도 지구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분하구나!”

여왕이 정말 원통했는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분통을 터트렸다.

“일단 돌아가시지요.”

나는 그런 여왕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여왕이 아무리 초월자라고 한들 이대로 놔둔다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여왕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여왕을 데리고 다시 엘프의 숲으로 돌아오자 주변에 꽤 많은 사람 아니 엘프가 모여있었다. 딱 봐도 엘프 중에서 군인 역할을 하는 것처럼 목검과 활로 무장한 엘프들 수백명이 통로에서 나오는 나에게 활을 겨누었다.

“네 이놈!”

그중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엘프가 목검을 뽑아 들며 나에게 분노한 얼굴로 호통을 쳤다. 엘프 노인은 8성 정도의 경지로 보였다. 아마도 여왕을 제외한다면 엘프 중에서 가장 실력자일 것이다.

그 외에 나를 둘러싼 수백의 엘프 중에서도 7성급으로 보이는 엘프가 듬성듬성 섞여 있었다. 굉장한 전력이다.

엘프의 숲 밖으로 나와 싸우더라도 이 정도면 나를 제외한 라이브러쉬 왕국의 전력에 쉽게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굳이 그것에 반응하지 않았다. 바로 뒤에 내 손을 잡고 따라 나오는 여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무기를 거두어라.”

여왕이 곧바로 명령을 내리자 일제히 엘프들이 무기를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내 손을 빠져나온 여왕은 아까 그 자리로 돌아가 앉아서 숨을 골랐다. 지구에서 어지간히 괴로웠던 모양이다.

누렇게 변했던 여왕의 안색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할 때까지 나는 말없이 기다렸다. 다른 엘프들은 뒤로 물러나 다시 숲과 동화되었지만, 노인을 비롯한 가장 경지가 높게 느껴지는 몇 명은 여전히 근처에 남아 나에게 강렬한 적의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여왕이 손짓하자 그들은 분한 표정으로 숲 안으로 흡수되듯이 사라졌다.

“네 이야기를 들어봐야겠구나. 그이가 그곳에 있는 것은 어떻게 알았느냐?”

나는 통로 능력을 얻은 것부터 해서 광검제의 쪽지를 받았던 것 그리고 제멜아크 왕국의 던전 안에서 만난 광검제와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렇군. 그렇게 된 것이었군.”

이야기를 들은 여왕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나는 그저 조용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장고에 들어갔던 여왕이 고개를 들어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곳에 생명을 되살릴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는 것이냐?”

여왕은 당장이라도 다시 지구에 들어가서 광검제를 찾을 생각처럼 보였다.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에게 받았던 아티팩트 그것은 스테이시에게 맡겨놓았지만, 연구가 얼마나 진행된 것인지 들은 바가 없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마법에 있어서 가장 천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겨 놓았습니다.”

“그렇군.”

여왕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무표정으로 일관할 때와는 다르게 표정이 살아난 여왕은 더욱 절대적인 미를 뿜어내고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흔들릴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나도 여왕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중국의 고대 미인 중에 인상을 찡그리는 모습이 아름다웠다던 미인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만약 내가 여왕의 모습을 본 후에 암테일 영지에 있었던 던전의 색욕의 시험을 쳤다면 당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브 공주와 스테이시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 세상에 환생해서 가장 미인이 그들이라서 살았다.

“너도 그이를 찾고 있다고?”

“예, 그렇습니다.”

“최대한 빨리 찾아라. 그리고 나를 그이에게 데려가 주어야 한다.”

광검제를 찾는 것은 원래도 할 일이었지만, 여왕을 데려가 주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거래를 시도해야 한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나.

지금은 내가 갑이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오직 나만이 줄 수 있다.

“대가로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엘프 여왕이 이빨이 보이도록 웃었다. 예쁜 것은 둘째치고 안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저러니까. 조금 무섭다.

“무엇을 원하느냐?”

“마왕이 다시 나타났을 때 함께 싸워주십시오.”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거래를 여왕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가하다.”

곧바로 거절당했다. 아니 왜?

“왜입니까?”

마왕이 이기면 어떤 세상이 되는 것인지 방금 보여주지 않았는가? 마왕이 세상을 멸망시킬 때 엘프라고 봐주진 않을 것이다.

“그런 맹약을 걸었다.”

설마 교주와 맹약을 맺은 건가? 엘프들을 건드리지 않는 조건으로 참전을 막은 건가? 내가 한발 아니 여러 발 늦었는지도 모르겠다.

“설마 마왕 쪽입니까?”

“그것은 절대 아니다.”

그럼 누가 왜 어째서? 아니 엘프 여왕에게 그런 맹약을 강요할 정도의 존재가 있긴 한 건가?

“나는 너희를 도울 수 없다. 허나 다른 엘프들은 상관없다.”

그것은 나름 좋은 소식이었지만, 방금 다른 엘프들의 태도를 보면 절대 인간과 힘을 합쳐 변이체들과 싸울 것 같진 않았다.

“누구와 맹약을 맺은 것인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누구인지 모를 그 사람을 찾아서 죽여버리던가. 맹약을 깨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다. 마왕은 어중간한 강함을 가진 다수로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소수 정예가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엘프 여왕 이시리엘 이상의 존재는 없었다.

“불가하다.”

엘프 여왕의 대답은 단호했다. 더 이상 묻는다고 해도 대답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럼 다른 엘프들은 함께 마왕과 싸울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들의 뜻에 달렸다. 나는 그들에게 명령하지 않을 것이다.”

여왕의 명령이 아니라면 방금 그들이 적극적으로 엘프의 숲 밖으로 나와서 싸울 확률은 엘프가 숲에 불을 지를 확률 정도일 것이다. 제길, 그럼 얻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군요.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어딜가는 것이냐?”

“대화도 끝났고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아직 거래가 끝나지 않았다.”

“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여왕님의 힘이었습니다.”

나는 엘프에 대해 잘 모르지만, 내가 엘프에게서 얻을 수 있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이를 찾거라.”

“지르크님을 찾기는 할 겁니다.”

“그리고 나를 그이에게 보내다오.”

“거래가 될만한 것을 제시해주십시오.”

“부탁이다.”

여왕이 눈물이 그렁거리는 얼굴로 애원했다.

아, 이 아줌마···. 아니 나이로 볼 땐 고조의 고조할머니쯤 되는 엘프가 날로 먹으려고 한다. 저런 얼굴로 부탁을 하면 세상 대부분의 남자는 넘어가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거래는 거래입니다.”

“칫!”

응? 방금 내가 뭘 본거지?

여왕의 입에서 나온 이상한 소리는 둘째치고 애원하던 여왕의 얼굴이 처음처럼 무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역시 저것은 수백 년이나 묵은 나무 요괴였다.

“그럼 이것은 어떠한가?”

여왕이 가슴팍으로 손을 넣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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