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89화 (189/206)

188. 내가 있는 곳

소설에서 볼 땐 이렇게 기나 마나를 돌리다가 쾅 소리가 나고 그러면 임독양맥의 타통이니 뭐니 했었는데 나는 진짜 사고다.

굳이 비슷한 것을 찾자면 주화입마의 초기증상이라고 할까. 기사 중에서도 수련 중에 마나의 길이 망가지면서 불구가 된다거나 심하면 죽는 일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문제다.

죽는 것은 그냥 싫은 정도지만, 반병신이 되어 손도 발도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 되는 것은 두렵다.

정신을 집중하며 마나와 오러의 운용에 집중했다. 하지만 하나의 별이 더 생길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역시 이것만으로는 역시 부족했던 것일까?

단순히 마나와 오러가 많아진다고 경지가 상승하는 것이면 터무니없는 부자나 혹은 왕실에는 초월급 강자를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 부족한 것이 과연 무엇일까? 던전 안에서 광검제나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를 만났을 때는 경지가 너무 차이가 났던 것인지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엘프의 숲에서 여왕을 만났을 때는 작은 단서를 보았다. 그곳에서 여왕은 마치 숲과 한 몸인 것만 같았다. 던전 안에서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그랬듯이 마치 숲 안에서는 신이나 다름없다는 느낌이었다.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했다는 것에는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세상은 어디일까?

나는 정체성이 애매한 존재다. 지구와 아노더스 두 개의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란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고 양쪽 세상에서 모두 살아가고 있다.

나와 거의 비슷한 삶을 살아야 했던 광검제는 과연 어떤 세상을 선택했을까? 애초에 자신만의 세계를 만드는 것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른다.

쉬익!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에 다시 거칠게 내달리는 오러가 길에 또 길게 상처를 냈다.

“쿨럭!”

입에서 울컥하고 시커먼 핏덩어리를 토했다. 나는 이렇게 초월급에 오르지 못하고 죽는 건가? 겨우 여기서 이렇게 죽으려고 새로 태어났던가?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겨우 이만큼이나 일궈놨는데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그놈의 교주인지 마왕의 목을 날리고 유유자적하고 행복하게 남은 생을 조용히 살아갈 것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신에게 선택받은 용사 아닌가? 보통 용사는 특전 같은 것이 있어서 무슨 짓을 해도 술술 일이 잘 풀려야 하는 것 아닌가?

용사가 수십명이라서 용사끼리 투쟁을 하는 그런 소설도 본 기억은 있지만, 이 세상의 용사는 나 하나뿐이잖은가. 내가 죽으면 이 세상이 멸망한다.

오두막집에서 봤던 그분들 보고 계시죠? 잘생긴 분이나 인상 좋지 않았던 분이다 둘 중 하나라도 좀 도와주시죠?

“우웨에엑!”

이번엔 시뻘건 피를 한 사발이나 토했다. 슬슬 몸이 한계다. 이거 어쩌면 엘프 여왕이 나를 암살하기 위해 작전을 세웠던 것이 아닐까? 별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그때 오러홀의 한 구석에 숨어있던 작은 한줄기 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맹렬히 회전하고 있는 힘과 별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기르고 키운 힘이 아닌 이질적인 힘이다. 그리고 내 통제가 아닌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생각났다. 9성에 오를 때 먹었던 용사 아렌 세인티아의 정수가 가졌던 힘이다. 내가 미처 다 흡수하지 못하고 오러홀 어딘가에 흡수되어 숨어있었던 힘이 흘러나온 것 같다.

그런데 왜 지금? 지금 내가 가진 힘만으로도 죽기 직전인데 통제도 안 되는 힘이 추가된다면 이제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

이 정도가 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죽는 것 자체는 두렵지 않다. 다만 무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이 정도쯤 되면 반신불수가 된다거나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반드시 죽을 테니까.

아렌 세인티아의 힘이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하더니 내가 돌리고 있는 오러와 마나의 덩어리와 합쳐졌다.

‘아, 이제 끝인가?’

전생과 현생의 기억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전생의 나는 왜 그렇게 처절하게 살아남으려고 했을까? 차라리 대격변 초기에 죽었다면 그 오랜 세월 동안 고생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이번 생의 나는 왜 이런 귀찮고 힘든 일을 시작했을까? 마신교고 뭐고 그냥 조용히 모른 척 살았어도 됐을 것이다.

비록 소영주인 마리오와 감정은 있었지만, 그냥 4성 기사 정도로 만족하며 처음 태어났던 크리스타 백작령에서 적당히 아버지의 뒤를 이어 봉신 기사 작위를 받고 살았어도 충분히 행복한 삶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번 삶이 달라지게 된 것은 통로를 열게 된 그날부터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통로 탓을 하기엔 그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나는 크리스타 영지를 떠났을 것이고 지금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성공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했다.

마신교와 싸우게 된 것도 단순히 전생의 기억 때문에 변이체를 싫어해서만은 아니다. 분명 그렇게 해서 얻는 이익도 생각했었다.

시간을 다시 되돌린다고 해도 나는 어쩌면 같은 선택을 할지도 몰랐다. 물론 어머니 나무의 열매를 낼름 집어먹은 것을 빼고 말이다.

전대 용사인 아렌 세인티아의 힘과 합쳐진 거대한 힘은 더욱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히려 통제가 쉬워졌다. 아렌 세인티아의 힘이 통제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이게 용사 특전이라는 건가?’

역시 이런 게 없으면 섭섭하다. 신님들 믿고 있었습니다. 여유가 생기자 다시 생각이 돌아왔다.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나의 세계는 과연 어떤 곳일까? 지구 아니면 아노더스? 잘 모르겠다.

나는 두 세계 어느 곳도 선택할 수가 없었다. 내가 욕심이 많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지구도 아노더스도 모두 소중한 곳이다. 두 세계를 모두 살리고 싶다.

그때 정말 희미한 기억이 떠올랐다. 이 기억이 떠오른 것이 대체 몇 년 만인지도 모르겠다. 전생의 나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존재도 있었다.

이제는 얼굴과 목소리조차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 했던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3살? 4살쯤이었을까?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이다. 할아버지는 병상에 누워계셨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찾아갔던 병원을 찾아갔던 이유는 돌아가시기 전에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했었다.

어른들의 손에 의해 유난히 높아 보이던 병원 침대 위로 들어 올려졌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혀진 나에게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우리 손자는 어디 가서도 잘 살 거야.”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와의 마지막이었다. 이 기억이 갑자기 왜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의 유언은 반 정도는 정확히 들어맞았다. 잘 살았다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어떤 곳에서도 지독하게 살아남았다.

어쨌든 갑자기 떠오른 할아버지의 유언으로 발상의 전환이 되었다.

‘꼭 세계를 선택할 필요가 있을까?’

김포에서 시작된 나의 여정의 태백시에서 끝날 때까지 수십 곳의 쉘터와 생존자 그룹을 거쳤고 가는 곳마다 잘 적응하고 살아남았다.

‘내가 있는 곳이 곧 나의 세계다.’

별것 아닌, 그냥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 몸을 휘젓고 있는 힘의 덩어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던 힘의 덩어리가 한 바퀴를 돌아 오러홀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폭발했다.

쾅!

무슨 생각을 할 사이도 없이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의식을 잃었다.

다시 의식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죽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위험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쨌든 나는 또 살아남았다.

순간적으로 의식이 날아갔던 것인지 아니면 꽤 긴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일단 몸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일어서는 순간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이게 뭐야?”

오러홀이 사라졌다. 오러홀이 있던 자리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마나홀도 마찬가지다.

“왜 아무것도 없어?”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다. 오러홀과 마나홀이 사라질 수는 있다. 오러홀이 깨지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죽거나 사람 구실을 할 수 없을 정도의 불구가 된다. 지금 나처럼 멀쩡한 경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든다. 현재 상태에 대해 물어볼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람이 아닌 것은 있다.

“아스트로퍼, 내가 의식을 잃은 지 얼마나 지났어?”

-29시간 35분 14초 정도?

아스트로퍼가 튀어나오며 대답했다. 짧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오랜 시간도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너 지금 어떻게 가동되고 있는 거야?”

아스트로퍼는 평소에 내 마나를 흡수해서 가동된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마나를 흡수한다는 느낌이 없는데도 멀쩡히 움직이고 있다.

-당연히 너에게서 마나를 공급받고 있지.

아스트로퍼가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다시 느껴보니 정말 미세한 마나가 나에게서 아스트로퍼에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스트로퍼의 효율이 갑자기 좋아졌을리는 없으니 내가 가진 마나가 그 정도로 많아졌다는 뜻이다.

“내가 초월급이 된 건가?”

새삼스럽게 몸을 여기저기 살폈지만, 당연하게도 딱히 달라진 곳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초감각으로 느껴지는 느낌도 달라져 있었다. 9성에 있을 때도 초감각으로 감지되는 거리는 무척 넓었다. 집중하면 반경 1km 정도는 감지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차원이 다르다. 그냥 끝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도 딱히 이질감이 들지 않는다. 그냥 주변의 모든 것이 내 몸의 일부가 된 느낌이었다. 이제야 할아버지의 유언과 함께 떠올렸던 화두가 실감이 되었다.

‘내가 존재하는 곳이 곧 나의 세계다.’

아마 광검제가 초월급에 닿았을 때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초월자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슈바르거트를 꺼내 오러를 불어넣어 보았다. 오러홀도 없고 그곳에서 회전하는 별도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오러가 슈바르거트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검에서 뿜어지는 오러가 끝도 없이 뻗어나간다. 슈바르거트가 변함없이 탐욕스러울 정도로 오러를 마구 흡수하고 있었지만, 예전과 다르게 나의 오러는 마치 무한처럼 느껴졌다.

슈바르거트에게서 뿜어지는 오러가 수백미터를 넘고서야 나는 확인을 그만두었다. 몸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슈바르거트가 힘겨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마왕이 사용했던 마검이라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의 힘이 내 손 안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몸을 하늘로 띄우고 날기 시작했다. 예전과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다. 고속비행은 강력한 능력이다. 예전엔 오히려 내 몸이 견디지 못해서 그 능력을 모두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대전에서 순식간에 수도권으로 진입한 나는 수원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만난 변이체를 단숨에 제압했다.

강한 변이체였다. 여태까지 살아남았던 변이체가 모두 그렇긴 하겠지만, 광주에서 만났던 레이저를 쏘는 대머리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무기를 가진 녀석이었다.

전갈을 닮은 녀석이었는데 꼬리에서 갑각질로 된 포탄을 쏘는 녀석이었다. 그 포탄이 얼마나 빠르고 정확한지 음속에 가깝게 비행하는 나를 거의 맞출 뻔했다.

불과 이틀 전 9성의 경지였다면 꽤 애를 먹었을 법한 녀석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는 너무 쉬운 상대였다.

수원을 시작으로 순식간에 안산, 군포, 시흥을 거쳐 안양, 의왕, 성남까지 돌았다. 아무것도 없는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 지역에는 터줏대감들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딱히 위험한 상대는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서울 주변을 한 바퀴 돌아 내가 살았던 김포에 도착했다. 내가 살았던 지역을 잠시 살폈지만, 역시 문명의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 추억을 떠올릴 정도의 무언가가 남아있진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천에 도착했다. 인천에는 도착하자마자 아주 성대한 환영 파티가 열렸다.

놀랍게도 인천에 남아있는 변이체가 한 마리가 아니었다. 무려 수십마리의 변이체가 인천 앞바다에서 해변으로 기어올라오며 나를 향해 격렬한 원거리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무슨 인천 상륙 작전이냐?”

정신없이 날아드는 여러 가지 속성의 공격을 피해내며 나는 광검제에게서 배웠던 것을 한번 써먹어 볼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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