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어머니 나무의 도움
엘프 여왕이 가슴팍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는 모습은 참 이질적이었다.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여태까지 본 고고하고 아름다운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어디보자···. 그래 여기 있구나.”
여왕이 물론 아름답기는 하지만, 여왕의 가슴이 그렇게 뭔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크기가 구조를 가진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여왕은 굉장히 어렵게 물건을 찾는 시늉을 했다.
“네놈, 굉장히 불손한 생각을 한 것 같구나.”
여왕이 도끼눈을 떴다. 거짓말이 아니라 생각까지 알아보는 건가?
“죄송합니다.”
일단 거짓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닌 것은 확실하니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자, 받거라.”
여왕이 굉장히 힘든 척을 하며 가슴팍에서 꺼낸 것은 아주 작은 나무상자였다. 상자가 굉장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인간 세상에도 엘프가 만든 물건들이 귀중품이나 희귀 물품으로서 거래가 되진 하지만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주 드물게 활은 그런 물건이 있기는 하다. 엘프에게 있어서 활은 분신과 같은 물건이기에 드물게 조각이나 문양 같은 것을 새겨넣은 것도 있다. 그런 것들은 굉장한 고가에 거래가 되고는 한다.
엘프가 손재주가 없는 것이 아니다. 활에 새겨진 조각이나 문양을 보면 어지간한 장인들은 따라 할 수도 없을 만큼 정밀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활을 제외한 다른 물건들은 아니다. 애초에 고급 재료를 쓰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 작은 상자는 흰색의 아주 고급 나무를 사용했으며 각진 부분 하나도 없이 미려한 마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외부에 매우 정밀하고 아름다운 무늬까지 새겨져 있었다.
이 상자의 가치만 해도 엄청날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엘프 여왕이 가슴에 품고 다닌 상자라고 하면 억만금을 주더라도 사려는 인간들이 널렸을 것이다.
상자를 받아든 나는 여왕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게 뭔데요?
“열어보거라.”
혹시나 이 비싼 상자가 망가질까 봐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 새빨간 보석 같은 것이 하나 들어있었다.
“이게 뭡니까?”
“어머니 나무의 열매다.”
그럼 이거 엘프의 시점에서 보면 아이가 아닌가? 아니 나무에서 떨어진 것이니···. 갑자기 굉장한 죄를 지은 기분이 든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열매와는 다른 것이다.”
열매도 종류가 있는 것인가? 워낙 엘프에 관한 정보가 외부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그런 내부의 정보까지야 내가 알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이걸 왜 저에게 주시는 겁니까?”
“먹는 것이다.”
“무슨 효능이 있습니까?”
“아주 좋다.”
다시 나왔다. 엘프식 화법, 무슨 정력제 장사도 아니고 그냥 좋다고 하면 끝나는 건가?
“조금 구체적인 효과는 없습니까?”
“아주 귀한 것이다.”
“효과는요?”
“어머니께서 몇백년에 하나 내려주실까 말까 한 정도로 귀한 선물이지.”
귀한 물건인 것은 알겠는데 효과는요?
“내가 그것을 400년 전쯤에 실수로 먹었다. 그리고 너희 인간들이 말하는 초월의 영역에 닿을 수 있었지.”
생각 이상의 효과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이 열매를 먹는다고 초월급에 이를 수 있다면 왜 엘프 중에서 여왕만이 초월급일까.
“부작용도 있습니까?”
“있다. 내가 효과를 본 후로 그것을 먹은 이가 네명이다. 그리고 셋은 어머니의 곁으로 돌아갔지.”
죽었다는 말이겠지?
“다른 한 명은요?”
“지르크였다.”
이것은 조금 생각을 해봐야 하는 문제다. 여왕까지 포함하면 다섯 명이 먹어서 셋이 죽고 둘은 초월자가 되었으니 60퍼센트의 확률로 죽고 40퍼센트의 확률로 초월자가 된다.
확률상으로 보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도박이지만, 이게 대량으로 있다면 무조건 먹겠다는 인간이 숱할 것이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그리고 나도 인간이다.
“거래가 체결되었습니다.”
여왕이 흐드러지게 웃었다.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흐드러지게 웃는다는 표현이 저렇게 어울리는 존재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정도로 여왕은 기뻐했다. 여왕이 웃을 때 숲 전체가 함께 즐거워하는 느낌이 들었다.
열매에 대해 이것저것 조언을 듣고 나는 엘프의 숲을 빠져나왔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눌 때 여왕이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너는 그이와 닮았구나?”
눈치가 좋다고 해야 할까. 광검제는 또 다른 세상의 나다. 닮은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습니까?”
“그래, 생긴 것은 다르지만 비슷한 냄새가 난다.”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청결한 사람이다.
“그럼 이만 다음에 뵐 때는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도록 하지요.”
나도 하루빨리 광검제를 찾았으면 좋겠다. 광검제를 찾아서 이 세상으로 다시 데려온다면 내가 고생할 필요도 없다. 그냥 마왕도 두 번이나 막아낸 사람인데 마왕의 강림체 정도는 준비운동 수준일 것이다.
나는 엘프의 숲을 떠났다. 들어갈 때는 걸어 들어갔지만, 나올 때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비행 능력을 사용했다.
에르하트 후작성으로 이번에는 진짜 아무에게도 걸리지 않게 돌아온 나는 후작과 자칼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에너지를 조금 많이 소비하기는 하지만, 비행선을 타는 것보다 직접 비행을 하는 것이 훨씬 빠르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며칠 사이 쌓인 일을 처리한 뒤 스승님과 상의 후 다시 외부 활동 중지를 선언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당연히 엘프 여왕에게 받은 어머니 나무의 열매를 섭취하는 일이었다. 지구로 들어가 새빨간 보석 같은 작은 열매를 손에 들었다.
이것을 먹으면 초월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여왕에게 듣기로 가능성을 높여줄 뿐 무조건 초월에 오를 수 있게 해주는 그런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 정도야 당연히 예상했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이와 비슷한 것을 먹은 적이 있다. 아렌 세인티아의 정수, 과거의 용사를 통째로 응축한 기분 나쁜 무언가를 먹고 무려 두 계단이나 경지가 올랐으며 동시에 알 수 없는 상위의 존재를 만나 용사가 되었다.
그래도 희망적인 요소가 있다면 광검제도 이것을 먹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제 섭식 강화라는 먹는 것을 잘 소화시켜주는 능력이 있다.
이것을 먹고 어머니의 곁으로 돌아간 엘프 셋은 모두 몸 안에서 폭발하는 마력을 통제하지 못했다고 했다. 경지가 낮은 사람이 지나치게 뛰어난 영약을 먹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그렇다면 나는 괜찮지 않을까?
열매를 먹기 전에 한가지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열매의 기억을 읽었다. 절대로 여왕의 가슴팍에 대한 기억 같은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분명 엄청난 미인이지만 그곳은 평범한 수준이다. 그리고 애초에 인간도 아니다.
내가 기대한 것은 열매에 깃든 어머니 나무의 기억이었다. 엘프들의 어머니 나무는 그 자체로 초월적인 존재였다. 세상에 어떤 나무가 열매로 사람처럼 생긴 아인종을 낳는다는 말인가.
그리고 초월에 닿을 수 있는 열매를 몇백년에 한 개라고 하지만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었다.
열매를 든 손에 집중하자 열매에 대한 기억이 보였다. 열매가 아직 어머니 나무라는 곳에 매달려있었던 시절이었던 모양이다.
어머니 나무로 추정되는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열매는 어머니 나무의 거의 꼭대기 부근에 있는 작은 가지에 매달려있었다.
-들리나요?
소리는 아니지만, 머릿속에 전달이 된다. 설마 나에게 말하는 건가?
-당신에게 하는 말이 맞습니다. 빅터 하네스 아니면 강한수라고 불러줄까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나는 분명히 과거의 기억을 보고 있는데 지금 저 존재는 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두렵지 않다. 놀라울 뿐이다. 역시 내 예상대로 어머니 나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초월급의 존재였다. 그런데 어머니 나무는 왜 나에게 이런 방식으로 말을 걸었을까?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당신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서 그런 것이니까요.
무상의 도움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무상은 아니지요. 당신은 이 세계를 지키지 못하면 나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요.
어머니 나무의 도움이라니 이건 어쩌면 엘프 여왕의 도움보다 대단한 것 아닌가? 아니 그냥 여왕에게 저를 도우라고 한마디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시리엘은 맹약 때문에 당신을 도울 수 없답니다.
설마 맹약을 맺은 것이 어머니 나무?
-아닙니다. 저같은 것은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분이지요.
설마 10년과 관계된?
-맞습니다.
설마 했는데 대충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나에게 10년의 시간을 주기 위해 교주에게 타격을 가한 대신 여왕이 움직이지 못하게 맹약을 맺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야기가 완성된다. 무슨 연금술사도 아니고 등가교환의 법칙을 꼭 따를 필요가 있나?
-인과는 그분이라고 할지라도 쉬이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도 좋은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도움을 주시렵니까?
-그 세계의 중심을 찾아가세요. 그곳에 당신이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구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구의 중심? 그게 어디지? 애초에 구체 형태의 어디가 중심이라는 말인가?
-그것은 저도 알 수 없지요. 저는 그곳에 가본 적이 없는걸요.
이게 도움인지 아닌지 조금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매를 드실 때는 꼭···.
기억이 끝나버렸다. 사람을 화나게 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이걸 내가 식물에게 당할 줄은 몰랐다. 이렇게 사람을 화나게 할 수 있는 식물이라니 과연 초월급 나무다.
그런데 지구의 중심이란 어디일까? 잘 생각해보면 이 넓은 지구에서 탐색할 부분을 꽤 줄여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적도 부근을 말하는 것일까? 지구를 한 바퀴 돌아야 한다. 아니면 남극점이나 북극점일 수도 있다. 혹은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던 어떤 민족의 땅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칭 대국이라던 그 나라는 광활한 영토와 그 많은 인구를 가지고도 대한민국보다 빨리 멸망했다. 오히려 그것이 크게 작용했다.
변이체라는 것은 사람이 많은 곳에 더 많이 나타났고 사람을 많이 잡아먹을수록 더 강해졌다. 그 나라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북경의 변이체는 얼마나 대단한 놈이 있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이제 열매를 먹을 시간이다. 어차피 설명도 못 들었으니 나는 가볍게 열매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손에 닿는 감촉으로는 꽤 딱딱한 것 같았는데 열매는 입 안에 넣자마자 무슨 소설 속의 영약처럼 녹아서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렸다. 순간 열매가 닿았던 입 안과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그윽한 향이 정신을 흔들었다.
내가 만들었던 영약과 달리 이것은 무척이나 맛있고 향이 대단했다. 어머니 나무의 잎으로 만들었다던 차를 농축한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맛과 향만 느껴지더니 점점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몇번이나 경험했던 영약을 먹었을 때의 증상이 똑같이 나타났다.
마나홀과 오러홀이 순식간에 꽉 차오르며 터질 듯이 부풀었다. 마나와 오러의 운용은 이제 나도 꽤 괜찮게 할 수 있다. 아직도 정밀안 운용은 스승님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내가 깨달았던 남들보다 몇 배는 빨리 순환시킬 수 있는 구조의 심법은 이 위기를 충분히 벗어날 역량이 있었다.
오히려 방해가 된 것은 섭식 강화였나 지나치게 소화를 잘 시켰다. 물론 먹는 만큼 전부 흡수한다는 것이 좋은 것이지만, 이런 강력한 영약을 먹을 때는 전부 취하지 못하고 좀 버려도 되는 것인데 지나치게 흡수를 잘해서 그만큼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몸 안에 풀려버린 것이다.
오러홀 안에 새로운 별을 만들고 싶었다. 마나 홀에는 이미 새로운 고리가 생성되고 있는 중이다. 오러홀이 팽창하고 오러홀 안에 아홉개의 별이 맹렬하게 회전하고 춤을 추며 새로운 동료를 부르는 의식을 치렀다.
오러홀과 마나홀을 팽창시키고도 모자라 밖으로 뿜어낸 잉여의 에너지들이 아우토반의 폭주족이 되어 크락션을 울리며 몸 안의 대로를 질주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충분히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백분의 일초도 안 되는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폭주족을 순간적으로 놓쳐서 통제하지 못했고 폭주족들이 교통사고를 일으켰다.
쾅!
몸속에서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순간 정신을 잃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고 다시 모든 것을 통제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